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에 대한 질문은 계속된다. 어른들 중에는 'no'를 피력하는 분들이 많다. 나는 무조건 'yes'로 그들에게 저항했다. K와 나는 학기 중에는 늘 붙어 다녔고 방학 때는 시도 때도 없이 통화를 했다. 엄마는 나와 K가 연인사이임을 확신했다 한다. 그러나 우리의 대답은 분명한 'no'.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화제는 그의 연애문제 혹은 나의 연애문제였기 때문이다. 연애 스파이크가 튈 만한 틈이 애초에 없었다.
몇 년 후 엄마는 내가 N과, 소위 말하는 '썸 타는 사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만나러 오질 않나, 선물을 주고받질 않나, 밤새 통화를 하질 않나. 엄마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우리의 대답은 'no'. 사실 애매한 부분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언제나 연애에 관해서는 의견차를 보였고, 종종 커뮤니케이션 불능을 겪으며 다퉜다. 그러고 보니 N과 나는 손도 잡고 다녔다. 내 친구들이 그 장면을 너무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데 뭐라 설명할 방도가 없다. 그게 전부다. 손 잡고 다니고, 식당에서 밥 먹을 땐 나란히 앉아서 먹고.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연인들이 가지는 그런 감정이 있었던 것이 절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그래서 나는 이 두 남자가 나의 친구라고 늘 확신하며 지내왔다. 언젠가 이 둘은 하루차이로 오사카에 놀러 와 우리 집에 일주일을 넘게 머물다 또 하루차이로 하나씩 돌아갔다. 집에서 도통 나가질 않고 있기에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이들의 밥을 챙겨주러 집에 돌아와야 했다. '나가서 관광이라도 하라'는 내 말에 '우린 너를 보러 왔다'라며 그냥 나와 시간을 보내는 걸로 만족하다가, 오사카에서 그 흔한 타코야키 한 번 안 먹고 돌아갔다. 그런 이들과 나를 보며 모두들 말했다. '진짜 친한 사이'.
하지만 나이를 한두 살 더 먹으면서 확신이 불안정권으로 들어섰다. 남녀는 정말 영원히 친구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걸까? K가 결혼한 이후부터 왠지 연락하는 것이 불편해진 것이다. 우린 친구니까 서로 당당하게 연락하면 되는데. 왜 그럴까. 그리고 내 뇌리에 스치는 스무 살 어느 더운 날의 한 장면. 친구사이라고 당당해지지 못하는 원인은 그 찰나의 순간의 감정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즈음 다시금 생각해 본다. 남녀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없을까. N과는 원래부터 애매모호한 관계였으므로 예제로 들기에도 애매모호하다. 오래전엔 내 쪽에서 그에게 '넌 그냥 친구야.'라고 단정하였으나, 최근에는 그가 나에게 굳이 강조하곤 한다. 강력한 부정이 강력한 긍정이듯, 지나친 강조는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역설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린 거짓된 사이임을 서로가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2015년 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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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25년에 추가해 보는 몇 줄.
K와 N과 나는 여전히 간간히 연락을 하며 간간히 다 함께 만난다. 일이 년에 한 번쯤.
우리의 대화 주제는, 삶과 돈과 건강이다. (운동하라고 그렇게 온오프라인으로 잔소리를 한다) 과거의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서로의 경조사를 챙긴다. 확실한 건 그때도, 지금도, 친구라는 것. 과거에도 현재에도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친구로서 인식하고 있다는 것. 무엇으로 시작했건 간에,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을 '친구'라는 틀 안에서 보냈는데, 이 이상 '친구 성립 조건'을 따질 필요가 있을까. 오래전에 느꼈던 나의 작은 혼란은 아마 과거에 대한 후회와, 성애와 인정(人情)을 착각한 것에서 나온 것일 터이다. 이제는 이 생각이 바뀌지 않을 것이란 자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