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고 있는 어떤 재주든 사용하라. 노래를 가장 잘하는 새들만 지저귀면 숲은 너무도 적막할 것이다.
-헨리 반 다이크
친구들의 늘어나는 에피소드와 함께 일취월장하는 일본어 실력에 감탄하며, 뒤늦게 유학생 구직 게시판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흔히 이자카야나 라멘집에서 아르바이트를 많이 하길래, 나도 근처 라멘집에 연락해서 면접을 보기로 했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에서 나올듯한 주인아저씨가 "이랏샤이마셍~"을 외치며 서 있었다. 면접을 보러 왔다고 하니 잠시 이것저것 물어보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앞으로의 대화는 일본어로 읽어주었으면 한다)
"이곳은 무거운 그릇을 많이 날라야 하는데 너무 말랐데스. 이런 일 해본 적 있어데스까? 공주처럼 생겨서 왠지 내가 뭐 좀 시키면, 전 그런 거 무겁고 힘들어서 못 해요. 사장님이 대신해주세요. 라며 앉아있을 것 같아데스."
주인아저씨는 마디마다 굴곡진 두꺼운 손가락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두 눈을 깜빡이며 새침한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바라봤다. 일본어가 서툰 나는 내가 느낀 불쾌한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난감했다. 무엇보다 내 욕하는 건 귀신같이 알아듣는 상황이 슬펐다.
‘겉모습만 보고 저렇게 무례하게 행동하다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렇지 않다고, 나는 힘이 세다고, 잘할 수 있다고, 어설프게 일본어로 말하며 내 팔을 들어 알통을 자랑하는 포즈를 취했다. 아... 괜히 했다. 하얗고 얇은 내 팔만 더욱더 부각됐다. 주인아저씨는 피식 웃더니 마뜩잖은 표정을 지으며 교통비가 담긴 봉투를 내미셨다.
일본은 아무리 작은 가게라도 면접을 보러 가면 교통비를 지급하는 것이 관례다. 서로가 귀한 시간을 내서 신중하게 면접을 보고, 우리나라의 대기업처럼 면접 비용을 준다. 교통비 지급으로 인해 주인아저씨에 대한 나쁜 기억이 조금 상쇄됐다. 하... 어느덧 자본주의의 노예가 된 것인가.
봉투에 담긴 금액은 2천 엔 정도였던 거로 기억한다. 당시 우리나라 돈으로 약 2~3만 원 정도에 해당하는 적지 않은 액수였다.
물론 연락은 오지 않았다. 라멘 공주가 될 기회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주말에 새로운 일자리를 찾다가, 방금 올라온 급구! 미용실 스텝 글이 눈에 띄었다. 기재돼 있는 핸드폰 번호로 빛보다 빠르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바로 만날 수 있냐는 사장님의 말과 동시에 자전거를 타고 우에노에서 상봉했다.
사장님은 한국 여자분이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이산가족을 만난 듯 활짝 웃으셨다. (앞으로의 대화는 한국어로 읽어주었으면 한다)
"어머! 너무 예쁘게 생겼다. 미용실 오는 손님들이 진짜 좋아하겠네. 호호호. 오늘부터 가능할까요?"
"아. 정말요?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급하게 바로 나오느라 이력서를 안 써왔어요."
"네. 필요 없어요. 지금 예약 손님은 많은데 일손이 너무 달려서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에요. 그럼 지금 바로 우리 미용실 가서 일해요."
처음 본 사장님은 기분이 아주 좋은 듯 콧노래까지 불렀다. 그런 사장님을 따라 2층에 위치한 작은 미용실로 들어갔다.
그날부터 나는 눈치껏 열심히 바닥으로 잘려 나간 머리카락을 쓸었고, 주인 없는 머리카락에 엉겨 붙은 실핀을 모두 분리해서 세척했다. (남이 사용한 실핀은 쓸어서 쓰레기통에 버린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첫날은 그렇게 끝났다. 내 기억으로는 둘째 날도, 셋째 날도, 별 탈 없이 지나간 것 같다. 어쩌면 그건 나 혼자만의 착각일 뿐 사장님은 나를 지켜보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지켜보고 계셨다. 사장님의 첫 주문이 떨어졌다.
"은영 씨, 고객님 파마할 거니까 구루뽀 좀 말아줘요."
"사장님, 저 파마는 한 번도 안 해봤는데요."
"흠. 그럼 고데기는 말 줄 알죠?"
"네! 그건 잘해요."
나는 평소대로 -집에서 외출할 때 내 머리를 만지듯- 뜨겁게 달궈진 고대기를 고객의 머리에 대고 말기 시작했다.
"여기 왼쪽 오른쪽이 짝짝이인 것 같은데요?"
고객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게 말했다. 그 즉시 나는 다른 스텝과 교체됐다.
"은영 씨. 고객님 헤어컷 하게 샴푸 해주세요."
"네! 이쪽으로 오세요."
자신의 머리통을 내게 맡긴 고객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샴푸 언제 끝나요?"
