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아닌 너 자신의 행복을 위해 마음속 우물을 길어 올려라.
세상은 나에게 선한 사람이 되라고 끊임없이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복은 희생하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 덕에 나는 선한 사람이 될 수 없었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나의 행복을 포기해가면서 살 수 있는 그릇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011년 당시. 내 시간을 투자해 글을 써서 보내는 일도 그러했다. 나는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하는 일인데 오해와 푸대접을 받으니 서운하고 속상했다. 그래서 더 이상 그 일이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또다시 내 안에서 따뜻한 음성이 들려온다.
얘야. 너는 선행의 기쁨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구나.
선을 베푸는 일은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란다.
네가 남에게 하는 일은
너 자신에게 하는 일이다.
타인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는 자는 악을 베푸는 사람이다. 남에게 악을 베푸는 자는 이미 자신의 마음과 정신 안에 악을 베푼 것이다. 모든 악하고 잔인한 행위는 서로에게 나쁜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정신과 마음의 고통을 다른 원인으로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란다.
남에게 선을 베푸는 행위도 이와 마찬가지란다. 때문에 타인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 때 가장 먼저 스스로에게 선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얘야. 언젠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던 사람들을 용서했던 일을 떠 올려 보아라. 너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들을 용서했듯이 모든 사랑과 선행 역시 너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고 대가를 바라지 마라. 대가는 이미 선행을 함과 동시에 네 마음 안에 주어졌다. 진리를 깨달은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들이 자신의 선행을 몰라주거나 오해를 하는 것에 괴로워하지 않는단다. 네가 선행을 베풀고도 슬퍼질 때면 그것은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라 스스로 진리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위선자는 선을 베푸는 일에 행복하지 않으면서도 선을 베푸는 자이다. 그러면서 남에게도 자신처럼 행복을 희생하며 살라고 가르치는 사람이다. 너는 그런 위선자들을 본받지 말고,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되어라.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 자신의 행복을 위해 선을 베풀어라.
이제부터 너는 신의 지혜를 선물로 받아라.
네 눈과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선을 베푸는 그 자체에서
기쁨을 누리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라.
신은 인간의 마음 안에 두 개의 우물을 팠다. 하나는 악惡의 우물이고, 다른 하나는 선善의 우물이다. 마음속 두 개의 우물은 결코 마르는 법이 없다. 퍼내어 주면 줄수록 더욱 넘쳐난다. 신은 이 모든 일을 마친 후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선물로 주었다. 그러한 이유로 자신의 마음 안에서 악을 퍼내어 세상에 뿌리는 사람은 악한 운명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마음 안에서 선을 퍼내어 세상에 뿌리는 사람은 선한 운명이 되었다. 이 모든 행위의 가장 큰 혜택과 피해를 보는 이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신이란 존재는 결코 인간에게 그 무엇도 강요하는 법이 없다. 단지, 삶 속에 지혜의 문을 열어 놓고 인간 스스로 깨달아 선택하게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한 것을 가장 소중히 여기며 큰 기쁨을 누리는 법이다.
성당에는 고해소라는 장소가 있다. 신부님과 신도가 두 개의 작은 방으로 각각 들어간다. 방으로 들어가면 사방이 4면의 벽으로 둘러쳐져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중 서로의 방이 맞붙은 벽 하나가 존재한다. 그 벽에만 유일하게 서로의 목소리가 들릴만한 못 크기의 구멍들이 뚫려 있다. 신도는 소통의 벽에 기대어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신부는 조용히 신도의 이야기를 듣는다. 신도가 자신의 죄 고백을 모두 마치면 신부는 신을 대신하여 그의 죄를 용서한다고 들려준다. 때에 따라 함께 울어주는 신부도 있고, 따끔한 충고의 말을 들려주는 신부도 있다.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는 신부도 있고, 호통을 치는 신부도 있다. 어떤 스타일의 신부를 만나든 상관없이 우리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고해소를 나온다. 그런 후, 이제부터 마음 안에 좋은 것을 퍼내어 세상에 꺼내 놓겠다고 다짐을 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수많은 죄의 목록들이 오가는 고해소에 단골손님의 죄목이 있다. 바로 '내가 저 사람들한테 얼마나 잘 해줬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보상이 외부 환경에서 따르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분노하고, 선행을 후회한다. 자신을 위한 선행 그 자체에서 오는 기쁨을 악마가 빼앗아 가버렸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이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것
그 자체에 기쁨을 느껴 사랑을 한다.
