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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신 Nov 21. 2021

저는 여전히 에토스를 믿습니다만.

건강한 브랜드를 일궈 나아가는 포인트



논리적인 사고와 행동을 애정하는 나는 우습게도 에토스 ethos 를 맹신하는 편이다. 이 추상적인 가치가 오랫동안 마음을 간지럽혔던 답답함을 속시원하게 긁어줬기 때문이다. 그덕에 에토스와 함께 로고스 logos 와 파토스 pathos 까지 정리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갖게 되기도 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근대과학에 대한 해석 덕에 인간은 완벽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설득의 3요소로 잘 알려진 이 3가지 개념은 최근(?)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김영하 작가님이 손쉽게 설명해준 바 있다. 만약 이 부분에 대한 추가적인 이해가 필요한 분들은 아래 영상을 보고와도 좋을 것같다.




https://youtu.be/MmLMf_0xydc



오늘 에토스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INTERLUDE, 에토스를 이야기하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진심을 말하는 사람 - Internal branding의 시작




후텁지근한 열대야, 집을 앞에 두고 사업을 하는 친구와 아파트 입구에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의 주제는 ‘설득’에 대하여.

사업을 하는 친구의 고민은 늘 심플하다. 장사를 하고, 가게를 운영하는 물리적인 일은 어렵지 않지만, ‘사람’과 엮이는 일은 뜻대로 하기 정말 어렵다고. 구성원들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못하고, 자꾸 감정적인 충돌이 잦아진다는 것이 큰 이유였다. 친구는 속시원한 답변보다는 위로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얘기만큼은 어김없이 직업병을 앞세웠다.


“그건 너네가 진심이 아니라서 그래.”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님을 앞에 두고 진심을 논하는 것이 무례한 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사업체가 탄생하기까지의 전후맥락을 알고 있는 나로썬 경험에서 비롯된 나름의 소신을 곁들인 단단한 한마디였다. 사실 나는 그들에게 진심을 느끼지 못했다. 애당초 현재 다루고 있는 사업 아이템을 ‘돈’을 벌기 위한 컨텐츠로만 고려했기 때문이다. 설사 수익을 위한 매개로 활용하더라도 시장과 소비자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전무했다. 브랜드를 운영하겠다는 이들이 브랜드에 대한 개인적인 정의와 사명없이 경제적 수단으로만 브랜드를 운영하려 하다니. 용인해주기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개인적으론 시장과 소비자는 부차적인 문제라 생각한다. 첫 번째로 브랜드가 성공적인 길로 접어들기 위해 고려해야하는 건 단연 내부적인 결속과 환경 조성이다. 이를 두고 많은 전문가들은 내부 브랜딩 Internal branding이라 일컫는다. 다수의 브랜드가 겪는 험난한 시련 중 가장 초기에 드러나는 증상은 단연 내부 구성원 간의 충돌이다. 결속이 되지 않는 것. 이에는 많은 이유들이 존재하지만 그 중 가장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례는 오너 혹은 디렉터가 진심이 아닐 때다. 이것이 근원적인 문제다. 여기서 말하는 '진심이 아니다.'라는 의미는 다루는 아이템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와 고찰, 그리고 제 나름의 철학을 갖지 않는 게으름에 있다. 그저 유행이니, 트렌드니깐 편승해서 수익을 창출하려는 얄팍한 생각이나 3자를 고려하지 않는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적인 시각으로 브랜드를 운영할 때 이런 불상사가 흔히 일어난다. 진심인 오너들은 아이템, 시장, 소비자 그리고 구성원에 대해 심도있게 고찰한다. 오너들이 진심을 보일 때 내부 구성원들은 브랜드의 방향성을 읽고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그게 내부 결속의 시작이자 환경 조성의 토대이다. 내부 브랜딩은 무조건 오너의 자세에 따라 생사가 구분된다. 내부 브랜딩없이 시장에 뛰어드는 건 신발끈을 제대로 묶지 않고 마라톤 경주에 나서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본인이 진심이 아닌데 구성원들은 진심이길 바란다는 건, 돈으로 진심을 사겠다는 안하무인적인 태도에 불과하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했던 ‘진심’은 어떻게하면 매출을 올릴까의 문제가 아닌 ‘어떻게하면 브랜드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다소 철학적인 질문이다. 더불어 브랜드란 ‘공공의 이익을 도모하는 가치'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나로썬 진심이란 “어떻게하면 우리 브랜드를 통해 오시는 분들이 즐거워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과 노력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에 대해 진중히 고려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미숙한 점을 보완하고 발전시킬 생각보단 그저 어떻게하면 사람들을 빠르게, 많이 끌어 모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가짐은 계속해서 매출만을 위한 어쭙잖은 지름길을 찾게 되고, 엄한 곳에 에너지를 쏟아 붇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이는 곧 브랜드의 염증으로 이어졌고, 내부 결속은 물론 불화를 조장할 수도 있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런 브랜드들은 내가 생각하는 브랜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진심’이 없는 브랜딩은 결코 성공하지 못하는 것일까? 중요한 건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주위만 둘러 보아도 맹목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해서 큰 돈을 만지는 사람들이 여럿 찾아볼 수 있다. 아이템에 대한 이해를 갖추고, 본인들의 아이템이 소비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일말의 고민없이 매출을 올리는 모습을 보고 낙심한 적도 여러 번있다. 그만큼 현대의 소비자들은 물리적으로 예쁘고, 매력적인 가치에 이끌린다는 증거였고 이를 교묘히 잘 활용하는 브랜드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절망의 이면은 희망이었다. 그 희망은 바로 브랜드의 지속가능성이었다. 제 아무리 예쁘고, 멋진 공간 안에서 커피와 디저트를 팔더라도, F&B 퀄리티가 제대로 따라주지 못하면 절대로 버틸 수 없다. 사업 초기에는 F&B를 감싸고 있는 여러 시각적인 기교로 호응을 유도할 수 있을지 언정 오랜시간 브랜드의 수명을 유지할 수 없다 의미다. 그래서 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영민한 비즈니스 모델은 다소 얄팍하더라도 단기적으로 성공하여 자금력을 갖췄을 때쯤 F&B 퀄리티를 상향시키기 위해 인재들을 영입하는 경우다. 현대의 사업체들을 이런 면에서 분명한 기회가 있다. 하지만 사업체의 주체가 속 빈 강정이고, 발전을 위한 노력이 업다면 이또한 언젠간 분명한 염증이 되리라 생각한다.




