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소고(小考) 03

우울의 시작

by 요빈

[우리 몫을 살면 이야기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몫을 살고 있지 못합니다. ]



요즈음 보내는 시간들에 제목을 굳이 붙여보자면 '우울'은 아닌 것 같다.

열여덟 살 즈음, 나에게 처음 우울을 가르쳐 준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그의 우울을 동경했다. 그가 인터넷에서 쓰는 아이디는 '살리에르'.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들다가도 그는 인터넷 게시판에 그렇게도 우울한 글을 쓰곤 했다. 열아홉 살 그를 짓누른 고통들은 글이 되었고, 나는 그 글들 때문에 그에게 반했다. 그래서 매일 밤마다 그가 쓴 글을 훔쳐보고 흉내 내었다. 내 우울한 문체는 그때 정해진 것 같기도 하다. 그때 내가 생각한 우울이란 내 삶의 원동력이자 내 글의 원천 같은 것이었다. 굳이 떨쳐낼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로부터 십 년이 넘도록 우울을 끌어안고 살았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울이 아니다.

나는 나의 우울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삶과 죽음의 메커니즘에 대해 관심이 많았지만 종교적 신념과 부딪혀 나 스스로 관심을 차단하곤 했다. 혹은 타의에 의해 묵살되기도 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나의 의문은 기독교적 세계관에 의한 천국이나 지옥 이외에는 모두 판타지 같은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궁금했던 것은 나의 신앙이 부족해서였을까.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만 해도 나는 우리 할머니가 하늘나라에 가신 것이라 굳게 믿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고, 그렇게 믿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는 어마어마한 슬픔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할머니가 가까이에 계셨다. 엄마가 있고 할머니가 있는 것은 당연한 풍경이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내 가족에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던 터였다. 그래서 나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할머니는 하늘나라로 가신 거라고. 이것은 인간이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무의식 속에서 행하는 합리화다. 그때는 굳이 머리로 생각하려 들지 않았으므로, 할머니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편안하게 마무리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죽음이라는 것, 죽은 후의 세계라는 것에 대해 좀 더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그때부터다. B는 나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고 적어도 6시간은 더 살아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그때 "사는 게 참 쉽지가 않네."라고, "그래도 잘 살아봐야지."라고 했다. 그래도 잘 살아보려 했던 그는 왜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삶을 포기했던 걸까. 여기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은 한동안 스스로 금지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좀 궁금해보려고 한다. 만일 그가 죽음 이후에 찾아올 무(無)를 깨달았기 때문에 그리 한 것이라면, 비겁하다고 돌을 던지리라. 나에게도 삶에 대한 힌트를 조금 주고 갈 것이지.


J도 그렇게 갑자기 사라졌다. 그 둘이 떠난 이유에 대해서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우리 할머니께 오래오래 사시라고 하면 오래 살아 뭐 하냐고 이제는 편하게 가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것도 나는 벌써부터 알게 된 것 같다. 인간의 삶은 번뇌의 연속이라 하였지. 태어난 순간부터 고통이 시작되는데 고통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까지 잠시 모르고 살기도 하고, 마비가 되어 못 느끼는 시기도 거치지만 생물의 삶에는 기본적으로 고통을 전제하고 있다. 윤회사상을 아주 믿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 정말로 전생과 후생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인간들은 이전에 아주 악독하고 나쁜 삶을 산 생명체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마취제가 행복감이라고 해 둔다면 내 논리가 조금 설득력을 가지려나. (온전한 내 논리도 아니고 여기저기서 주워온 조각들이긴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도 행복 찾기에 허덕인다. 나는 행복한 걸까? 하는 끊임없는 자문, 행복이란 뭘까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마취제를 찾지 못한 이들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삶을 관두게 되는 것이다. 내가 추구했던 행복이 있었다. 쉽게 손에 잡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간간히 그 행복을 뒤집어쓰고 고통을 잊곤 했다. 그것이 이제는 행복이 아니게 되었더라. 그래서인가 보다.


멀리 돌아왔지만, 결국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고통이 우울은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대다수의 혹자는 우울로 정의할 수도 있으나,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종류의 우울은 다른 것이다. 이것은 다만 마취제를 잃은 평범한 인간이 느끼는 평범한 고통이라고. 나는 솔직히, 언어로 다 표현은 안 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조금씩 인간 존재의 본질에 가까워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꿈에서라도 그들과 만난다면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맞는지, 너네들은 그래서 그런 건지 물어보고 싶다.


이런 요즈음이다.


(2016년 3월 3일, 오후 9시 56분의 글)



우울이 아니라 발버둥 쳤으나 그 해 12월부터 약 6년간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

우울은 이미 이전부터 퍼져가고 있었다. 당시의 나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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