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자기 시간대에서 자기 인생을 살고 있을 뿐

by 이은영
성공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저 우연이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갖는 것은 확실히 다른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개이다.
-마리 레네루


그날의 통화에서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갑자기 사촌 언니의 입에서 "그래서 지금까지 네가 이뤄 놓은 게 뭐야?"라는 말이 맥락 없이 튀어나왔다. 나는 그 순간 웃으며 "집 한 채"라고 대답했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도 그 말이 이명처럼 귓속에서 계속 울려댔다.


유학 시절에 만난 친구와 함께 나의 전공을 살려 바로 온. 오프라인 패션 사업을 27살에 시작했다. 둘 다 처음 해본 사업이었지만 일반과세자로 넘어갈 만큼의 유지력과 행운이 따라주었다. 덕분에 어린 나이에도 사장님들과 골프를 치러 다녔고, 인터넷 신문과 TV에는 패션 쇼핑몰 대표라는 직함과 함께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영화감독이 꿈이었던 남자 친구는 독립 영화까지 제작했고, 나는 여주인공 역을 맡아 연기를 했다. 그것도 부족해서 독립 영화는 설 특집 방송으로 TV 전파까지 탔고, 그런 우리는 직장 생활로 힘들어하던 또래 친구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 당시 나의 삶은 세상이 말하는 성공에 부합하는 인생이었고, 친구들의 말처럼 위로 올라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이란 무엇인가?

head-2713346_1280.jpg ▲ 세상이 말하는 물질적 또는 사회적 위치의 성공이라는 획일화된 기준 하나만으로 서로를 판단하는 잣대는 자기 삶을 살 수 없도록 인간을 옭아맨다.


그러나 29살 그해, 예상치 못한 의료 사고를 겪으며 승승장구하던 사업이 망했고, 결혼을 약속했던 오랜 연인과도 헤어졌다. 시련은 결코 혼자 오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그 모든 실패는 어깨동무하고 나를 찾아왔다.

신은 인간이 감당하지 못할 시련은 절대 주지 않으며,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한쪽 문을 열어둔다고 배웠지만, 그때는 하느님이 나를 다른 사람과 착각했거나 과대평가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을 겪고 극복해 나가던 시기에 알게 된, 동네 성당의 보좌 신부님이 있었다. 우리는 동갑내기로 친구처럼 지냈는데, 올해 3월 그 친구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으며, 코로나 19 때문에 친인척만 모여서 조용히 장례를 치렀다고 했다.


문득, 그 이야기를 듣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흔, 비혼, 백수 그리고 살아있다는 것. 이 넷 중에 무엇이 가장 잘못된 것일까? (친구 신부님과 나의 차이는 고작 하나뿐이다. 아... 이제 두 개구나 ) 각각 따로 살펴보면 그리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은 이 단어들을, 하나로 묶어놓은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에서는 패배자가 된다. 게다가 그런 사람이 이 전의 직업을 버리고 새로운 꿈을 향해 도전한다고 하면,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로 낙인찍어서 정상 궤도 밖으로 던져버린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되면 4차원, 괴짜, 별종, 이단아, 사회 부적응자 같은 꼬리표를 달고 지구별에서 이방인으로 떠돌며 사는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런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가끔 주위 사람들이 나를 앞서가거나 반대로 나보다 뒤처져 있다고 느끼는 순간을 마주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남들이 볼 때는 참으로 뜬금없겠지만, 나는 성경을 펴고 예수 탄생 일대기를 읽는다.

어릴 때는 매일 누가 누구를 만나서 누구를 낳고, 누구는 아이를 낳지 않고, 누구는 결혼했고, 누구는 결혼하지 않았고, 누구는 몇 살에 죽었다는 말이 지루한 족보처럼 읽혔다. 그러나 이제는 내 삶의 태도를 바르게 해 주는 또 하나의 금언이 됐다.



