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서 나로 가는 여섯 번째 숨
프로의 세계는 낯설었다.
삐거덕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일주일 세 번의 수업을 겨우 이어 가고 있는 내게 공백기 없이 강사 생활을 해 온 지인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학부 때와 다름없는 몸과 그때 보다 더 능숙해진 움직임들, 그들이 지키고 있는 자리까지.
남편의 직장은 전출이 잦았다.
길면 5년 까지가 한 근무지에서 보낼 수 있는 가장 긴 시간 이었기에 늘 방랑자 같은 생활을 했다.
근무 형태도 당직이 많아 첫째는 거의 혼자 키우다시피 했다. 물론 근무가 없는 날은 남편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만 먼 타지에서 혼자 아이를 돌보는 날이 많다는 건 외로운 일 이었다.
밤 잠 하나는 잘 잤던 첫째는 컴컴한 새벽 다섯 시만 되면 칼 같이 일어났다.
저녁 여덟시 취침, 새벽 다섯 시 기상으로 입력 된 패턴은 일 년을 넘게 이어졌다.
어떤 날은 어른의 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본래 살갑지 못한데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사택은 사람의 기척이 거의 없었다. 일부러 찾아오지 않으면 건물이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 갈 정도로 외진 곳. 그 곳에서 여러 날을 아이와 나 둘 뿐 이었다.
결국 나는 외로움에, 처음 하는 육아에 지쳐 다른 곳으로 가자고 남편을 졸랐고 다음 발령에 우리는 이사를 했다.
다행히 다음 근무지는 사정이 좋았다. 아파트 단지가 모여 있는 작은 신도시.
걸어서 마트를 갈 수도 있었고 집 앞 공원은 주말마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기 저기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니 한결 살만 했다. 그 곳에서 둘째가 태어났고 나와 함께 덩달아 피곤해진 첫째도 다섯 시 기상을 멈추었다.
‘독박 육아.’
아이가 둘이 되고 나니 어느새 나는 독박 육아의 달인이 되었다. 하나는 등에 업고 하나는 유모차에 태워 가지 못 하는 곳이 없었다. 달라진 몸, 둔한 움직임, 오직 엄마라는 자리.
눈앞의 아이들을 쫓느라 내 안의 소리에는 점차 귀가 멀게 되었다.
다음 전출을 앞두고 우리는 서울 행을 택했다.
서울에 가다니! 결혼 하고 8년 만이었다.
드디어 방랑자 생활의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신난 마음에 서둘러 이사를 했다.
어차피 또 이사 갈 텐데 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일상의 농도는 짙어졌다.
급한 일이 있으면 부모님께 아이들을 부탁 할 수 있으니 육아의 무게는 가벼워졌다.
손만 뻗으면 도와줄 누군가 있고,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친구가 가까이 있다는 것은 다신 잃고 싶지 않을 정도로 든든하고 안정 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리고 수많은 일자리에, 내가 비집고 들어갈 곳까지 있었으니 신이 날 수밖에!
길었던 독박육아,
힘들었던 지난 시간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지금이라도 더 많이 배우고, 일 하고 싶은 생각에 마음이 불편한 날, 나와는 다른 길을 걸어온 그들이 부러워지는 날, 이렇게 스스로를 타일러 본다.
모두의 시간이 같을 수 없다고.
누구의 시간이 더 치열 했는지 따져 보는 것도 무의미 하지 않느냐고.
그동안 이뤄낸 사랑하는 아이들이 곁에 있기에 지금의 삶이 더욱 의미 있는 것이라고.
잠든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본다.
오늘도
너희를 보며,
나를 다독이며,
이 순간을 사랑하며..
엄마는 keep going, 멈추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