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브제] 브랜드: 춤추는 대수사선

당신의 브랜드 스토리가 영원히 완성될 수 없는 이유

by yobjet


“과다출혈로 죽으려면 일단 맨손이나 전기충격은 아니야. 전기톱, 식칼 중에 골라보자.”


놀라셨나요? 게임 이야기입니다. 저번 주, 친구들과 보드게임을 했습니다. 특히 <디셉션>이라는 마피아 게임과 추리 게임을 섞어 놓은 듯한 게임 하나만 5판은 한 것 같습니다.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전제 하에 시작되는 이 게임은 플레이어들이 수사관이 되어 '추리''발표'를 통해 범인을 잡아야 하는 게임인데요. 범인의 블러핑을 뚫고, 범행의 맥락을 파악해 살인 도구와 핵심 단서를 정확히 맞춰야 합니다. 법의학자를 맡은 플레이어는 범인의 정체를 알고 범인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며 플레이어들의 추리를 돕습니다. 범인을 맞추기 위해서는 본인만의 추리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요. ‘독살’이라는 사인, ‘슈퍼마켓’이라는 살인 장소, ’노인’이라는 피해자 신원 힌트들을 보고, 깔려 있는 타일들 중 ‘황산’과 ‘우산’을 골라 ‘피해자인 노인은 소나기 오는 날, 평소 사이가 안 좋았던 슈퍼마켓 주인으로부터 살해당했다. 슈퍼마켓에서 나가며 급히 산 우산을 폈을 때 주인이 흘려둔 황산이 옷에 튀었고, 노인은 그것이 빗물인 줄 알고 그냥…혀로 핥았다?’라는 식으로 추리 라인을 잡아가는 게 너무 재밌더라구요. (말이 안 돼도 일단 넘어갑시다, 원래 첫 판은 아무 말이나 하는 거랬어요)


사실 <디셉션>같은 추리 게임 외에도 파티게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략/블러핑 보드게임에서는 나만의 스토리라인을 짜는 것이 필수인데요. 특히 개인전일 때, 상대를 공격하든 나를 방어하든 몇 수 앞까지 내다 본 나만의 논리가 있어야 합니다. 예상되는 공격과 허점까지 커버할 수 있는 스토리라인이 있다면 최고겠죠.



<디셉션>은 법의학자 플레이어가 살인 장소/사인/동기/시체 상태 등을 마커로 알려주면 추리가 시작됩니다





브랜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본인만의 이야기, '브랜드스토리'가 필요합니다. 브랜드가 주인공이 되어 그만의 차별적 강점을 무기로, 고난을 타개하며, 존재 이유를 실현해나가는 이야기가 바로 브랜드스토리입니다. 이는 유명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이야기한 전형적인 'Hero's Journey(영웅 서사)' 구조로 볼 수 있는데요.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브랜드스토리는 순수 예술, 즉 100% 창작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실 브랜드스토리는 시, 소설, 에세이보다 기사나 르포에 가깝습니다. 브랜드가 이미 지니고 있는 탄생기, 사명(使命), 비전, 실적, 히스토리, 에피소드를 발굴하고 구체화해 매력적으로 다듬은 이야기가 브랜드스토리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사실, 사건, 개념을 잘 정리하고 구조화하며, 청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매끈하게 다듬는 역할. 브랜드스토리를 만드는 저희 브랜드 컨설턴트들은 작가라기보다 기자이며 에디터입니다.


업력이 오래된 브랜드의 경우 이야깃거리가 풍부합니다. 브랜드가 속한 인더스트리와 브랜드 추구미에 따라 브랜드스토리의 내용은 다양하게 개발할 수 있는데요. ‘탄생-도전-위기 극복-성공-미래’같이 시계열로 이야깃거리를 발굴해 구조화 할 수도 있고, IT처럼 혁신 제품이나 솔루션이 중요한 산업이라면 차별적 속성과 강점에 deep-dive해 컨셉추얼한 이야기를 풀어갈 수도 있겠죠. 신생 브랜드의 경우 이야깃거리에 한계가 있기에 오히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브랜드 탄생 배경 외에 이렇다 할 성공기나 뚜렷한 강점을 내세우기 어려운 경우, 브랜딩에서의 차별화를 강조할 수 있습니다. 브랜드 철학, 브랜드 존재 이유, 브랜드 ambition과 같이 비저너리한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죠. 당연히 이 경우에도 너무 근거 없고 뜬 구름 같은 이야기는 금물입니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도, 브랜드스토리는 언제나 ‘진실’과 ‘진심’에 기반해야 합니다.


한편 브랜드스토리란 마더소스입니다. 다양한 콘텐츠로 변주될 수 있는 바탕 콘텐츠죠. 어떠한 변형도 없이 여기저기 다양한 곳에서 돌려막기로 쓰기 위해 개발하는 ‘완벽한 브랜드스토리 한 개’는 활용도가 떨어집니다. 핵심 아이디어와 핵심 메시지가 명확히 정해져 있다면 채널/상황/목적에 따라 실질적 액티베이션의 영역에서 스토리를 변주하는 것이 더 실용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브랜드스토리는 짧으면 짧을수록, 유연하면 유연할수록 활용도가 높습니다. 잘 짜인 브랜드 슬로건 하나가 그 자체로 강력한 브랜드스토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브랜드의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담은 ‘브랜드 북’같은 콘텐츠를 개발할 땐 많은 내용을 세세히, 다양한 관점에서, 창의적으로 다뤄야 하다 보니 길이가 길어지겠죠. 양도 많아지구요. 결국 브랜드스토리는 계속해서 형태를 바꾸는 메타몽같습니다. 명확히 정해진 모양이나 형식이 없습니다. 영원히 완성될 수도 없습니다. 브랜드스토리는 브랜드와 함께 계속 성장하고 진화하기 때문입니다.



현대모비스의 브랜드 매니페스토 필름의 한 장면. 요즘 브랜드스토리는 대부분 이러한 비디오 형태로 제작됩니다






세상엔 수많은 추리 덕후들이 있습니다. <셜록홈즈>, <명탐정 코난>, 히가시노 게이고의 전세계적 인기가 이를 증명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군데군데 빈 칸을 채워 완전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나봅니다. 이러한 고객의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 브랜드스토리에는, 그리고 브랜드에는 조금씩의 여백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