사람은 저마다 생김새가 다르듯 인생 길도 다르다

street-signs.jpg ▲ 나는 나만의 성공 기준을 세워서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는 27세에 대표가 됐지만, 40세에는 백수가 됐다. 반면, 이웃은 27세에 백수였지만, 40세에 대표가 됐다. 나는 여전히 싱글이지만, 이웃은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살다가 이혼하고 재혼까지 해서 또 아이를 낳았다. 나는 29세에 시련을 겪으며 처음 글을 썼고, 40세에는 위대한 작가를 꿈꾸며 계속 글을 쓰고 있지만, 이웃은 92세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하여, 99세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면서 세계 최고령 데뷔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남기고 103세에 별세했다. 나는 여전히 이 땅에 살아서 글을 쓰고 있지만, 이웃은 한국 근대 문학의 획을 긋고 27세에 요절했다.


그렇다면 누가 더 성공한 인생이고 실패한 인생일까? 그 누구도 쉽게 판단하고 단정하며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저 세상에 태어나 자기만의 인생 이야기를 쓰며 살다가 죽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인생을 흘깃거리며 우쭐할 것도, 위축될 것도 없다.

더군다나 세상 기준으로 본다 하더라도 인간의 인생이란 죽기 전까지 어떤 모습으로 흘러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특정 시기만을 가지고 실패와 성공으로 단정 짓는 일도 우스꽝스럽다.


사람은 저마다 생김새가 다르듯 인생 길도 다르다. 타인의 삶의 모습이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손가락질을 한다면 그것은 타인의 문제가 아닌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기만의 별을 따라 자기 길을 묵묵히 걸어가면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추억을 나눌 수 있다면 충분하다.


혹시라도 자기 길 위에서 또다시 넘어지더라도 다음 페이지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일어날 수만 있다면 매우 훌륭한 서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실패의 두려움이 주는 가장 큰 위협은 언제나 다음으로 연결되는 자신을 잃게 한다는데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 시간대에서 자기 인생을 살고 있을 뿐


나는 지금까지 내가 원하는 삶을 꿈꾸며 이루기 위해 노력해 왔다. 도전했고, 넘어졌고, 좌절했고, 희망하며, 다시 일어나서 걸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런 내 삶의 태도에 스스로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므로 백수, 비혼, 마흔의 삶을 사는 오늘의 나에게,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지금까지 네가 원하는 삶을 산 대가로 이뤄놓은 게 뭐가 있냐며 몰아붙인다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 말이 우리 같이 자기 길을 걷는 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안타까운 것이라기보다,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인정하지 못하는 세상의 현실이 안타까운 것이다. 물질적 또는 사회적 위치의 성공이라는 획일화된 기준 하나만으로 서로를 판단하는 세상의 잣대는 자기 삶을 살 수 없도록 인간을 옭아맨다. 두려움은 인생에서 무엇이 진짜 패배이고 성공인지 지혜의 눈을 가려버린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을 보면, 할아버지가 늘 도전하고 실패하는 어린 손녀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 "패배자가 뭔지 아니? 진짜 패배자는 지는 게 두려워서 도전조차 안 하는 사람이야. 넌 노력하잖아. 그렇지? 그럼 넌 패배자가 아니야."


그러므로 누군가가 "네가 원하는 삶을 산 대가로, 지금까지 이뤄 놓은 게 뭐냐?"며 말을 건네 온다면 이렇게 대답해 줄 것이다.

“나는 나만의 성공 기준을 세워서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나로서 사랑도 받고 미움도 받고 있다. 그 결과 세상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을 견고한 내면의 힘이 조금 더 생겼다.”라고 말이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누군가와 비교해서 뒤처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앞서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인생을 살다가 죽어간 옛 선조들처럼 우리 모두 자기 시간대에서 자기 인생을 살고 있을 뿐이다.

항상 기억하자. 당신은 지금 있는 그대로, 자기만의 삶의 이야기를 쓰며 충분히 잘 살고 있다는 진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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