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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문을 쓰겠다면 먼저 미문의 인생을 살자.

복음은 인간의 재능으로 선포되는 것이 아닌, 신의 은총으로 선포된다.

by 이은영

2015년 3월 6일.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 싶다고 했을 때 대부분 걱정하거나 비웃었다. 글쓰기를 전공한 사람도, 그래서 글 꽤나 쓴다 하는 사람도 성공하지 못하는 직업이 작가인데 네가 무슨 수로 그 일을 해낼 수 있겠냐는 매우 현실적이며 솔직한 반응이었다.

나 역시도 궁금했다. 글쓰기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책을 많이 읽는 사람도 아니며, 글을 잘 쓰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을까?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글을 써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까? 훨씬 괜찮은 조건과 재능을 갖춘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신은 나를 선택하시고 당신의 도구가 되라고 하셨을까? 이 말이 누군가에게는 다분히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본인의 마음은 빨간 궁서체로 진지하다. 이런 괴상한 상황을 두고 폴 오스터는 ‘작가가 되는 것은 선택하는 것이기보다는 선택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위 질문에 대한 답을 하려면 그때의 일을 또다시 꺼내지 않을 수가 없다. 2009년은 잊을 수 없는 한해였다. 쇼핑몰 모델 일을 하며 대표직을 맡고 있었는데 계획에도 없던 피부과 의료사고를 당했다. 그로 인해 사업이 멈췄고, 결혼을 약속했던 사람과도 헤어졌다. 꿈꾸던 미래가 하늘에서부터 무너져 내려 온몸이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끊임없이 세상을 원망하고 분노하고 좌절하며 자신을 야무지게 괴롭혔다.

지옥 불에 불타는 존재는 자아(ego)밖에 없다는 어느 신학자의 말처럼, 자아가 만들어낸 우상을 섬기던 죄로 1년간 슬기로운 지옥 생활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자살하는 사람 심정이 이해 됐는데, 고문의 강도가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롭고 힘들어지면 진정 살기 위해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되더라.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멈추는 방법으로 죽음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던 시절, 내면의 어둠 속 바닥을 찍었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듯, 한 번도 읽어본 적 없는 두꺼운 책들이 손을 이끌었다. 책을 거의 읽지 않던 내게는 그 행위 역시 충분히 고통스러울 법한데 그땐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이해되지 않는 두꺼운 책이라면 단연 으뜸인 바이블(bible), 즉 성경책과의 운명적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자신에게 형벌을 내리듯 개신교 성경책을 통독하고, 가톨릭 성경책을 통독했는데 그중 한 구절이 두개골을 쪼개며 심장을 파고들더니 빛이 되어 세상을 향해 뻗어 나가는 느낌이었다. 그건 어둠 속에서 더욱 밝게 빛난다는 ‘희망’ 바로 그것이었다.

이것들은 주님의 명령을 기꺼이 받아들여 땅 위에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가 때가 되면 그분의 분부를 어김없이 실천한다. 그러므로 나는 처음부터 확신을 가지고 깊이 생각한 끝에 이러한 말을 글로 남긴다. “주님의 모든 업적은 좋으니 그분께서는 때에 맞춰 필요한 것을 모두 마련하시리라. 아무도 ‘이것이 저것보다 나쁘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모든 것이 때가 되면 좋은 것으로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온 마음과 입을 모아 찬미가를 부르고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집회서 39,31-35)

위의 성경 구절은 이야기 작법에도 그대로 쓰인다. ‘소설가의 일’에서 김연수 작가는 이렇게 풀어냈다.


사람이 절망 속으로 빠져드는 과정은 개성을 가릴 겨를이 없기 때문에 전락의 이야기는 동서고금 다 비슷하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자신의 고통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이겠지만, 그것만으로 소설을 쓸 때 그 이야기는 너무나 진부해진다는 것, 타지마할은 그다음에 나온다.

.......타지마할이 만들어지면 전락의 이야기는 모두 끝난다. 이제 주인공은 삶을 향해서 다시 올라가게 되는데, 이 회복의 이야기는 그들의 개성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러니까 남들과 다른, 진부하지 않은 독특한 이야기를 쓰겠다면 전락의 이야기보다 회복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게 더 좋을 것이다.

.......시련에 맞서서 행동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이 이 인생과 세계를 대하는 태도가 바뀐다. 즉 세계관이 바뀌는 것이다. 굴복하지 않는 모든 시련은 우리를 원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는 것. 성격의 형성이란 바로 그런 뜻이다.

.......이 인생은 나의 성공과 실패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에 얼마나 대단한 걸 원했는가, 그래서 얼마만큼 자신의 삶을 생생하게 느꼈으며 또 무엇을 배웠는가, 그래서 거기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겼는가, 다만 그런 질문만이 중요할 것이다. 인생이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이야기가 계속되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이 질문에 대답해야만 하리라.

