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 만에 혼인신고서를 해버렸지 뭐야
2013년 12월 10일,
서울의 압구정에 있는 고센(압구정에서 아주 오래된 레스토랑 겸 카페)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날카로운 눈빛에 코가 오똑하고 피부가 깨끗한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속으로 '오, 내 타입이다.'라고 생각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고 생각한다.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을 하는 그는 나의 말을 잘 들어주고,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호응을 해주는 호감형의 남자였다.
그는 보스턴에서 4년째 일하고 있고, 서울에는 잠시 학회에서 발표를 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주에 출국을 한다고 했다.
'뭐시라? 분명히 내 친구 00이(대학 동창)는 이 사람이 한 달 일정으로 왔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한 달 일정 중 마지막 한 주를 남기고 나를 만났다고 했다.
출국 일주일을 남겨놓고 소개팅을 나오다니,
'무슨 생각이냐? 응??!'
남자와의 첫 만남은 꽤 괜찮았고, 그는 다음 주 주말에 다시 한번 볼 수 있겠냐고 물었다. 뜸 들이지 않고 처음 만난 날 바로 애프터 하는 남자. 의외로 직진이네? 맘에 든다. 나는 "좋다"라고 말했다. 나도 없는 일정을 있는 척 따위 하지 않는 33살의 직진녀니까.
고센은 언덕 위에 있었는데, 그 당시 소개팅을 나갈 때면 일부러 차를 몰고 나갔다. 그래야 서로 마음에 안 들면 깔끔하게 각자의 길을 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가 마음에 들었기에 처음 만난 그를 옆자리에 태우고 근처의 버스 정류장에 내려주었다. 보통의 남자라면 처음 소개팅에서 만난 여자 옆자리에 타는 것은 남자 답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냥 걸어갔을 텐데, 이 사람은 고맙다면서 차에 탔다.
허식이 없고 심플한 타입의 남자였다.
두 번째는 청담동 영동대고 옆에 있는 이자카야, '문타로'에서 만나기로 했다.
내가 일하던 마포 스튜디오에서 청담동 '문타로'까지는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고, 다시 버스나 택시를 타고 가야 했는데, 내가 저녁 베이킹 수업을 마치고 출발했을 때는 연말이라 그런지 지하철도 만차에 엄청나게 복잡하고, 압구정 역에서 문타로까지 평소 차로 20분이면 갈 거리를 40분 가까이 걸려서 갈 수 있었다.
결국 약속시간에 한 시간 이상을 늦어버렸다.'이번 소개팅은 망했다......'라는 것을 직감했다.
어느 남자가 두 번째 만남에서 한 시간을 넘게 기다리게 하는 여자를 좋아할까.
급하게 문타로 안에 들어가니 바 자리에 앉아있는 그의 등이 보였다.
가서 "죄송해요......"라며 고개를 숙이는 나에게, 그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으며, "괜찮아요. 뭐 시킬까요?"라고 물었다. 왜 늦었느냐, 연말 주말에 바쁜 이자카야 안에서 혼자 기다리느라 민망해죽는 줄 알았다는 식의 말은 없었다.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바 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요리사가 바로 구워주는 꼬치와 사케를 함께 먹으면서 그가 보스턴에서 하는 일,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반짝이는 그의 눈을 보며,
나는 머릿속으로 배우자 기도 목록에 있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남자' 항목에 크게 동그라미를 쳤다.
며칠 후, 그는 보스턴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가끔 까똑으로 안부 문자를 보냈다. 전화는 없었다.
보통 다른 지역이나 나라에 사는 남자가 나에게 호감이 있으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표현하던데, 이 사람은 38살이나 되어도 급할 게 없는 모양이었다.
구정 연휴에 우리는 처음으로 통화를 했다. 이후 통화 횟수도 시간도 점점 늘어났다. 서로에 대한 호감도 커졌다. 2014년 5월, 처음 만난 지 5개월 만에 그는 다시 서울에 왔다. 이번에도 학회 때문에 왔다고 했다.
늦은 밤에 인천 공항으로 그를 마중 나갔다. 며칠 전에 백화점에서 한참을 고른 하얀색 원피스에 핑크 색 카디건을 입고 나갔다. 이때 나의 전략은 장시간 비행으로 지친 그를 화사한 모습으로 맞아주는 것이었다. 이왕이면 '이 여자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혀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더 좋고!