제 아무리 펩 과르디올라처럼 명장이 팀을 이끌어도 단단한 팀워크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요?


내가 진심에 대해 자꾸 강조하는 이유는 브랜드의 지속가능성은 결국 스태프들 간의 건강한 결속이자 팀워크에 있고, 이를 위해선 부단히 그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전제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설득을 위해 필요한 것이 주체의 에토스다. 에토스가 강한 주체는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더라도 스태프들과 한 배를 탈 수 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 곳을 바라보고 움직여야 하는게 브랜드의 생리이기 때문에 에토스는 설득해야 하는 사람들에겐 필수불가결한 가치다. 그렇다면 에토스는 어떻게 쟁취해야 할까. 사실 여기서부턴 비극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에토스는 어떻게 갖춰야 할까요?




사실 친구의 말을 적극적으로 공감했다. 물리적인 어려움은 감내할 수 있지만, 정신적인 통증은 쉽사리 극복하기 어렵지 않은가. 사람들과의 문제는 철저히 정신적인 영역이다. 특히 브랜드는 팀 워크로 움직이기 때문에 구성원 간의 관계가 정말 중요하다. 그 관계의 기반을 탄탄하게 만들어 주는 건 브랜드의 철학과 그를 위한 구성원 간의 약속이라고 하지만 그보다 전제되어야 하는 건 결속 주체의 에토스다. 즉, 제 아무리 때깔 좋은 브랜드 철학과 브랜드 약속을 명문화하더라도 진심과 함께 구성원들의 마음은 뒤흔들지 못하면 이는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 스태프들을 설득할 수 없다면 그건 0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서론부터 내내 강조한 에토스는 어떻게 빚어낼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 잠시 파토스와 로고스도 소환해보자면 파토스와 로고스와 다르게 에토스는 의식적 노력으로 만들 수 없다. (물론 파토스와 로고스도 어려워요..) 그러면 어떻게? 나는 그것이 무의식적 노력의 다발로 이루어진 세월이 만들어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쉽게 말해 진심과 노력으로 채워넣은 세월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방법론을 시원하게 해소시켜 줄 정답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쉽게 증명할 수 있다. 당장 집앞에 서점만 가보더라도 ‘감성적인 접근법’,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설득하는 방법’에 대한 수많은 사람들의 지혜가 녹아 있는 책을 쉽사리 만나볼 수 있지만 그 누구도 에토스에 관한 글 혹은 전략은 책으로 다루지 않는다. 이는 인간의 언어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을만큼 추상적이고,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은 ‘무의식’ 그리고 ‘세월’이다. 무의식을 강조한 이유는 내가 좋은 에토스를 갖겠다고 다짐하고, 그 길을 찾으려해도 쉽사리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에토스는 그 사람에게서 풍기는 아우라이며 그 아우라는 주체의 의식적 일면에서만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말투, 행동, 마음 씀씀이와 배경 등 여러가지 복잡 다양한 요소들이 섞인 결과물이다. 물론 자기가 원하는 장점들을 하나씩 골라 섞어 의식적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엔 관성이라는게 존재하기 때문에 언젠간 의식을 거스르는 무의식이 의식적으로 설계한 에토스를 무너뜨릴 것이라 생각한다.


