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 개발/변경 시 주의점
“…'키안티 클라시코’랑 '엘비아 코뇨 모스카토 다스티’ 중에 뭐가 더 좋을 것 같아?”
“…뭐가 다른 건데?”
회사 동기들과 간만에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 모였습니다. 화기애애 기분 좋게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펼친 것까지는 좋았는데, ‘디너 타임 주류 주문 필수’라는 금주가들에게 너무나도 잔인한 레스토랑 원칙에 따라 위와 같은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잠깐만, 내가 볼 때 엘비아 코뇨 모스카토가 스파클링 화이트 와인이네.
모스카토가 보통 디저트용 화이트 와인에 붙는 품종 이름 아냐?”
우리는 코난 뺨치는 추리력을 십분 발휘하여 와인리스트에서 적당한 와인을 고르는 데 성공했습니다. 사실 ‘모스카토’라는 ‘힌트’가 없었다면 일일이 와인을 찾아가며 비교분석 후 굶주린 배를 쥐고 겨우 주문했을지도요. 미지의 존재에 대한 경계심을 지니도록 설계된 인류에게 눈에 띄는 익숙한 키워드는 긴장 상황에서 마음을 달래주는 한 줄기 빛과 같습니다.
브랜드가 은연 중에 내보이는 '힌트'는 방황하는 소비자를 낚아챌 수 있는 좋은 미끼입니다. 브랜드는 브랜드 네임, 각종 비주얼 애셋, 커뮤니케이션 활동 등 다양한 브랜딩 요소를 통해 지속적으로 ‘우리는 이런 브랜드입니다’라는 신호를 보냅니다. 신호를 수신한 고객이 브랜드를 경험하기 전 가졌던 ‘기대’를 실제로 충족시켜줄 때 고객은 브랜드의 팬이 될 확률이 높죠.
혁신적 아이웨어 브랜드 젠틀몬스터는 평범해보이는 누구나(젠틀) ‘비범해지고 싶은 욕망’이 있다(몬스터)는 것에 착안해, 그 역설적 개념을 그대로 담아내는 브랜드 네임부터 제품 라인업, 독특한 마케팅 활동에 이르기까지 유니크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선글라스를 쓰는 순간 만큼은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비범한 무언가를 느끼고, 보여주고 싶은 고객들이 젠틀몬스터를 선택했고, 젠틀몬스터 운영사 아이아이컴바인드의 전년도 매출은 7891억원으로 브랜드 운영은 순항 중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기업 브랜딩, 특히 회사의 이름인 사명(社名)을 통한 브랜딩을 살펴보자면 일이 좀 복잡해집니다.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을 타고 많은 기업들의 사명 변경이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등장한 새로운 면면에 많은 사람들이 당황했습니다. 이름으로만 봐서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기업인지 모르겠는 겁니다. 분명 IT 기업으로 알고 있었는데 하루 아침에 이름이 ‘투모로우’같은 것으로 바뀌어버리니, 내가 알던 그 기업이 맞나 싶죠.
국내 기업들의 사명 변경이 유행처럼 번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SK그룹이 주도했던 ‘업역 표현형’ 사명에서 ‘가치 지향적’ 사명으로의 변경이 대표적입니다. 기업이 속한 산업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사명에서 기업이 지향하는 가치를 표현하는 사명으로 바꾸는 것이죠. SK건설이 SK에코플랜트로, SK종합화학이 SK지오센트릭으로 바뀐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이렇게 가치 지향적인 사명은 기업의 정체에 대한 힌트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죠.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그 이름을 알고 있는 대기업의 경우 가치 지향적 사명으로의 변경은 이점도 많습니다. 구체적 사업/산업이 아닌 관념적/추상적 가치로 기업을 정의함으로써 규모감을 표현하며, 기업 고유의 존재 이유를 전달하기 용이합니다. 또한 상징성과 확장성을 지닌 이름을 통해 더욱 폭넓은 브랜딩이 가능합니다. 내부 임직원들의 자부심 제고에도 큰 역할을 합니다. 임직원들은 ‘소프트웨어 산업 종사자’보다 ‘세상의 연결을 만드는 일꾼’으로 정의될 때 더욱 큰 자부심을 느낄 것입니다. 아직 낯선 사명의 뜻은 적극적 광고와 SNS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널리 알려나가면 됩니다.
다만 위와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그리고 인지도가 낮고 규모가 작은 기업일수록, ‘우리는 이러이러한 사업을 합니다’라는 힌트를 노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기업에 비해 안정적이지 않고, 신사명의 의미를 널리 광고하기 위한 자본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업 설명회를 진행하고, 파트너사와 거래하고, 투자를 받아내고, 정기적으로 애뉴얼 리포트를 공개하고, 명백하고 투명한 정보를 가지고 사업을 해야하는 ‘법인체’임을 고려했을 때, 기본적으로 고유의 사업과 전혀 동떨어진 뜬구름같은 사명은 리스키합니다. 직관적으로 어떤 사업을 하는지 ‘눈치는 챌 수 있는’ 정도, 그리고 그를 통해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것을 알 수 있는 이름이면 좋습니다.
예를 들어 두산 에너빌리티(구 두산 중공업)는 에너지와 무슨 빌리티의 합성임을 ‘눈치 챌’ 수 있는 이름입니다. 업계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아 두산이 에너지 사업에 집중하겠구나’, ‘빌리티는 possibility 또는 요즘 핫한 sustainability인가? 지속가능한 에너지 사업으로 확장할 수 있겠군’ 등의 추론이 가능하죠.
제품 브랜드와 기업 브랜드의 브랜딩은 분명 달라야 합니다. 산업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보통 기업 브랜딩은 제품 브랜딩보다 조금 더 내밀하고, 빈도나 채널/타겟이 구체적이며, 기업의 사업적/원론적 지향점과 더욱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를 고려했을 때 사명 개발은 제품 브랜드 네이밍과 다른 접근이 필요함을 알 수 있죠.
‘메타(meta)’같은 우주 스케일 급 멋진 단어는 MAU 30억 이라는 수치를 자랑하는 글로벌 테크 플랫폼 기업에는 어울리지만, 어떤 기업에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어색함을 줄 수 있습니다. 결국 핵심은 우리 기업에 집중해 우리의 아이덴티티와 차별적 강점을 명확하게 진단, 타겟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도록 적당한 힌트를 보내는 것입니다. ‘우리 개쩌는 지속가능성 에너지 사업으로 세계 짱 먹을거야!’라고 소리칠지, ‘에너지는 지구에서 비롯되고, 다시 지구로 돌아가니, 우리는 그 순환의 과정을 도울 뿐이에요’라고 속삭일지는 우리 브랜드에 어울리는 톤 앤 매너가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