그는 당시 내가 살았던 잠실에 있는 호텔을 예약했다. 그런데 호텔에 내려줄 때 보니 러브호텔이었다.
익스피디아에서 사진만 보고 호텔을 예약한 그는 사진과는 다른 실물에 놀란 표정이었지만, 이미 자정이 늦은 시간이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나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친언니는 얼른 다른 호텔로 옮겨주라고 했다. 그래서 다음 날 그는 '잠실 관광호텔'로 숙소를 옮겼다. 이후 그가 한국에 있는 3주 중, 그가 부모님을 뵈러 광주에 간 며칠을 제외하고 우리는 매일 만났다.
아침부터 새벽까지.
그리고 돌아갈 때가 가까워졌을 때, 그는 나에게 알이 매우 작은 티파니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며 청혼을 했다.
그는 나를 앉혀놓고, 자신의 연봉, 지출, 여태까지 모은 돈, 앞으로의 경제 계획에 대해 한 시간 동안 브리핑을 했다. 가방 끈이 긴 만큼 모아놓은 돈은 별로 없었다. 앞으로 1년은 더 대학 강사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월급으로 둘이 생활하기에는 빠듯하다고 했다. 그러니 1년은 원거리 교제를 하고 부교수가 되고 난 후에 결혼을 하자고 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일 년 뒤 사람 일을 어떻게 알고요? 나랑 결혼하고 싶으면 도장 찍고 가세요."
내 말에 그는 살짝 당황한 듯했으나, 이내 웃으며 "좋아요!"라고 말했다.
다음 날, 우리는 잠실의 한 한정식 식당에서 처음으로 나의 부모님을 만났다. 그날 부모님의 주민등록증을 빌려서 다음날 송파구청에서 혼인 신고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그의 부모님을 뵈러 광주로 내려갔다.
시부모님을 처음 뵙는 자리였다.
이미 혼인신고까지 다 해놓고 그제야, '이상한 분들이면 어쩌지......'라는 걱정을 했다. 광주의 실낙원이라는 이름의 중식당 룸에서 만난 두 분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어제 남편에게 처음 들은 얘기인데, 광주에 내려가기 전에 남편이 아버님께 "저희 혼인 신고 했어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아버님께서 "너, 부모한테 너무 그러지 마라......."라고 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그날 아버님은 나에게 싫은 내색을 전혀 내지 않으셨고,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봐주셨다
우리는 그렇게 정식 부부가 되었고, 그는 5월에 보스턴으로 돌아갔다. 나는 배우자 비자를 받고 8월에 이민 가방 두 개를 들고 그가 살고 있던 스튜디오(단칸방)에 들어갔다. 남편의 월급에서 비싼 보스턴 월세, 세금, 공과금을 빼고 나면 생활비는 한 달에 1200불 정도였다. 둘이 살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에, 나는 1년 동안 800불 씩 생활비에 보탰다. 보스턴에서 살림도 사고, 남편과 데이트도 하고, 종종 쇼핑도 했다. 친정 엄마와 혼수 쇼핑을 하지는 못했지만, 남편과 함께 처음 살림을 하나씩 사는 것은 행복했다. 하지만 조금만 기분을 내면 바로 지출이 예산을 넘어버렸다. 그럴 때면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보스턴에서 살림도 사고, 남편과 데이트도 하고, 종종 쇼핑도 했다. 친정 엄마와 혼수 쇼핑을 하지는 못했지만, 남편과 함께 처음 살림을 하나씩 사는 것은 행복했다. 하지만 조금만 기분을 내면 바로 지출이 예산을 넘어버렸다. 그럴 때면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1년 뒤에 남편이 브라운 대학교의 부교수가 되어 로드아일랜드 주의 프로비던스의 방 2개짜리의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나는 더 이상 생활비를 보태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생활 수준은 전과 비슷했다. 평소보다 조금만 돈을 많이 쓰면 금방 티가 났다. 2016년에 나단이가 태어났고, 입이 하나 늘었기에 생활은 여전히 빠듯했다. 혼자서 아이를 보기가 힘들어서 데이케어에 보냈는데, 미국의 사설 데이케어는 한 달에 200만 원 가까이 내야 했다. 남편은 학생 신분이 아니고, 연봉이 생활지원금이나 양육지원비를 받을 수 있는 기준보다는 많았기에 나라에서 아무런 지원금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집이라도 있었더라면 생활에 좀 더 여유가 있었을 텐데.......'라든가,
'있는 집 자식이 아니어서 그렇다'던가 하는 보통의 신혼부부들이 하는 이야기를 나누며 신세한탄을 하기도 하고, 나는 남편에게 "미국 교수 월급이 이렇게 적을 줄 몰랐다."며 비꼬기도 했다.
