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고, 내 안의 힘을 키울 시간을 허락하기
‘한국 자살률 OECD 국가 중 1위’
2023년, 뉴스를 보다 깜짝 놀랐다. 그리고 20년 전의 나를 떠올렸다. 2014년 8월 대한극장. 캄캄했던 상영관의 불이 켜졌다. 무대 위에 강동원, 조한선, 이청하가 서 있다. 그리고 바로 옆에 내가 있었다. <늑대의 유혹> 기자 시사회. 나는 밝은 조명을 맞으며 무대 아래에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는 기자들을 벅찬 마음으로 바라봤다. 3년 동안 꿈꾸던 장면이 현실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오늘 밤 자고 일어나면 인생이 달라질 줄 알았다. 그러나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2년 동안 나는 거의 모든 오디션에서 떨어졌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친구들이 TV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는 것을 보며 열등감과 자괴감을 느꼈다. 빨리 남들에게 인정받을 만큼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해졌다. 나는 살아갈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죽고 싶었다. 부정적인 마음이 나를 압도했지만, 싸울 힘이 없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래서 도쿄에 갔다.
도쿄에서는 오로지 ‘살아가는 것’에 집중했다. 주어진 하루를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대하는 자세를 배웠다. 화려한 배우의 꿈을 내려놓고 평범한 일반인으로 돌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내 안에 에너지가 차올랐을 때, 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인생은 언제나 그렇다. 일어났다 넘어지기를 반복한다.
스물 후반, 한국에서 치열한 경쟁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취업도 하고, 선도 백 번 넘게 봤다. 그러나 나는 내 자리를 찾지 못하고 겉돌았다. 노력하면 할수록 구렁텅이로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나’를 포기할 수 없었다. 마음 한구석에 아직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가능성이 내 안에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른을 코 앞에 두고 뉴욕에 갔을 때, 나는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세상을 보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마천루와 그 사이를 걸어가는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 그 속에서 오랜만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동시에 묘하게 편안했다. 여기에서는 나 자체로 있을 수 있다는 안도감이었다. 그때 나의 인생관이 뒤집어졌다. ‘이 넓고 멋진 세상을 더 알아가고 싶다.’ 앞으로 내가 어떤 경험을 하고, 내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졌다. 결과에서 과정으로, 성공에서 성장으로. 삶에서 추구하는 바가 완전히 달라진 거다. 세상은 바뀌고, 나도 변한다. 그 사실이 내일을 기대하게 했다.
미숙한 스무 살에 정했던 목표를 포기했다고 실패일까? 십 년 동안 미술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으니, 계속 그림을 그려야 할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들었던 ‘꿈’이라는 벽을 부수고 밖으로 나오니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꿈이 좌절되었다고 삶을 포기했다면, 그런 세상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을 거다. 나는 미국과 한국에서 지리멸렬하게 나를 알아갔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디에서 살고 싶은지, 누구와 어떻게 살고 싶은지.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미국에서 사는 것’ 그렇지만 한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다. 요리 강사가 되겠다며 남의 부엌에서 무릎을 꿇고 바닥을 닦고 있을 때는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무작정 이루어질 거라 믿어버리기로 결심했다. 생각을 바꾸자 인생이 달라졌다. 그러자 꿈이 이루어졌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미국에 가정을 꾸렸다.
그런데 미국에서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것은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새로운 생명을 키운다는 것은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세계였다. 최고의 기쁨과 최악의 절망 사이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 아이와 씨름하며 5년을 보내고 나니, 마흔이 되어있었다. 갑자기 미래가 무서워졌다. 내가 뭘 할 수 있지? 내 인생은 이미 정해진 건가? 이렇게 애만 키우다 늙는 건가? 더 이상 새로운 일도, 달라질 일도 없는 것 같았다. 인스타그램을 보면 나만 빼고 다 잘 먹고 잘 산다. 주부우울증과 마흔의 위기가 한꺼번에 찾아왔다.
언제나 그랬듯, 나는 선택해야 했다. 되는대로 살 건지, 뭐라도 시작할 건지.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나만 바라보는 아이와 나만 바꿀 수 있는 나 자신과 내 꿈이었던 가정을 위해. 변하겠다 결심한 순간, 세상이 달라졌다. 남을 보던 초점을 나에게 맞췄더니, 할 수 있는 일들이 보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기획하고, 행동하고, 완결했다. 2년 동안 건강, 마음, 정신, 경제, 관계, 모든 면에서 나아졌다. 가장 큰 변화는 나 자신과 인생을 대하는 ‘마인드’다. 내가 가진 힘이 빛을 발하려면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한다. 시도하고 도전해서 얻은 경험과 지혜를 양분으로 주며 키워야 한다. 모든 일은 한참 지나고 난 후에야 실체가 드러난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성공인지 실패인지. 충분한 시간이 흘러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포기하지 않는다. 계속 새로운 꿈을 꾸고 앞으로 나아간다.
상황이 안 좋을 때 내가 했던 방법들이 누군가에게 하나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위기를 극복하면서 마음이 단단해지고, 생각은 유연해졌다. 살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당장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 상황은 바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끝까지 살아내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돌아보면 가장 행복한 순간은 감사한 마음으로 충실히 살았을 때였다. 가장 후회하는 순간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대충 살았을 때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우리 인생의 하이라이트’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시간의 진정한 의미는 결말에 이르러서야 알 수 있다. 나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현재 나는 글 쓰기를 즐기는 전업주부다. 그리고 꽤 괜찮은 소설을 쓰고 있는 나를 상상한다. 나의 꿈이 이루어졌는지는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하나하나 해나가며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전부 살아냈으면 좋겠다. 건강하게, 자유롭게, 생동감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