그렇다. 나는 고객의 하나밖에 없는 작고 소중한 머리통을 상대로 난생처음 샴푸질을 해본 것이다. 그것도 무려 수십 분 동안이나!
마무리를 위해 고객이 일어섰을 때는 긴 머리카락과 함께 등 뒤로 물이 흘러 옷이 젖어있었다. 어쩌면 고객의 땀이었는지도 모른다. 다행히 단골손님은 사장님과 친한 한국 분으로 유쾌하게 웃어넘겼다. 나는 사장님의 호출을 받았다.
그녀는 테라스 난간에 팔꿈치를 기댄 채 담배를 한 모금 길게 들이 삼키더니 한숨과 함께 다시 내뿜었다. 담배 연기는 바람결을 따라 공중에서 흩어졌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상황에서 나는 내 존재를 알렸다.
"사장님, 부르셨다고 하셔서요." 그녀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힐끗 바라보더니 다시 원위치로 고개를 돌려 담배를 물었다. 나는 사장님이 담배를 다 피울 동안 멀고 가까운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눈부신 여름이었다. 이윽고 사장님은 입을 열었다.
"은영 씨, 정체가 뭐예요?"
"네? 제 정체요?"
"미용 기술을 배웠냐고 묻고 있는 거예요."
"학교에서 교양수업으로 배웠어요."
"전공이 뭔데요?"
"의상 디자인이요."
"그럼 교양 수업으로 배운 건 뭐예요?"
"교양과목에서 패션과 어울리는 헤어스타일 알려주는 수업이 있었는데요~ 그때 잠깐 배웠어요."
"그럼 헤어 기술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는 거네요."
"네. 저는 미용실 스텝이라고 해서 그냥 보조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런 전문 기술을 알아야 하는 건지 모르고 지원했는데, 그만두라고 하시면 그만둘게요. 불편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사장님은 그렇게 말하는 나에게서 고개를 돌려, 조금 전 내가 바라본 풍경을 응시하는 것 같았다. 곧이어 길고 가늘게 뜬 두 눈이 여름날의 태양처럼 커지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니요. 그냥 계속 일해요. 간단한 기술은 내가 알려줄게요. 대신에 급여는 당연히 깎일 거예요. 그래도 할래요?"
"얼마나 깎이는데요?"
"전문가랑 동등하게 줄 수는 없어요. 처음에 약속한 금액에서 80%"
"좋아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무슨 부탁이요?"
"제가 일부러 사장님을 속이고 들어온 것이 아니니 첫 월급은 공지한 대로 주시고, 다음 달부터는 오늘 말씀하신 금액으로 주셨으면 합니다."
"참나. 까짓것 그래요. 처음부터 확인하지 못한 내 잘못도 있으니."
사실 사장님이 제안한 액수가 80%였는지 8%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어쨌든 금액은 전보다 많이 깎였는데, 그래도 라멘 공주보다는 높은 금액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만둘 때쯤 사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은영 씨는 사랑 많이 받고 자란 티가 나. 특유의 밝은 에너지 덕분에 함께 일하는 동안 행복했어~ 농담이 아니라 나중에 결혼하면 꼭 연락해. 내가 축의금 진짜 많이 낼게.”
화끈한 성격의 사장님 덕분에 행복하고 감사한 건 오히려 나였는데,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얼마나 낼지 궁금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결혼하지 않은 탓에 축의금액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 퍽 아쉽다. (웃음)
언젠가 '진짜 사나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군대 교관이 요리사 선발을 위해 이렇게 질문했다.
"군대에 들어오기 전, 사회에서 요리를 해본 사람 있습니까?" 그때 외국인이 자신 있게 손들었다.
"좋습니다. 어디서 해봤습니까?"
"지베숴 해바씁미다."
모두에게 웃음을 선사한 외국인의 모습에서 과거의 나를 보았다. 국적 불문하고 무식하면 용감하다. 그러나 무식에서 나오는 용기와 무모한 도전 정신은 인생에 뜻밖의 선물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살다 보니 무슨 일이든 그런 것 같다. 연애든 결혼이든 이직이든 사업이든 이별이든, 그 분야에 관해 너무 자세히 알게 되면 시작할 엄두를 못 낸다.
어쩌면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무지함과 삶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리석음 덕분에, 오늘도 또다시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품게 되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모시모시." (여기서부터의 대화는 일본어로 읽어주었으면 한다)
"아~안녕하세요. 얼마 전에 면접 봤던 라멘집 사장데스. 혹시 아직 일자리 못 구했으면 지금이라도 같이 일했으면 해서데스."
뜻밖이었다. 인류애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사장님~ 잘 지내시죠? 이렇게 전화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런데 저 다른 일자리를 얻었어요."
"아. 그렇군요. 축하해요! 혹시 어디에서 일하는지 물어봐도 데스까?"
"미용실데스요~!"
나는 전화를 끊고 난 후, 하얗고 가느다란 열 손가락을 펼친 채 가위손 춤을 신나게 추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