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슬픈 이방인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한다.
한 사람이 굳이 보고 싶지 않았던 자기의 민낯을 대면하는 과정을 처절하게 그려내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은 남들이 그다지 신경 쓰지 않거나,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사건에 휘말린다.
그래서 그들의 싸움은 외롭다. 하지만 다행히도 도와주는 존재가 나타난다.
하루키의 소설 중에 가장 좋아했던 건 <해변의 카프카>다.
'좋아하는'이 아니라, '좋아했던'이라고 하는 이유는, 하도 오래전에 읽어서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책을 읽을 당시 나는 낮게 깔린 안개 같은 무력감을 매일 느끼고 있었다.
아빠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앉아서 "(흔들리는) 차에서 책 읽으면 눈 나빠져!"라는 엄마의 경고를 들으면서도 두 시간 내내 꿋꿋하게 책을 읽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책을 다 읽고 나자 '막연한 희망'을 느꼈다.
이후로 <노르웨이의 숲>, <태엽 감는 새>, <1Q84>,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하루키의 작품을 열심히 읽었다.
20대에 느끼던 현실의 답답함,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하루키의 책을 읽으며 달랬다.
<이윽고 슬픈 외국어>는 이지수 작가의 <아무튼, 하루키>를 읽다가 알게 되었다.
하루키가 미국에서 지낸 3년 동안의 이야기를 쓴 책.
제목을 보고 하루키가 미국에서 영어 때문에 고생한 에피소드를 담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26살에 혼자 도쿄에 가서 1년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은 10년이 가까이 미국에서 살고 있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아닌 친구. 내겐 영어가 그렇다.
'세계적인 작가인 하루키도 나와 마찬가지였구나'하며 동지애를 느끼고, 위로받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윽고 슬픈 외국어>는 내 예상과 달랐다.
물론 외국 살이에서 겪는 애로사항을 털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 하루키라는 사람 자체를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1. 하루키의 경험이 바로 내 경험이다.
"푸하하하!"
책을 읽는 동안 여러 번 폭소를 터뜨렸다.
하루키는 프린스턴 대학이 있는 뉴저지에서 2년, 보스턴 케임브리지에서 1년을 보냈다.
<이윽고 슬픈 외국어>는 대부분 그가 프린스턴에서 지낸 동안의 이야기다.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 대학교. 지금 내가 있는 곳이다.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하버드 대학, 로드아일랜드 주 프로비던스 브라운 대학.
그래서 하루키가 하는 이야기들이 상상의 단계를 거칠 필요도 없이, 영화처럼 떠오른다.
예를 들어, <브룩스 브라더스에서 파워북까지>라는 챕터에서 하루키는 아이비스타일로 유명한 브룩스 브라더스라는 의류 브랜드에 대해 이야기한다.
분명히 말해서 오늘날의 미국 젊은이들은 그런 종류의 양복을 거의 입지 않는다.
-(중략)
이곳 학생은 다들 정말 지독한 몰골을 하고 있다.
축 늘어진 셔츠에 청바지, 다림질 안 된 치노 팬츠, 일 년쯤은 빨지 않은 것 같은 스니커즈, 이런 모습으로 땅바닥에 뒹굴고 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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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이곳에서는 옷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 패션처럼 되어 있다.
공부나 운동에 바빠서 옷 따위는 쓸데없는 것에 일일이 신경 쓸 짬이 없어,라는 메시지처럼 보인다.
학생 모두가 굉장히 단정하고 말끔한 옷을 입고 있는 일본 캠퍼스에 이런 애들을 데려가면, 분명히 주변으로부터 눈총을 받을 게 뻔하다.
정말 그렇다.
하버드에도, 브라운 대학교에도 옷을 대충 입은 학생들이 잔디 바닥에 뒹굴뒹굴한다.
(그에 반해, 나와 친구들은 어쩌다 캠퍼스에 가더라도 돗자리를 항상 챙겨 가고 그 밖으로는 절대 넘어가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하루키가 미국에 산 건 1991년 초이다. 무려 30년 전. 때론 너무 옛날이야기라 세월만큼 달라진 부분도 많다.
하지만 지금도 변하지 않은 '미국' 이야기를 읽으며 웃다 보면, 왠지 하루키와 개인적으로 친해진 느낌이다.
2. 글쓰기에 대해 알려준다.
책을 읽는 입장에서 쓰는 입장이 되다 보니, 작가들이 말하는 '글 쓰는 방법'에 대해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하루키가 '외국인에게 외국어로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요령'을 알려준다.
(1)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먼저 자신이 확실하게 파악할 것.
그리고 그 포인트를 되도록 빠른 기회에 우선 짧은 말로 명확하게 할 것.
(2) 자기가 제대로 알고 있는 쉬운 단어로 말할 것. 어려운 단어, 멋진 말, 의미 있는 듯한 말은 불필요하다.
(3) 중요한 부분은 되도록 반복해서(바꿔 말하라) 말할 것. 천천히 말할 것. 가능하면 간단한 비유를 넣어라.
위의 세 가지 점에 유의한다면 그다지 말이 유창하지 않아도 당신의 마음을 상대방에게 비교적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건 그 자체가 '문장 쓰는 법'도 되는구나.
하루키가 알려주는 '내 생각을 전하는 글쓰기 방법'.
이런 귀중한 가르침을 이 책에서 발견할 줄이야. (책값이 전혀 아깝지 않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루키 팬이라면 알겠지만, 그는 와세다 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하고 아내와 재즈 바를 운영했다.
그러다, 29살에 진구 야구장에서 경기를 보던 중, 힐튼이 2루타를 쳤을 때, 불현듯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다.
