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는 인간
여행자의 시선
일본에서 2년 정도 살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 계기가 있다.
유학 생활을 하다 보면 향수병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언제든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는 오픈 티켓을 끊어갔다. 하지만 나에겐 오픈 티켓은 무용지물이었다.
언젠가는 한국에 돌아가서 생활해야하니 일본의 삶은 장시간의 여행일 뿐이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보다 이 시간을 충분히 누리자는 생각이 강했다.
한번은 이런 일화가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 대히트를 친 드라마의 스타일리스트가 있었다.
그 사람과는 온라인상으로만 알고 지냈는데 우연히 한국에서 길 가다 마주쳤고 서로를 한눈에 알아보고 악수를 한 계기로 급속도로 친해졌다.
그러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그 역시 일본유학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에선 잘나가던 스타일리스트인 그가 일본에선 유학생 신분으로 세차장 알바를 했다.
나 역시 한국에선 패션 디자이너였지만 일본에선 미용실 알바를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카페에서 만나면 서로 일본 생활 중에 혼나고 실수한 이야기들을 깔깔 웃으며 쏟아냈다. 그때 신선한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가 여행자의 눈으로 세상을 살아가면 남들의 시선을 훨씬 덜 의식하게 됨으로써,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과 상황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즐겁게 생활할 수 있다는 발견이었다.
'나는 언젠가 돌아갈 여행자니까, 배우러 온 유학생이니까'란 생각이 마음의 여유와 사고의 자유로움을 주었다.
그렇게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2년이란 시간을 살면서도 고생이 고생이 아니었고 매 순간이 소중한 추억이었다. 그래서 그 소중한 느낌들을 이미지화시켜 간직했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바로 쇼핑몰 사업을 시작했고 일상이 반복됐다.
일본에서의 여행 추억이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일본으로 여행을 가기도 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 생활도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더 나아가 언젠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갈 인생 전체를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
그때부터 평범한 일상은 내게 소중한 추억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게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 역시 하나의 에피소드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이따금 삶이 지루하고 답답한 마음이 들어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면 여행자의 시선으로 사고의 스위치를 켠다.
그 순간 마시고 있는 공기와 주변 환경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감정의 변화가 일어난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자극을 받는 것은 자신 생각과 감정을 풍요롭게 만든다.
우리는 그 비밀을 알기에 시간과 돈을 들여 여행하는지도 모른다.
또한 여행이 즐거울 수 있는 이유는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이란 생각을 한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이 얼마나 소중한 공간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평생 자신이 살던 도시를 벗어난 적이 없다고 했다.
"난 여행을 하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 모든 해답을 얻을 수 있는데 왜 굳이 돈과 시간을 들여 여행을 하는가?"
- 참고로 난 촌스럽게 비행기 멀미를 한다,,.멀미엔 생강 절임이 좋다던데 난 왜 먹고 더 토할 것 같지? 끄적끄적,, -
p.s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 중에 일상에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있을 거야.
그래서 마음에 힐링이 필요하고 환기와 변화를 주고 싶어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을 거야.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실적인 상황이 여의치 않아 괴로운 마음만 더해지는 사람들에게 내 경험의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여행이 주는 진정한 선물은 남에게 자랑하기 위함이 아닌 내면을 돌보는 힐링이잖아 :)
정신과 의사 문요한이 쓴 ‘여행하는 인간’에 보면 좋은 여행과 나쁜 여행에 관해 이야기한다.
“소소한 일상이나 익숙한 관계에서도 그 소중함을 느끼고, 한 번씩 주위의 시선에서 벗어나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어려운 일 앞에서 고민만 하기보다는 부딪쳐서 해결해 나가는 것이다. 목적지만이 아니라 그 여정을 좋아했던 여행의 시간처럼 삶의 목표만이 아니라 삶 자체를 사랑하게 된다면 당신은 좋은 여행을 다녀온 것이다.
좋은 여행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기준은 여행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행 이후의 일상에 달려 있다. 좋은 여행은 여행자 정신을 유지하고 일상을 보다 새롭게 볼 수 있게 해준다. 그에 비해 여행 때는 좋았더라도 여행 후의 일상이 초라하게 느껴지거나 고달프거나 빈곤해져 간다면 이는 좋지 않은 여행이다.“(318 쪽)
그랬다. 나는 좋은 여행을 다녀왔다. 좋은 여행은 삶으로 이어져 끝나지 않는다. 지금 여기의 삶을 충만하게 만들어주는 근사한 재료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문요한 작가는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적 특성을 살려 여행과 건강한 인간의 정신을 연결지어 설명한다.