.......대개 백이십 분짜리 영화라면 첫 플롯 포인트는 삼십 분에, 두 번째 플롯 포인트는 구십 분쯤에 있다. 이 지점을 지나면 이야기의 방향이 크게 바뀌면서 주인공은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특히 첫 번째 플롯 포인트를 가리켜 ‘돌아갈 수 없는 다리’, 혹은 ‘불타는 다리’라고도 부른다. 1막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은 어떤 사건을 경험하는데, 그러고 나면 다시는 예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내 삶의 이야기 역시 그러하다. 2009년까지는 1인칭 주인공 시점밖에 배우지 못했기에 내 뜻처럼 되지 않는 모든 일은 재앙처럼만 느껴졌다. 하여, 1년의 세월동안 세상을 원망했고,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며 주변 사람 탓을 했으며, 자신을 끊임없이 단죄하고 괴롭혔다. 그러나 지옥 불에 자아가 불타는 경험을 하며, 신의 시선이라 불리는 전지적 작가 시점을 배워나가고 있다. 그때부터였다. 지금 당장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시련일지라도 결국에는 내 삶에 꼭 필요한 일이 될 것을 철석같이 믿고, 미리 감사 기도를 올릴 수 있는 그런 부류의 인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할렐루야!


전에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던 영적인 세계를 경험하게 되면서 혼자만 아는 것에 죄책감마저 느껴졌다. 그러므로 나에게 타지마할은 대부분 사람이 이해되지 않고 지루하다는 성경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다음 일상의 언어로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읽으면서, 위로와 용기를 얻어 실천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풀어내는 작업이다. 그 언어는 믿음이고 희망이고 사랑이다. 그중 최고의 언어는 사랑이다. 흔히 종교인들이 개종을 권하는 행위와는 다르다. (참고로 나는 성당을 잘 다니지 않는다. 오 마이 갓.) 자아를 태우는 불기둥은 지금도 동행하며 진리를 향해 발걸음을 이끌어주고 있다. 이러한 체험을 성경에서는 ‘주님께서는 그들이 밤낮으로 행진할 수 있도록 그들 앞에 서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 속에서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 속에서 그들을 비추어 주셨다. 낮에는 구름 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을 떠나지 않았다.' (탈출기 13,21-22) 라고 비유적 표현을 썼고, ‘소설가의 일’에서는 일상적 언어로 풀어냈다.


소설의 미문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흔한 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건 너무나 특별한 일이었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래서 일상의 시간이 감사의 시간으로 느껴진다면, 그래서 그 일들을 문장으로 적기 시작한다면 그게 바로 소설의 미문이자, 사랑에 빠진 사람의 문장이 된다.

흔한 인생을 살아가더라도 흔치 않은 사람이 되자. 미문을 쓰겠다면 먼저 미문의 인생을 살자. 이 말은 평범한 일상에 늘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는 말이기도 하다. 그게 바로 미문의 인생이다. 소설 속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추잡한 문장은 주인공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인생을 뻔한 것으로 묘사할 때 나온다. 사랑하지 않으면 뻔해지고, 뻔해지면 추잡해진다.

그러므로 꿈꾼다. 내 안의 참사랑을 더욱 깊이 만날 수 있도록 매일 밤 어둠 속에서 과거의 나를 죽인다. 그리고 새로운 태양과 함께 새 사람으로 태어난다. 일상에서 그 과정은 지루하리만큼 눈에 띄지 않는다. 김연수 작가가 획기적으로 나아지지도, 그렇다고 갑자기 나빠지지도 않는 세계 속에서, 어떤 희망이나 두려움도 없이 매일 글을 썼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매일 그 일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꿈에 그리던 내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과거의 나라면 이런 상황에서 결코 이렇게 하지 못했을 텐데, 지금은 이렇게도 할 수 있는 내가 됐구나.’와 같은 그런 기적을 마주하게 되는 일상을 산다.

김연수 작가를 한 번도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책 속 본인의 주장처럼 미남이라고 한다면 우린 서로 빛나는 외모도 닮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상만은 닮은듯하다. 왜냐하면 그는 이런 말도 남겼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없는 것을 얻기 위해 투쟁할 때마다 이야기는 발생한다. 더 많은 걸, 더 대단한 걸 원하면 더 엄청난 방해물을 만날 것이고, 생고생(하는 이야기)은 어마어마해질 것이다. 바로 그게 내가 쓰고 싶고 또 읽고 싶은 이야기다. 그러니 나는 당연하게도 모든 사람들이 최상의 자신이 되기 위해서 원하고 또 원하는 세계를 꿈꾼다. 인간은 누구나 최대한의 자신을 꿈꿔야만 한다고 믿는다.

고백하건대 삶에 가장 중요한 화두는 글을 쓰다가 언젠가라는 미래에 작가로 대성하는 일이 아니다. 그건 부차적인 문제다. 다만 일상을 통해 들려주는 신의 음성을 매 순간 깨어 듣는 일이다. 그건 평범한 일상에 늘 감사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과 같다. 그런 삶을 살 때 글이란 내가 고통스럽게 창작하며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 쓰인다. 그때 비로소 진정한 신의 도구가 된다. 그렇기에 예술가란 신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며, 글을 쓴다는 건 빛을 향한 평생에 걸친 이야기가 된다. 대중 앞에서 사랑의 신을 찬양했던 비와이의 노랫말처럼 내가 쓰는 글은 나의 history (역사)가 아닌 신의 또 다른 he story (그의 이야기)가 되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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