천국의 문은 지혜로운 이에게 열리고
신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이에게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낸다.
지혜의 원천은 사랑이고
사랑은 신의 본성이다.
그래서 신의 계획은 언제나 선하다.
얘야. 하늘나라의 기쁨은 이와 같단다.
진정으로 산을 좋아하는 이는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기쁨을 얻는다. 누군가 비행기에 태워 한 순간 정상 위에 올려 놓아준다고 해서 산악인은 기쁘지 않단다.
진정으로 낚시를 좋아하는 이는 기다리는 과정에서 희망을 얻는다. 누군가 수산시장에서 싱싱한 물고기를 잡아다 준다 해서 강태공은 기쁘지 않단다.
진정으로 사냥을 좋아하는 이는 사냥하는 과정에서 쾌락을 얻는다. 누군가 죽은 사자를 집 앞에 잡아 놓아준다 해서 사냥꾼은 기쁘지 않단다.
이와 같이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선을 행하는 삶 자체에서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 땅에서 이미 천국을 누렸기에 죽어서 천국과 지옥이 없다 해도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는단다. 진리를 사랑한 이들이 죽음 앞에서도 감사히 눈을 감을 수 있는 이유란다.
너희가 진정 행복해지고 싶으냐? 네 안에 있는 두 개의 우물 중 어디에 손을 뻗어 세상에 꺼내어 놓을지 생각해라. 그 즉시 행복과 불행의 삶이 판가름 날 것이다.
모든 이는 마음속
두 개의 우물을 기억하라.
스스로의 선택과 집중,
그리고 결정에 의해 손을 뻗어라.
지금 이 순간.
서로가 함께 마시는 우물의 물이
인간의 삶과 세상을 채운다.
- GOOD BOOK과 이야기의 연결고리 -
*하느님께서 하가르의 눈을 열어 주시니, 그가 우물을 보게 되었다. 그는 가서 가죽 부대에 물을 채우고 아이에게 물을 먹였다. (창세기 21,19)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모세에게, "백성을 모아라. 내가 그들에게 물을 주마."하고 말씀하신 그 우물이다. 그때에 이스라엘은 이러한 노래를 불렀다. "우물아, 솟아라. 너희는 우물에게 노래하여라. (민수기 21,16-17)
*창녀는 깊은 구렁이고 낯선 여자는 좁은 우물이다. (잠언 23,27)
*악인 앞에서 흔들리는 의인은 흐려진 샘물이며 못 쓰게 된 우물과 같다. (잠언 25,26)
*보아라.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 (신명기 30,15)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루카 복음서 12,1)
*사람들 앞에서 위선을 부리지 말고 네 입술을 조심하여라. (집회서 1,29)
*율법을 찾는 이는 율법으로 충만하고 위선자는 율법에 걸려 넘어지리라. (집회서 32,15)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제자들이 “예!”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마태오 복음서 13,51-53)
*옛것은 지나가고 새 세상이 온다. (이사야 65,1)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코린토 2서 5,17)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루카 복음서 14,13-14)
*주님께서 네가 행한 바를 갚아 주실 것이다. 네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의 날개 아래로 피신하려고 왔으니, 그분께서 너에게 충만히 보상해 주시기를 빈다. (룻기 2,12)
*현자가 많음은 세상의 구원이며 현명한 임금은 백성의 안녕이다. 그러니 내 말을 듣고 가르침을 받아라. 너희에게 득이 될 것이다. (지혜서 6,24-25)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 1서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