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글 꺼내보기 01

연극 공부를 시작하게 된 이유 중 하나

by 요빈

내 전공은 '연극학' 이다. 학부 시절 전공과 전혀 다른 전공을 택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유학 이야기에 앞서, 내가 왜 연극을 좋아하게 됐는지, 연극에 대한 어떤 추억이 있는지도 짚어볼까 하다.


이것은 서울 스토리.



담배연기가 흐물거리며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검은 공기에 하얀 연기, 가로등 불빛만 띄엄띄엄 보이는 시커먼 혜화동 뒷골목에 하얀 담배연기가 퍼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의 뒤에서 비치는 붉은 가로등 불빛 때문에 얼굴은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담배연기만은 명확히 볼 수 있었다. 연기와 함께 뿜어져 나오는 새하얀 이야기도 마치 내가 듣는 것이 아니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맥주를 한 모금, 그리고 담배를 비벼 끈 다음 그는 쉬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나는 듣기만 했다. 아른아른 보이는 얼굴 속에서 눈코입 위치를 찾아가며, 그의 이야기에 취해갔다. 반짝, 하고 안경알에 가로등 불빛이 반사되는 것이,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난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피식, 웃었다.

반해도 단단히 반했구나. 내가. 대체. 왜.


- 왜?

- 아니, 빛이 나네요. 빛. 반짝.

- 어디서..

-.... 얼굴.... 에서요.

그래도,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기억하지 못한다.


대학로에서 과연, 하루에 몇 편의 연극이 올라가는지, 몇 명의 사람들이 그 연극을 보고 있는지, 몇 병의 배우들이 생계를 유지해 가고 있는지 알지는 못한다. 그 언젠가, 숫자 좋아하는 사회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얼핏 들은 적은 있지만, 숫자라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할까.

연극-연극----- 연극이 대체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기에, 대학로는 늘 붐비는가. 이 돈 없는 연극배우를 매일같이 술취하게 만드는, 그 연극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냐는 말이다. 새벽 두 시가 넘도록 이 혜화동의 어두운 골목에 앉아, 노상에서 계속 알코올을 들이켜고 있는 이 사람은. 그러니까.. 자신의 꿈 앞에 비굴하고, 세상 앞에서 거만한.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인물이다. 그날 내가 배우와 만난 것은 우연이며 기적이며 실수였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기댈 곳, 혹은 한잔 더 할 수 있는 곳을 찾던 내가 발견한 것은 주인 없는 벽 따위가 아니라, 나처럼 똑같이 취해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한 배우였다. 그때의 나는 그저, '아- 술동무가 생긴 걸까' 하고 반가워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내 머릿속엔 담배연기와 가로등불빛, 영상 15도 정도의 차가운 바람, 그리고 반짝였던 그의 얼굴이 판화처럼 새겨져 버렸다. 그리고 그 배우의 이야기들은 내 가슴속에 새겨졌다.


사실, 그날만은 목이 조금 더 말랐다. 평소보다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향했던 술집에서 한잔, 혹은 한잔 더. 그것이 두 잔이 되고 세잔이 되어 결국 그 골목을 서성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날. 그의 안경알이 반짝거리지 않았더라면, 가슴으로 내뱉는 배우의 인생철학이 없었더라면, 내가 지금 이렇게까지 아프지 않았을 텐데. 다시는 볼 수 없는 '노상의 술 취한 배우'를 떠올리며 가슴 아파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내가 그에게 반한 것은 정말 실수였다.



언제나 나는 실수로 사랑에 빠지곤 했다. 발을 헛디뎌 늪으로 추락하고야 마는 것이 내 연애방식의 가장 큰 오류. 그런 나의 상처투성이 가슴속을 달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시간뿐이라 했다. 이번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까.



(2007년 가을에 적어 둔 글)


이전 05화죽음에 대한 소고(小考)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