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서 나로 가는 다섯 번째 숨
아이들을 재우고 집안 정리를 끝내고 나면 큰 아이 세 살쯤 사 두었던 공부상 앞에 앉았다.
'가 가방, 나 나비, 다 다리미, 라 라디오....'
지금 내가 요가로 치자면 딱 이 공부상 수준이었다.
집에 있던 관련 서적들을 모두 갖고 와 쌓아 두었다. 오랫동안 켜지 않았던 노트북을 켜고 종이와 펜도 챙겼다.
조각조각이나마 갖고 있던 필기 흔적이라든지 유인물 같은 것도 모두 끌고 왔다. 더 많은 것이 필요했다.
그날부터 처음 몸 쓰는 법을 배울 때처럼 공부를 시작했다.
마음은 불안했지만 처음에 비하면 이번엔 무척이나 수월한 조건이었다. 인터넷만 연결되면 미디어와 정보는 차고 넘쳤고 무엇보다 나는 두 번째니까.
몸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꺼내 오기만 하면 되겠지 싶었다.
그래, 두 번째니까. 그러니까 할 수 있어.
첫 아이는 진통을 오래 했다.
하룻밤을 꼬박 진통의 간격이 규칙적인 5분이 될 때까지 견뎠다. 진통이 오면 배를 움켜쥐었다가 사그라지면 잠들기를 밤새 반복했다. 비몽사몽으로 기다리던 5분 간격이 되고서야 병원에 갔지만 거기서 출산까지 또 다섯 시간을 참아내야 했다.
그나마도 초산 치고는 빠른 진행이었다.
간호사의 요구대로 힘을 주라면 주고 빼라면 빼고 처음이라 어리바리 시키는 대로 했다. 남편과 함께 힘주는 연습에 어찌나 열심이었는지 그때는 진지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그날은 일요일이라 마취과가 없어 무통 주사도 맞지 못했는데 희한한 건 막상 아이가 나올 때는 아프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모르는 게 약이라고. 처음 겪는 일이니 모든 게 열심이었다.
둘째 아이 낳던 날은 새벽 두 시, 첫 진통부터 5분 간격이었다.
진통이 오는 순간 '아, 곧 나오겠구나' 하고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몸의 기억이란 이런 것이었다.
첫 아이 봐줄 사람이 남편뿐이라 분만실에는 혼자 들어갔다. 두 번째 다운 여유로 무통주사도 신청했다. 주사를 맞기 위해서는 만삭의 배를 앞에 두고 두 무릎을 가슴 앞까지 당겨 끌어안아 억지로 새우등을 만들어야 했다. 생각보다 힘든 자세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듣던 대로 무통 주사는 천국이었다.
진통이 둔해지자 슬쩍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떠 보니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배에 힘을 꽉 주기 시작했다. 분만실에 혼자 누워있는 와중에도 밖에서 기다릴 남편과 아이 걱정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첫 아이 낳을 때 남편과 연습했던 대로 여러 번 힘을 주었다.
'자, 자기야! 고개 들고!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하던 남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피식 웃었다.
잠시 후 무통 주사의 기운이 풀리고 엄청난 진통이 몰려왔다.
아. 진통이 이런 것이었나? 새삼스러웠다.
분만실 간호사에게 아파서 못 낳겠어요, 힘 못 주겠어요. 도리질을 했다.
그래도 아이는 다섯 시쯤 태어났다.
겨우 세 시간 만이었다.
첫 번째는 그랬다.
열정이 있었고 어렸다. 아픔도 몰랐고 두려움도 없었다.
두 번째는 빨랐다. 익숙하고 수월했지만 아팠다.
그리고 성숙했다.
수업을 시작하고 틈만 나면 중얼중얼했다.
강사로 서기 위해서는 동작도 중요했지만 유연한 말솜씨가 필수 요건이었기에 집에서도, 차에서도, 길을 걸으면서도 중얼거렸다. 미디어와 책, 예전의 흔적들을 찾아 수업을 짰다.
종이에 동작을 그려보고 동영상을 찍어 움직임을 관찰했다.
흐름이 막히는 곳은 없는지, 좀 더 잘 흘러가는 쪽으로 바꿀 수 없는지 수차례 고민했다.
일주일에 세 번 수업을 위해서 7일, 168시간 중 100시간 이상 할애했다. 잠도 네 시간씩 밖에 자지 않았다.
예민해져 있는 내게 남편은 ‘그냥 유튜브 보고 대충 해, 여보.’ 하고 말했다. 걱정해서 한 말 인 줄은 알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만의 수업, 잘할 수 있는 혹은 하고 싶은 수업이 필요했다.
어렵게 주어진 귀한 시간에 남의 흉내만 내고 올 수는 없었다.
그렇게 매일, 치열한 노력으로 차츰 내 것을 만들어 갔다.
역시나 두 번째라 생각보다 훨씬 빠른 성과가 보였고 수업은 더욱 신이 났다.
"자기야, 남의 흉내만 내다 올 순 없잖아,
잊었어? 나, 무용과 나온 여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