추억은 추억으로

풋풋한 시절의 기억 하나

by 요빈

벌써 십 년 전, 일문과 시절에 동경했던 선배가 한 명 있었다. 얼굴이 또렷이 기억나는 01학번 선배. 어려 보여서 동갑쯤 되나 했더니 삼수해서 들어와 실제로는 훨씬 더 많아 깜짝 놀랐던. 지금은 일문과 사람들과 커넥션이 없지만 당시 나는 조별모임도 활발히 하고 소모임에서도 활동했었고, 국제학회 통역보조로 참여하는 등 나름 눈에 띄는 인간으로서 존재했었다. 나와 친하게 지내 주었던, 희미하게 기억나는 친구들이 몇 명 있다. 잘 지낼까. 아무튼.


과외적 술모임도 꽤 잦았는데 그때마다 마이클잭슨 빌리진을 랩부터 댄스까지 완벽하게 소화하던 그 선배. 아니 그래서 동경했던 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자신감 있고 당당하고, "학문을 즐긴다"는 말을 몸소 표현하는 모습이 멋져 보였던 것 같다. 랩댄스는 덤.(사실 레퍼토리가 매번 같아서 나중엔 다들 지겨워했다는..) 그 선배가 회화 수업에서 첫사랑의 슬픈 기억을 꺼냈던 그날부터 나는 그에게 조금 연민을 느꼈던 것도 같다. 스물몇 살이나 먹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좋아했던 여자, 그러나 말 한번 걸어보지 못하고 끝난 사랑에 대한 이야기. 이 무슨 풋풋한 고등학생도 아니고.. 조금 웃기기도 했지만 스물여덟 살 어른남자의 순수한 일면에 반한 걸까. 그때 나는 스물넷.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나는 수업시간마다 그 선배를 보는 것이 좋았다.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아마 단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언젠가, 와세다 교류회 때 사귄 일본친구들이 서울에 놀러 온다는 소식을 내가 대표로 받아 들고 간 적이 있는데, 그때 그 선배가 굉장히 적극적으로 모임을 추진했었다. 그때가 그 선배와 나의 관계가 가장 가까웠던 때가 아니었나. 한동안 그 이름을 잊고 살았다. 아니, 사실 이제는 쥐어 짜야 겨우 나오는 이름이 되었다. 티브이에 나오는 어떤 사람을 보고, 누군가와 닮았는데.. 하고 한참을 생각하다 그 선배 이름을 떠올리게 되었다. 아, 그 선배는 뭐가 되어도 될 사람이었는데 십 년이나 흐른 지금쯤 정말로 뭔가가 되어있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그 이름을 구글 검색창에 쳐 보았다. 흔한 이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드문 이름도 아니다. 몇 개 클릭해 보니 그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학교 이름도 같이 넣어보았다. 페이스북 페이지 하나가 검색되었다. 현재 동경대학 재적 중. 내 그럴 줄 알았지, 하고 무릎을 탁. 얼굴을 보니 그대로다. 십 년 전에도 스물서너 살쯤 되어 보였던 그 얼굴이 여전하다. 나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에 친구 신청을 하려 가 문득 손가락이 망설여졌다. 나를 기억할까? 기억한다 해도, 그 짧고 가늘었던 인연이 십 년이나 지난 지금 갑자기 나타난다 해도,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가 특별한 인연이었던 것은 오로지 나만의 생각일 뿐인데. 뭐라고 말을 걸지? 선배님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세요? 기억을 못 한다면 그걸로 끝이다. 기억한다고 해도, 존재감 희미했던 오래전 후배 하나가 이제 와서 커넥션을 갖고 싶어 하는 이유에 대해, 나는 솔직하게 이야기할 자신이 없다.


한참을 그렇게 페이지를 들여다보다가 그냥 창을 닫았다. 그리고 추억의 장을 덮었다. 추억은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걸로 하자. 이제는 뿌옇게 흐려져 잘 보이지도 않는 기억이지만, 가끔 애써 떠올렸을 때 수줍게 웃을 수 있도록. 이 추억의 장은 덧쓰거나 지우지 않는 것으로 하겠다. 인연에 대한 과욕이 가끔 나를 힘들게 했던, 어리석은 시절의 과오를 문득문득 떠올리며, 나이를 먹어가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해 간다.



2016년의 글.

그로부터 또 10년 여가 흘렀다. 지난 달이었나, 우연찮게 그 선배의 이름을 보았다. 역시 흔하지도 드물지도 않은 이름이라 눈에 띄었다. 한국에 돌아온 걸까? 그 선배가 맞다면, 이제 교수님이 되셨구나. 이제 오십을 향해가는 나이, 아직도 노래방에 가면 마이클 잭슨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출까? 관절은 괜찮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었다. 오랜만에 꺼내 본 추억에 희미하게 즐거워하며, 이 글도 다시 한번 꺼내 본다. 문득 든 생각인데, 그 선배가 한국에 돌아온 것이 맞고 교수가 된 게 맞다면 남은 생에서 한 번쯤은 마주칠 일이 있을 것 같다. 나의 이런 예감은 의외로 잘 맞는 편이다. 아마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만약 만나게 된다면 이런 얘기들을 은은하게 나눠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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