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요즘 빠진 세계관
"은영아. 골프가 원래 이렇게 어렵고 힘든 운동이었어?"
요즘 내가 주변 골프 초보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나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가 집단 최면에 걸린 듯 똑같은 말을 이어간다.
"잘 치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힘을 빼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네."
골프를 잘 치고 싶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잘 치고 싶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어깨에 힘을 빼야 한다. 골프를 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맑은 하늘 아래 푸르른 잔디를 설렁설렁 밟다가 작은 공을 툭 쳐서 홀에 넣으면 되는, 비교적 간단한 행위에 비해 돈 많이 드는 사치 운동인 줄만 알았던 골프를 직접 체험하면 알게 된다, 골프가 얼마나 강도 높은 체력과 인내력을 요구하는지. 어디 이뿐인가. 지겨우리만치 꾸준한 노력과 자기 관리는 물론, 코스 전략 및 도전 정신 등 창의력과 강한 정신력까지 필수 장착해야 하는 운동이라는 점도 깨닫는다.
다양한 운동을 섭렵하다 보면 결국 골프가 최종 목적지가 된다는 말은 골퍼들 사이에서는 진리로 통한다. 최근 골프 프로에 도전했던 '코리안 특급' 박찬호(48) 선수도 "다시 태어나도 유명한 야구 선수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자 "골프나 유도 같은 개인적인 종목을 해보고 싶다"라고 대답할 만큼 골프는 매력적인 운동이다.
꾸준히 연습하면 대체로 퇴보 없이 성장하는 타 운동과 달리 골프는 그렇지 않다. 한겨울에 드라이빙 레인지(골프연습장)에서 온몸에 땀이 흐를 만큼 연습한다 해도 다음 해 스코어가 보장되지는 않는다.
싱글 플레이어(골프에서, 핸디캡이 한 자리 수인 선수를 이르는 말)라고 자신했던 골퍼도 언제든 속칭 '백순이, 백돌이'(100타를 오가는 사람)가 되어 채를 꺾든지 다시 겸손해지든지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골프다. 골프 여제 박세리(44) 선수조차도 어느 날 스윙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슬럼프에 빠진 적이 있었다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오죽하면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도 자서전을 통해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것들' 중 하나로 자식, 미원과 함께 '골프'를 뽑았을까.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아들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도 아버지의 추천으로 골프를 시작했는데, 당시 이병철 창업주는 일본 유학길에 오르는 아들에게 "골프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배우게 된다"라고 설명했단다. 이건희 회장 역시 아들 이재용에게 "골프는 집중력과 평상심을 키워준다"라고 조언했다. 그렇게 삼성가는 3대에 걸쳐 골프 사랑을 이어오고 있다.
매 홀 드라이버 샷을 날리는 순간에는 모두가 무대 위에서 자신만의 샷을 날려야 한다. 이때 스윙 자세가 좋지 못하면 제아무리 싱글 플레이어라고 해도 동반자들의 감탄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한다.
누구도 예외 없이 어느 정도 스코어 방어를 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면 그때부터는 스윙 자세로 진짜 실력이 판단된다. 동반자들의 눈이 즐거워지는 폼생폼사(form生form死)의 이유도 있겠지만, 결국 바르고 좋은 자세가 오래도록 멋지고 좋은 샷을 날릴 수 있는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로 선수들도 스윙 자세가 좋지 못하면 뼈를 깎는 고통을 통해서라도 자세를 교정한다.
필드에 나가면 우스꽝스러운 스윙 자세로 치는 분들을 보게 된다. 스윙 자세는 습관과 같아 한번 굳혀지면 교정하기 힘들기 때문에 처음에는 돈이 들더라도 무조건 프로에게 배워서 기초를 잘 다져놓는 것이 좋다.
구력이 쌓이면 쌓이는 대로 이상한 습관이 또 생겨서 자세도 망가지기 마련인데 꾸준히 교정을 받는 편이 바람직하다. 역시 인생도 골프도 탄탄한 기본기와 좋은 태도를 유지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나는 골프를 치던 엄마의 권유로 20대 때 처음 골프를 배웠다. 비즈니스를 잘하려면 골프를 배워야 한다면서 엄마는 골프 회원권까지 선물해 주셨다. 요즘이야 MZ 세대도 즐기는 흔한 운동이 골프라고 하지만 그 시절만 해도 취미 골프를 치는 또래를 만나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엄마 손을 잡고 골프장에 가면 대부분 부모님 세대의 어르신이었다. 내가 라운딩 중 스코어에 신경 쓰면, 프로님은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치는 일에만 신경 쓰라고 조언했다.
