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것에 흔들리지 않기
NRC(나이키 러닝 클럽) 어플에 접속했을 때 첫 화면에 뜨는 문구가 뭔지 아시나요?
“러닝이 좋을 때나 싫을 때나 늘 함께 달릴게요”
러너들이 언제나 러닝을 사랑하진 않아요. 1km조차 힘들고, 러닝화를 쳐다보기도 싫은 날이 있죠. 누구에게나 몸이 무겁거나, 컨디션이 별로거나, 그냥 왠지 뛰기 싫은 날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실 러닝만큼 컨디션을 많이 타는 운동도 없습니다. 몸의 컨디션 뿐 아니라 날씨, 주로 등 주변환경의 컨디션도 포함이죠. 어떠한 도구도 없이 맨 몸으로 하는 야외운동이다 보니 몸 상태와 외부 조건의 영향을 있는 그대로 받아내는 운동입니다. 악조건 속에서도 그냥 뛰러 나가는 찐 러너분들, 정말 리스펙합니다.
어제, 함께 운동하는 친구가 그러더라구요. ‘운동선수들 중에 T가 많다는데, 당연히 그럴 것 같지 않냐’고. 그의 논리는 ‘T는 오늘 어떤 기분 나쁜 일이 있었든지 간에 운동은 해야 하면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며, 감정을 배제하고 결정하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운동을 할 수 있고, 그래서 더 성실하게 운동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운동선수들 중에 T가 많은지 아닌지를 떠나, 그의 주장은 다소 그럴 듯 했습니다.
브랜드가 T라면, 어떤 사람일까요?
회사에서 종종 고객사와 함께 브랜딩 워크샵을 진행하곤 하는데요. 제가 가장 즐겨하는 액티비티는 ‘브랜드 의인화하기’입니다. 세부 액티비티는 산업과 프로젝트 별로 달라지지만, 이 액티비티는 거의 매 프로젝트마다 필수로 진행하는데요. 브랜드 페르소나 그려보기, 브랜드 프로필 만들어보기, 브랜드 인터뷰하기 등의 형식으로 다양하게 구체화시켜 진행합니다. B2B브랜드에는 신선한 관점으로 브랜드를 재정의할 수 있게 해주며, B2C브랜드에는 명확히 일원화된 톤앤매너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저는 언제나 아래와 같은 질문으로 포문을 엽니다.
“우리 브랜드가 사람이라면, MBTI는 뭐일 것 같으세요?”
같은 MBTI라도 실제 사람들의 성격과 모습은 천차만별이라는 사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MBTI는 브랜드가 추구하는 톤앤매너/이미지의 틀을 잡기에 매우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도구입니다. 워크샵에서는 브랜드 특성과 MBTI 요소 별 특징을 대응해 비교해보며, 논의를 통해 MBTI를 결정하는데요. 사실 I나 T를 ‘사회성 없는 MBTI’로 배척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지, 대부분 참가자들은 덮어놓고 본인 브랜드가 E, F였으면 좋겠다고들 하십니다. 그래서 액티비티 시작 전 ‘세상에 나쁜 MBTI는 없으니, 지금까지 합의된 내용에 어떤 요소가 가장 잘 대응되는지에 집중해 우리 브랜드의 희망 이미지를 그려봅시다‘라고 합니다.
E와I, S와N, P와J에도 각각 대응되는 브랜드 요소와 특징이 있지만, 이번엔 T에만 집중해볼게요. 브랜드가 T일 때 희망 편과 절망 편으로 나누어서 시나리오를 만들어봤습니다.
<브랜드가 T일 때: 희망 편>
출시
수시로 촉을 세우고 상황(시장)을 면밀히 관찰함. 세상의 변화를 오감으로 느낌. 정확한 분석과 데이터를 바탕으로 최적의 등장 시기와 적절한 스타일을 갖춤.
-> 고객 “와 진짜 필요한 순간에 딱 나왔네”
광고 캠페인
실험가. 말(캠페인 메시지)의 내용과 형태적 상호작용을 연구. 데이터와 팩트에 기반해 먹힐 만한 메시지를 임팩트 있게 전달.
-> 고객 “와 진짜 센스있다 칸 라이언즈 가야할 듯”
제품/서비스 설계
뭘 하든 불필요한 기능/낭비는 없음. 안전성과 효율을 완벽히 보장. 애초에 상대(고객)가 목말라했던 그 지점을 정확히 충족시켜줌.
-> 고객 “군더더기 없다, 알잘딱깔센.”
<브랜드가 T일 때: 절망 편>
출시
분위기(시장 환경)의 미세한 변화 따위 알 바 아님, 내가 기준임. 내가 철저히 분석하고 내린 결정에 번복이란 없음. 그냥 고집대로 밀고 나감.
-> 고객 “와…시대를…너무 앞서갔다…” or “헐 이런 걸 출시했다고? 감다뒤…”
광고 캠페인
모범생.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룰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음. 브랜드 자산이나 광고 컨셉을 있는 그대로 구현하는 데만 집중.
-> 고객 “유튜브 프리미엄 써서 다행이다 이런 광고 안 봐도 돼서…”
제품/서비스 설계
완벽한 퀄리티에만 집중한 나머지 휴먼 터치나 감성적 어프로치가 부족해짐. 겉으로는 매끈한 것 같으나 뭔가 인간적으로 끌리지 않음.
-> 고객 ”뭔가 부족한 것 같은데 뭔지 모르겠네…눈이 안 가…”
실제 브랜드의 모습은 업역과 브랜드 규모, 시장 상황 등 맥락에 따라 굉장히 달라지겠죠. 위 시나리오는 다소 드라마틱한 예시이긴 하지만, 당신의 브랜드는 T일 때 어떤 모습일 것 같나요? 반대로 F라면요? MBTI는 뭘까요? 혹시 당신의 브랜드 추구미가 브랜드의 존재 이유나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상충되지는 않나요?
2주 전. 오랜만에 하프마라톤 대회에 참가했었는데요. 말아먹고 왔답니다. PB 기록보다 무려 1분이나 늦은 페이스로 겨우겨우 걷뛰하며 완주했어요. 상반기에 하프를 3번이나 뛰었기 때문에 솔직히 좀 안일하게 생각한 것도 있긴 한데요. 여름에 그래도 꽤 많이 뛰었다고 생각했는데! 충격을 먹고 친구들에게 다신 마라톤대회 안 나가겠다며 훌쩍거렸습니다. 그러나 3일 후, 바로 다음 하프마라톤을 신청하는…놀라운 줏대없음을 자랑했죠. (친구들은 말했죠, "응 너 그럴 줄 알았어")
1949년생인데 매일 아침 10km를 뛰며, 풀마라톤을 이미 20번 이상 완주한 일본 베스트셀러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아시나요? 그의 성실함과 인내심, 끈기와 체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그의 MBTI는 심지어 INFP라고 추측되는데 말이죠. (인프피를 배척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강자라 살아남은 게 아니라, 살아남았기에 강자가 된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MBTI 얘기를 길게 했지만, 결국 T냐 F냐의 문제를 뛰어넘는 인생의 강력한 목표, 비전이 있다면 사소한 역경이나 장애물 정도는 가뿐하게 뛰어넘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브랜드 역시 외적으로 보여지는 이미지에 앞서 내부에 명확한 지향점과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먼저 구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에 걸맞는 이미지와 보이스를 정립해 고객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맞는 러닝 페이스와 폼을 찾기 전에, 먼저 목표로 삼을 피니시라인이 있어야 첫 발걸음을 뗄 수 있는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