“미국 심리학자 고든 올포트(Gordon Allport)는 프로이트보다 훨씬 더 낙관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올포트는 환자가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성격 연구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올포트는 신경증적인 사람은 성인이 돼서도 어린 시절의 갈등과 경험에 지배당하는 반면 건강한 사람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기대와 의욕으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고 봤다. 또한 신경증적인 사람은 스트레스와 긴장을 피하려고 하지만 건강한 사람은 “판에 박힌 것들을 버리고 새로운 감동과 도전을 위해 기꺼이 더 많은 스트레스와 긴장을 선택”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도전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특성이라고 본 것이다.“(156 쪽)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은 명확한 방향을 정하고 확신에 차 걷는 사람이 아니다.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견뎌낼 줄 아는 사람들이다. 다만 자신이 걷는 길 자체를 사랑하고 자신이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 자신의 시도 하나하나가 모여 곧 길이 된다는 믿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여행은 결국 삶으로의 여행이다.“(250 쪽)
어릴 때부터 주변 사람은 내게 말했다. “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야. 그래서 설레고 신선한데 그래서 두렵기도 해.” 그 점은 나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인생이란 여행은 예측 불가하게 흘러가고, 나는 그런 세상을 계속 살아가야만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조금이라도 더 재미있고 유익할까? 이에 대해 파울로 코엘료는 자신의 소설 ‘알레프’에서 이렇게 말했다.
“산다는 것은 경험하는 것이지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고든 올포트와 코엘료 아저씨의 말에 좋아요♥ 누른다. 나 역시 연애든, 사업이든, 새로운 꿈이든, 앉아서 논하기보다 삶으로 직접 겪고 느끼는 것이 남는 장사라고 믿기에 믿음대로 살아갈 뿐이다. 그랬기에 20대 사장님에서 30대 파트 타임 알바생이 되는 것이 가능했고 (참고로 지금은 월급 받는 직장인이다. 그러나 예전과는 다른 직장인이 되었다), 전공이었던 패션 디자이너에서 비전공 분야인 글 쓰는 작가가 되겠다며 도전할 수도 있었다.
처음 ‘여행하는 인간’을 읽었을 때 단순히 여행 예찬론인줄만 알았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반만 읽고 섣불리 판단하려 했던 나의 경솔함을 반성했다. 인간의 삶은 죽는 순간까지 판단해서는 안 된다던 신의 가르침처럼, 책도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까지, 아니 세월이 흘러 다시 읽었을 때 다가오는 감동이 다를 수 있음을 기억하고 대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삶이 여행이고 여행이 곧 삶인 ‘여행하는 인간’ 속 문장들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새로운 세상과 만난다. 하지만 더 중요한 만남은, 내 안에 감추어진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것이다. 여행은 밖으로 향한 만큼 다시 안으로 파고 들어오는 작용과 반작용이다. 그네를 타고 더 앞으로 날아오를수록 뒤로 더 멀어지듯이, 우리는 세상으로 더 멀리 나아갈수록 자신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 수 있다. 때로는 한 번도 마주하지 못했던 색다른 나를 만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나 자신을 알라고 말한다.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을 알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내면의 탐색을 강조하지만 사실 세상과 등지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고 해서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구체적 상황, 관계, 환경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떻게 행동하느냐를 깊이 관찰하는 편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그렇기에 나는 꿈을 분석하는 것보다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깊이 관찰하는 게 자기를 이해하는 데 있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익숙한 상황에서 습관적으로 행하는 일상의 선택이나 반응과는 달리, 여행 중에는 새로운 상황에서 사회적 압력이 약화된 가운데 선택과 반응을 하게 된다. 따라서 여행지에서의 수많은 선택과 행동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그 전까지 몰랐던 또다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을 이러저러한 사람이라는 틀에 가두지 말고, 여행 중에 자신이 어떤 사소한 선택을 하는지 무엇에 이끌리는지 관찰해보자. 때론 당혹스럽겠지만 때론 무척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110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