훌륭한 조언 덕분에 구력은 저절로 쌓여갔지만, 실력은 만년 백순이에 머물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땐 잘 쳐야 할 이유나 목표 설정이 없으니 실력이 늘지 않았다. 재미가 없어지니 결국 연습도 안 하게 됐다. 무엇보다 골프를 통해 인생의 통찰력을 배울 수 있는 역량이 내겐 부족했던 것이다.
20대를 지나 30대가 됐을 때, SNS 발달과 함께 2030 골프 동호회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동호회라는 곳에 가입했고, 운영진까지 맡으면서 업체로부터 값비싼 골프 용품까지 협찬받았다. 또래들과 같이 운동하고 놀면서 협찬까지 받으니 마치 셀럽이 된 듯한 기분과 함께 어찌나 신나던지.
하지만 그러한 재미도 잠깐, 무분별하게 받는 협찬 제품들이 내가 정말 필요로 하는 물건인가? 이러한 삶의 모습이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인가? 자문하는 순간이 왔다. 그러자 이내 나의 관심사는 다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그러다가 코로나 팬데믹이 터졌고 '집콕'하며 작가 모드로만 살게 됐다. 처음에는 이 순간이 천국인가 싶었지만, 이내 갑갑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인생은 돌고 도는 회전목마와 같고, 유행은 돌고 도는 법이니 예전에 입던 옷을 함부로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사실이다. 2020년 말쯤, 나는 다시 먼지 쌓인 골프 클럽을 꺼내어 첫 스승인 KLPGA 프로님에게 연락했다. 그리하여 구력 15년 차인 지금도 1:1 개인 레슨을 받고 있다.
내가 골프의 매력에 빠진 가장 큰 이유는 골프는 인생과 참 많이 닮았다는 깨달음을 얻으면서부터다. 경쟁 상대가 지금 함께하는 동반자가 아닌 과거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골퍼는 모든 면에서 성장한다.
동반자를 경쟁자로 여기는 순간, 상대방보다 잘 쳐야 한다는 부담감이 강해져서 실수가 잦아진다. 하지만 상대방으로부터 배우며 즐기자는 마음을 먹으면 스코어가 좋아진다. 전자는 동반자의 미스샷에 안심하며 미소를 짓지만, 후자는 동반자의 나이스 샷에 진심으로 손뼉을 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좋은 동반자가 되면 함께 하는 과정이 즐겁지만, 내가 불편한 동반자가 되면 매 순간 멘붕이 찾아온다. 인생은 어떤 성품의 내가 돼서 사는지가 중요하듯, 골프도 어떤 성품의 내가 돼서 하느냐가 첫 번째 기본기다.
함께 어울리는 동반자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 잘할 수 있다고 응원해 주는 긍정적인 생각과 실수도 감싸주는 넓은 마음. 함께 라이(Lie)도 봐주고 자세도 봐주며 진심으로 조언해 줄 수 있는 예쁜 마음의 동반자들과 함께할 때 느리지만 나는 성장했다.
이처럼 인생도 골프도 좋은 동반자를 찾아 함께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다면 오늘의 나는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동반자인가? 끊임없이 자문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라운딩 중 전 홀에서 미스샷을 날렸다고 기죽어 있어서는 안 된다. 18홀 전체가 새로운 코스로써 한 타 한 타 만회할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골프를 정신력 게임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만약에 그날 스코어를 망쳤다고 하더라도 좌절할 필요가 없다. 모든 골퍼가 느끼는 공통점은 집에 갈 때쯤에서야 몸이 풀려서, 제대로 실력 발휘할 수 있는 다음 라운딩을 또 기약하기 때문이다. (웃음)
이 글은 오마이뉴스 2021년 6월 19일 <골프에서 중요한 건 그날의 스코어가 아닙니다> 로 '오늘의 기사 제안 시리즈 63화' 특집에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 전체 탑보드 메인과 가장 많이 본 기사 2위, 추천 많은 기사 2위, 다음, 네이버 뉴스 스탠드 탑, 주요 기사 PICK으로 선정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