한 학생이 물었다.
"저... 그 야구 시합에 뭔가 특별한 요소가 있었던 건가요?"
"내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이라는 존재를 확립하기 위한 시간과 경험이었던 거야.
그것은 특별하고 유별한 경험일 필요는 없어. 그저 평범한 경험이어도 상관없지.
하지만 그건 자기 몸에 충분히 배어드는 경험이어야만 해.
나는 학생 때 뭔가를 쓰고 싶었지만 무엇을 쓰면 좋을지 몰랐어.
뭘 쓰면 좋을지를 발견하기 위해 나에게는 칠 년이라는 세월과 힘든 일이 필요했던 거겠지,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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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씨는 그와 비슷한 일이 살면서 누구에게나 다 일어난다고 생각하세요?"
"완전히 똑같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그와 비슷한 일은 많든 적든 누구에게나 언젠가 일어난다고 생각해.
그런 여러 가지 일이 딱하고 제대로 결합하는 계시적인 순간이 언젠가 올 거라고 생각하지.
뭐 적어도 그런 일이 꼭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인생이 더 즐겁지 않을까?"
하루키는 학생들에게 '소설을 쓰는 법'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해 내가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이란 거의 없다.
“아무튼 실제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겠지. 만일 네가 마음속으로부터 절실하게 뭔가를 쓰고 싶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전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설령 지금은 잘 쓸 수 없어도 ‘뭔가를 쓸 수 있는 때는 반드시 온다고 생각하고, 그때까지는 현실 경험을 벽돌을 쌓듯 하나씩 소중하게 쌓아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루키의 이야기를 들으며(실제론 읽은 거지만, 들은 느낌이라.) 생각했다.
그동안 나도 나라는 존재를 정립해가는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던 거구나.
그제야 내가 40살이 되어서야 책을 쓰는 건지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글이 마음대로 잘 써지지 않아 답답하지만, 계속 쓰다 보면 여러 가지 일이 '딱하고 일치하며 빛을 내는 순간'이 올 거라는.
3. 사서 고생하며 사는 이방인
하루키는 뉴저지에서 케임브리지로 이사를 한다.
그때, 미국인 이삿짐센터를 불렀다.
인부 3명은 근육을 과시하듯이 큰 소리로 농담을 하며 당당하게 마초처럼 일을 했고(하루키의 표현 그대로), 이사는 순식간에 끝났다.
"헤이 랏스 오브 럭!(나에게 많은 행운이 함께 하길!) 하고 기운찬 작별 인사를 남기고 운송 트럭이 떠난 뒤, 우리는 아는 사람이라곤 한 사람도 없는 낯선 외국 도시에 둘만 덩그러니 남겨지고 말았다. 서글프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할 수 없지,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서 여기저기 방황하고 있는 거니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또 박장대소를 한다. 너무 나 같아서. 웃긴다.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나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태어나서 30살까지 산 익숙한 한국을 제 발로 떠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에 와서 방황하는 자.
실제로 보스턴에서 프로비던스로 이사를 왔을 때, 우리 부부는 딱 하루키 부부 같았다.
다른 점은, 학교에서 비용을 대주고, 포장 이사를 해준다는 이유로 한국인 이삿짐센터를 고용했는데,
짐이 제때 도착하지 않아 이틀 동안 맨바닥에서 자다는 정도다.
그럼에도 결혼하고 일 년 동안 워낙 이곳저곳을 돌 아녔기 때문에 서글프기보다는 피곤했다.
(미국-서울-하와이-중국-덴마크-스웨덴-핀란드-노르웨이)
굳이 이러고 다니는 스스로가 웃기기도 하고.
하루키는 유럽에서 3년을 살다가 일본으로 돌아가 1년을 살고, 미국에 갔다.
굳이 익숙한 도쿄에서 다시 짐을 싸서 외국에 온 이유에 대해 말한다.
나는 아주 단순하게 여러 곳을 좀 더 보고 싶었고, 여러 가지 체험을 좀 더 하고 싶었다.
좀 더 여러 사람과 만나고 싶었고, 좀 더 여러 가지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아직 그런 것이 가능한 상황에 있을 때 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해보고 싶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이건데!
내가 한국을 떠나 방황하는 이유. 사서 고생하는 이유.
아직 글 실력이 부족해서 하지 쓰지 못한걸, 하루키는 어쩜 이렇게 찰떡같이 써내는 걸까!
미국에 온건 '이왕 사는 거 한 번쯤은 세계 최고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다.'라는 다소 유치한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미국이 나라가 주는 혜택보다는 경험이 더 메리트가 있다.
할 수 있는 동안, 여러 가지를 경험해 보며 내가 가진 잠재력과 가능성을 찾아내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또 다른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다.
(지금은 유럽에서 살아보고 싶고, 좀 더 나이가 들면 남편과 교토에서 1년 정도 살고 싶다.)
글이 길어졌지만, <이윽고 슬픈 외국어>는 외국어를 못해서 슬픈 이야기가 아니다.
어디에 있더라도 우리 모두는 어떤 부분에서는 이방인이고,
우리가 영원히 자명하다고 믿었던 것들 변하는데서 느끼는 배신감, 회의감, 상실감, 슬픔에 대한 이야기다.
(*자명: 설명하거나 증명하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알만큼 명백하다.)
나는 여전히 '여긴 어디? 나는 누구?'하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그런 나에게 하루키의 솔직한 고백은 상처 날 때 바르는 연고 같은 위로가 되었다.
외국에 살았던 경험이 없더라도, 하루키라는 사람 자체가 궁금한 사람, '살아있는 나'에 대해 생각하기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