나단이가 애기였을 때, 남편도 내 잔소리가 견디기 힘들었던지, "그럼 당신이 해보던가요.......!(네가 나가서 돈 벌어보던가)"라는 말을 내뱉었고, 그 말을 들은 나는 더럽고 치사해서 엉엉 울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남편은 프로포즈 했을 때, 이미 자신의 경제 상황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을 했었다. 우리의 결혼 생활이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상황이 힘들고 퍽퍽해지면, "내가 너를 따라 가족도 없는 여기 와서 고생 중이다."라며 남편을 비난하고 원망했다.
성인 남녀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잘 살아보기로 약속을 했다. 남편이 한국을 떠나지 않겠다는 나를 협박해서 억지로 데리고 온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남편이 연봉이 오를 때까지 연애를 하자고 했는데도,
내가 이 남자를 놓칠까 봐 겁이 나서 혼인신고부터 하자고 했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힘든 상황에서는 마치 내가 내 의지가 아니라 남편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미국에 온 것처럼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다. 비겁하고 유치했다.
남편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잘 살고 있었다.
내가 그를 좋아하고 미국에서 살고 싶었기 때문에 기꺼이 그 길을 함께 걷겠다고 동참을 했으면,
돈이 부족하면 아끼거나, 그게 싫으면 일을 해서 벌면 될 일이었다.
당시에 남편의 비자는 J1(연구원 비자)이었다가 이후에 H1(고용비자)로 바뀌었다. J1 비자를 소유한 사람의 배우자는 함법적으로는 일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찾아보면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내가 자신이 없고 싫어서 하지 않았던 거다.
영주권을 받은 후에는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를 키워야 했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돈이 절실했다면, 일을 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남편의 벌이로도 그럭저럭 살 수는 있었기에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내가 하고 싶은 소비, 여행, 더 좋은 집을 원했기 때문에 멀쩡하게 일 잘하고 있는 남편에게 더 열심히 하라고, 돈 좀 더 벌어오라며 바가지를 긁었다.
누구를 위한 것인가? 결국엔 모두를 불행하게 하는 길이었다.
남편이 자신의 일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나도 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배우자로서, 삶의 동반자로서의 예의다. 내가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이 남자와 함께 미국에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가정을 꾸리고 싶어서 미국에 온 것이다.
누구의 강요도 없었고, 나 스스로 원해서 한 선택이다. 비겁하게 도망가지 말자.
유치하게 , "내가 너 하나 보고 미국 땅에 왔으니, 나를 더 보살피고 챙겨야 해."라며 징징대지 말자.
성인 여자면 성인 여자답게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배우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마흔이 되어서야 아주 조금 철이 든 것 같다.
주변에 워낙 유학생 커플이나 포닥 커플이 많다 보니 종종 자신의 아내가 미국에 와서 요리도 하지 않고,
매일 브런치 먹고, 쇼핑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연봉에는 과분한 비싼 렌트를 내며 번드르르한 아파트에 살고 싶어 하고, 기왕 미국 나왔으니 짬 날 때마다 여행을 가고 싶어 한다며 징징대는 남자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도 본인의 선택이다.
힘들면 배우자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는 게 좋다.
주변에 아무리, "내 아내 때문에 고민이에요.... 내 아내가 그러길 원해요....... 내 아내가 그러고 싶지 않아 해요.....'라며, 아내 핑계 대는 것은 부부간의 소통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미국에서 1년 이내로 잠시 공부 겸 놀러 온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인생에서 한 단계 발전을 하기 위해서 왔다면, 서로의 힘듦과 고충을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아내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잘해보겠다고 타국에 와서 고생하는 남편에게 고마워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응원해 주고, 남편은 어찌 되었든 자신을 믿고 가족도 없는 외국 땅에 함께 와준 아내에게 감사하고 그녀의 외로움을 이해해주는 것이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
이건 남편과 아내가 반대의 입장이어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결국 주변에서 아무리 말을 해도 결국은 본인이 겪을 것을 겪어야만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