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는 아니겠지.
그렇게 나의 멕시코 살이가 시작되고 난 후, 나는 평일에는 회사 생활에 적응하고 주말에는 멕시코 곳곳을 탐방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인턴이었기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아주 넉넉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워낙 물가가 쌌기 때문에 생활비를 쓰고도 어느 정도의 여윳돈이 생겼고, 그 돈으로 주말마다 여기저기 쏘다닐 수 있었다.
처음에는 지리도 낯선 데다가 자칫하면 나도 모르는 새에 위험한 지역에 발을 딛고 있을 수 있기에 주로 회사 동료와 함께 놀러 다녔고 우리가 처음으로 택한 관광지는 '떼오띠우아깐'이라는 피라미드였다.
피라미드는 멕시코를 여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필수 관광 명소이다.
워낙에 피라미드가 멕시코 전 지역에 걸쳐 있다 보니 나중에는 유럽 여행 중 마주치는 성당만큼이나 뻔한 것이 되어 버렸지만, 처음으로 피라미드를 구경 가는 것은 나에게 충분히 설레는 일이었고 덤으로 멕시코 문화를 제대로 탐방하고 있다는 뿌듯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
이전에 10만 명의 사람이 살았다고 추정될 만큼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떼오띠우아깐은 멕시코 시티에서 버스로 약 2시간 정도 가야 하는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피라미드가 있는 터는 그늘이 없기 때문에 해가 솟아오르는 낮이 되기 전에 갔다 와야 한다는 사람들의 말에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였다.
떼오띠우아깐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위키피디아를 참고하시길.
(링크: https://en.wikipedia.org/wiki/Teotihuacan)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지하철 역까지 가서 지하철로 환승을 해가며 어찌어찌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고
피라미드에 가는 시외버스 티켓을 끊었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하기까지의 긴장을 내려놓을 틈도 없이 탑승한 시외버스 안에서는 혹시 길에서 무장 강도를 만나는 것은 아닌지, 갑자기 내가 타고 있는 버스에 들이닥쳐 총을 들이미는 것은 아닌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내 걱정과는 달리 버스는 아주 안전하게 우리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었다.
피라미드에 도착하니 내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이제는 폐허가 되어 버렸지만 넓디넓은 터에 거대한 피라미드, 그리고 두 피라미드를 잇는 길과 그 양 옆으로 세워진 건축물들은 찬란했던 그들의 고대 도시를 상상해 보기에 충분했다.
나는 피라미드에 오기까지의 긴장감은 씻은 듯 잊고 피라미드 위에서, 아래서, 온갖 포즈를 취해가며 회사 동료와 사진을 서로 찍어주며 놀기 바빴다.
이왕 온 김에 해볼 건 다 해봐야 한다며, 높은 피라미드도 두 개 다 기어코 올라가 보고 옆에 있는 박물관까지 돌아보고 체력이 바닥난 뒤에나 우리는 이 명소를 뒤로 하고 귀가를 결심할 수 있었다.
강도 높은 관광에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중 귀여운 남자아이가 쭈뼛쭈뼛 우리에게 다가왔다.
사진을 찍어달라기에 흔쾌히 알겠다고 답하고 카메라를 달라는 손짓을 해 보였더니 같이 찍고 싶단다.
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같이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부탁하는 건 난생처음 있는 일이라 다소 당황했지만, 수줍게 웃는 소년의 천진한 표정이 너무 예뻐서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도 그 순간을 간직하고 싶어서 내 핸드폰으로도 사진을 한 장 남기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한참 걷고 있는데 이번에는 10대 소녀들이 우리와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단다.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경험을 연달아하니 괜히 유명 인사가 된 듯한 느낌에 기분이 좋아져 그 친구들과도 기분 좋게 사진을 한 장 남겼다.
(함께 찍은 사진은 모두의 초상권 보호를 위해 생략..)
멕시코에서는 많은 한국인들이 함께 사진을 찍자는 요청을 받고는 한다.
동양인이 많은 멕시코 시티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외국인이 드문 소도시로 여행을 가면 너도나도 같이 사진을 찍고 싶다며 다가오고는 한다.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한국인이랑 사진 찍는 게 유행인 건지, 아니면 다른 외국인들에게도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주변 한국인치고 처음 보는 멕시코 사람과 사진을 안 찍어본 사람이 오히려 없을 정도였다.
사실 이전에 동양인이 드문 곳을 여행할 때를 떠올려봐도 내가 지나가면 다들 신기해서 빤히 쳐다보기는 했지만, 다가와서 기념 촬영(?)을 요청하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말이 통할지 안 통할지도 모르는 처음 보는 상대에게 다가가서 다짜고짜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하는 게 누군가에게는 실례가 되는 일일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포인트는 어떻게 보면 조금 무례할지도 모를 이런 요청을 하는 그들의 태도에 있다.
수줍게 다가오는 그들의 맑은 표정을 보면 아무리 귀찮아도 요청을 거절하기가 어렵고, 그 표정은 '나'라는 인간이 단순히 신기해서라기 보다는 '나'에 대한 인간적인 관심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멕시코에 살았었던 지인들 모두가 멕시코의 매력 중 하나로 '사람'을 꼽는 것을 보면 타인에 대한 이들의 관심은 기분 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나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다.
외국에서 살 때 그 나라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타지 생활의 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그런 면에서 멕시코는 분명 장점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이들의 관심 덕분에 멕시코에서는 길을 걷다가, 자전거를 타다가, 혹은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다른 사람과 자연스럽게 즐거운 대화를 나누게 되는 일이 매우 흔하게 일어났었고, 혼자서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그들은 불편해하기는 커녕 흔쾌히 도와주려 했었다.
물론 멕시코 사람들의 관심이 늘 달가웠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애정 어린 관심은 낯선 땅에서 내 마음 한편을 포근하게 해주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