에토스를 갖추기 위해선 무의식을 위한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단 역설적인 문장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심을 갖고 노력해서 즐기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다. 단순한 성장이나 이익만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짧은 호흡동안 어떠한 발전과 성과가 있길 바란다. 이는 조급함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처럼 긴 호흡으로 즐겨야 한다는 의식을 무의식 아래 녹여내면 우린 어느 새 즐기는 양태를 갖추게 될지도 모른다. 즉, 시간을 들여 사업에 대한 진심을 키우라는 의미이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에토스를 향한 지름길이다.




에토스의 토대는 진심이다. 그렇게 진심을 갖추는 법.






이 글의 막바지에 닿았음을 체감한다. 나는 늘 이성적인 생각을 늘여 놓은 뒤, 마무리는 감성적으로 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의 냉철한 이성의 토대는 감성이다. 나는 꿈의 가치를 믿고, 이 우주에서 그 꿈을 위해 달려가는 이들을 응원한다. 나또한 그런 부류 중 한 흐름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꿈을 이룬다."라는 거창해보이는 낯간지런 표현은 순수한 바보들의 언어로 치부된다. 하지만 나는 이보다 한발자국 더 나아가고자 한다.


"나의 힘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내고 함께 행복을 노래하는 것, 그리고 나의 철학과 노력의 일환이 이 세상의 좋은 자양분이 되는 것."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도 참으로 낯간지러운 세상이다. 하지만 거창해보여도 아름다운 의미를 마음에 품은 사람들만이 진정한 이성을 갖추고, 우리가 선망하는 브랜드와 가치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은 자기애로 이어지고, 그를 통해 내 마음과 머리가 행하는 사유, 언행에 책임감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삶에 대한 진심을 갖추는 순간 우리는 건강한 브랜드를 일궈 나아갈 수 있는 우주의 힘을 얻게 된다. 결국 자신의 삶에 애착을 갖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에 관심을 기울이고 진심을 다할 수 있는 노력이 의식적 노력으로 빚을 수 없는 에토스로 귀결되리라 믿는다.




노력해도 안된다고 말해놓고, 결국 노력해야 된다는 말로 이 글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됐다. 모두 ‘노력’이라는 단어로 표현을 했지만 전자의 노력과 후자의 노력은 분명히 다른 뉘앙스를 갖는다. 전자의 노력은 성과를 위한 물리적 노력, 후자의 노력은 진심을 갖추기 위한 부단한 노력. 전자를 실천해도 후자를 얻기는 힘들지만, 후자를 실천하면 전자가 자연이 따라오리라 생각한다. 효율을 중시하는 시대, 당신은 어떤 노력을 기울일 것인가.


에토스에 대한 개인적 의견이 다소 난잡하게 표현된 듯하다. 모든 결실에는 과정이, 과정은 결국 시작이라는 씨앗으로 인해 이루어진다. 어떠한 형태의 결과 건 인과관계가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건강한 브랜드의 성장은 스태프들의 결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 결속은 설득이 필수적이며, 설득에는 에토스라는 가치가 필요하다. 결국 에토스는 건강한 브랜드를 위한 강력한 무기로 자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과 무아지경을 위한 노력이 결국 설득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 기대한다.



“에토스라는 개념을 모르고 이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으로 에토스를 아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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