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 기대하는 삶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지 말자

by 이은영

그날은 첫 조카 동욱이의 12번째 생일이었다. 어느덧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아이는 가족보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더 즐거워한다. 우리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사춘기를 겪어봤기에 다정한 무관심으로 대하는 중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노랫소리에 맞춰 기저귀를 찬 엉덩이를 흔들었는데. 벌써 사춘기를 겪으며 나랑 카톡을 다 하네~ 세월 참 빠르다."

나는 밥을 한술 뜨고는 엄마에게 말했다.

"그러게. 우리 동욱이가 언제 저렇게 컸대. 나도 연락해서 뭐 갖고 싶은지 물어보고 축하해줘야겠다."

"동욱이가 저렇게 클 때까지 나는 뭐 했지~"


엄마를 실망시킨 출생의 비밀


오래전 어느 날. 스님이 물 한잔을 청하며 대문을 열고 우리 집 안 마당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누워 자는 오빠를 가리키며 장차 저 아이보다 크게 될 놈이 엄마 뱃속에 들어있으니 잘 키우라는 말을 남김 채 홀연히 떠나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임신 사실을 몰랐기에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후 임신 사실을 알게 됐고, 엄마는 집에서 나를 낳았다.


위인전에나 나올 법한 출생 이야기 때문인지, 매일 밤 동화처럼 들려주던 엄청난 태몽 꿈 때문인지는 몰라도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엄마는 나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크게 될 놈이라고 해서 사내아이일 줄 알았는데, 막상 낳고 보니 작은 여자아이라서 꽤 실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키울수록 남다른 기질이 엿보였고, 내심 정말 얘는 뭐라도 되겠다 싶어 기대를 버리지 않았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철두철미하게 엄마를 실망하게 하는 나였다. 그런 나와 달리 오빠는 엘리트 코스를 밟는 엄친아였다.


smile-5128742_1280.jpg ▲ 나는 지금 이 순간 행복을 발견할 줄 아는 삶이야말로 성공한 인생이며 가장 큰 발전이라고 믿는다.


유학까지 보내고 사업 밑천까지 대줬음에도 불구하고 30살이 넘도록 뭐 하나 제대로 이뤄놓은 것 없는 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나를 볼 때마다 엄마의 복장은 터져나갔다.


"이 미친것아.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 너는 지금 행복하다고 말해서는 안 돼. 지금 이 삶에 행복하다고 안주하면 넌 그냥 이 모양 이 꼴로 평생 살아야 하는 거야!"

"엄마. 지금이 아니면 그럼 난 언제 행복하다고 말해야 하는 거야?"


엄마는 현재에 행복감을 느끼면 안주해서 발전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반면, 나는 지금 이 순간 행복을 발견할 줄 아는 삶이야말로 성공한 인생이며 가장 큰 발전이라고 믿었다. 서로 다른 신념 차이로 인해 우린 꽤 오랫동안 이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단련시켰다.


그러다가 몇 해 전부터 엄마는 천식으로 인해 -그러나 그밖에 특별한 이유 없이- 숨을 쉴 수 없었고, 먹고, 말하고, 씻고, 걷는 것조차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수시로 응급실에 실려 가다가 급기야 재작년에는 중환자실에 입원하여 사경을 헤맸다. 그동안 돈도 잘 벌고 사회에서 인정받던 엄마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로 누워있는 신세가 되자, 스스로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 같다며 흐느껴 울었다. 그때, 아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 소리 하지 마. 곁에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것이 가족이야."


그동안 자신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아빠와 나를 못마땅해하던 엄마였다. 그런 부족한 가족의 보살핌 속에서 아주 느린 속도로 육체와 영혼은 건강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휴대전화에 내 이름을 귀한 메리엔젤 (가톨릭 세례명)로 변경했다. 예전에는 당연시하던 것들이 이제는 기적이라는 것을 체험한다면서, 날마다 모든 것이 감사하다고 기도하는 엄마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동안 너는 너를 만들었지.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는 밥을 한 술 크게 또 떠서 드셨다. 그런데 정작 목이 메는 건 나였다. 간신히 입안에 밥알을 집어넣은 채, 빈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향했다. 물을 세차게 틀어 놓은 채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싱크대 안의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그릇들처럼, 가족과 한집에서 살을 맞대고, 부딪히고, 멀어지고, 다시 껴안는 삶을 통해 나는 내가 누구이며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워간다.



자신이 어떤 모양의 그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exclusive-banquet-1812772_1280.jpg ▲ 각자 쓰임새에 맞게 만들어진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그릇들. 만약 다른 그릇이 되려고 형태를 비틀면 깨져서 쓸모없이 버려진다.


나를 나답게, 나를 나로서, 소중히 대하고 품위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무언가를 성취해내고, 다른 누군가가 될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도 각자 쓰임새에 맞게 만들어진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그릇과 같다. 만약 다른 모양의 그릇이 되려고 형태를 비틀면 깨져서 쓸모없이 버려진다.


이처럼 현재 자기 모습을 부정하며, 이상적인 자아상이나 남들과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고 위험하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어야만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갈 때 인간의 영혼은 파괴된다. 타인이 기대하는 삶을 위해 나의 영혼을 파괴하지 말자. 그럴 바엔 차라리 타인을 실망하게 하는 편을 선택하는 것이 낫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 때론 그 간극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 인간을 성장시키기도 하지만 비틀린 신념의 노력은 더 큰 열패감에 시달리게 할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비교와 욕심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끝이 없기 때문이다. 밖에서 보면 그러한 삶이 성공으로 보일지 몰라도 내면에서는 완벽한 실패라는 것을 언젠가는 깨닫게 된다.


지금의 자신이 아닌 끊임없이 다른 형태의 누군가가 되어야만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다고 학습되면, 자신은 물론 타인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이는 자존감에 치명적인 상처를 내고 행복한 삶에 방해가 된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긍정하며 사랑하기 시작할 때, 건강한 자신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때야 비로소 나를 나답게, 너를 너답게, 나를 나로서, 너를 너로서 소중히 대하고 품위 있게 만들어주는 삶의 반석이 다져지고, 쓰임새에 맞게 아름다운 변화도 시작된다고 믿는다. 나는 그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나의 길을 걸으며, 나만의 인생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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