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를 사랑한 아이에서 화학과를 졸업한 자연계 학생의 이야기
공부보다 축구가 좋았던 삼수생.
고진감래 끝에 화학과에 입학하여 군생활 포함 6년이란 긴 여정 끝에 졸업.
그리고 현재 패션 브랜드에서 브랜딩을 하고 있는 초짜 사회인.
꽤나 다이내믹해 보이는 나의 젊은 날을 3줄로 요약해보았다.
그다지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지극히도, 아주 평범한 세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짧은 표현은 아쉬운 감이 있으니 저 3가지 주제에 따라 나의 청춘의 일부를 설명해볼까 한다.
글을 쓰기에 앞서 나는 여전히 미니멀리스트 minimulist 의 꿈을 안고 있지만, 헤비토커 heavy talker 의 성향을 강하게 갖고 있다는 점을 양해 바란다. 그럼 이해해줄 것이라 굳게 믿고 저 3줄에 대한 여정을 아주 간략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남겨볼까 한다.
공부보다 축구가 좋았던 삼수생. 이 한 문장 안에 나의 10대 모두가 담겨있다.
나는 꽤나 다재다능한 편인 아이였다. 처음 하는 운동이더라도 꽤나 소질이 있었고, 악기를 능숙하게 다룰 줄도 알았다. 말이 굉장히 많아 입심이 센 편이었고, 그래서 거짓말에도 아주 능통했다. 그래서 늘 내 머릿속 비어있는 공간에는 지식보단 잔머리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잔머리를 이용해서 어떻게 하면 공부를 안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잔머리로 만들어 낸 틈은 늘 축구로 채워 넣었다. 오죽했으면 중학생 때 체육대회 연습 중, 오른쪽 허벅지 근육이 파열되는 심각한 부상을 입는 바람에 오른쪽 다리로 롱볼을 찰 수 없었다. 그래서 10여 년을 오른발잡이로 살아왔던 내가 하루아침에 왼발잡이가 되겠다고 선언하고 공부 대신 축구를 매우 성실히 이행했었다. 사실 허벅지가 파열되었던 사실을 20대 때 알았고, 그 덕에 나는 오른쪽 허벅지에 경미한 장애를 안고 있다. 이쯤 되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나의 축구사랑에 대해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중요한 건 축구를 너무 좋아했던 나의 꿈이 축구선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뜬금없이 작곡가. 나는 늘 음악 곁을 떠나 있지를 못했고 음악으로 평생 먹고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오랫동안 품어왔다. 사실 지금도 그 꿈을 갖고 있긴 하다. 막론하고 어쨌든 나의 최대 관심사는 공부가 아닌 축구와 음악인 셈이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고등학생을 살아온 나는 현역 수능을 아주 제대로 망쳤다. 부모님은 상대적으로 학구열이 심하시진 않았지만 공부에 일가견이 있으신 편이셔서 그 배경력을 도저히 무시할 순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작심을 하고 재수를 선언했다. 하지만 재수 때도 축구의 늪을 벗어나지 못해 결국 쓴 고배를 한번 더 마시게 됐다.
삼수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계획이었다. 그리고 주위에서도 만류했다. 하지만 나 스스로 허락할 순 없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엄마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악어의 눈물을 흘렸다. 대신의 조건은 삭발. 외모에 관심이 엄청 많을 시기였지만 삭발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 상황인지 알고 있었고, 그렇게 나는 삭발을 하고 노량진에 입성했다.
노량진에서의 경험은 내 삶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축구는 물론이고, 친구들과 1분도 만나지 않고 공부에만 매진했다. 오죽하면 친구들 사이에서 성형을 하는 바람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나는 그 정도로 내가 머물렀던 세상과의 단절을 선언했다. 매일같이 새벽 6시에 일어나 노량진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고, 밤 10시가 돼서야 학원을 나섰다. 제 나름의 내공이 쌓여가며 세 번째 수능에 대한 자신감은 넉넉했지만 태어나 '시험'을 잘 쳐 본 경험이 없던 탓에 늘 큰 시험에서 무너졌다. 물론 이 관성은 세 번째 수능에서도 피해 갈 순 없었다.
앞서 '고진감래 끝의 진학'이라 표현했지만 사실 특별히 달콤한 성취는 아니었다. 원하던 대학엔 진학하지 못했고, 내 기준에서 아주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대학을 갔다. 친누나가 이 대학 부속 초등학교를 나왔는데 내 인생에선 그 이름을 다시 마주할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건 오만 그 자체였던 셈이다. 여하간 나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상실감을 떨쳐내기 위해 1학기를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신의 아들이 되지 못한 덕에 버려진 땅 강원도에서 혹독한 1년 8개월을 보내고 만기 전역을 했다.
3학기 반이란 시간 동안 나는 도서관에 갇혀 열심히 주기율표를 뜯어보고, 오만가지 전공서적을 뒤져보며 집과 학교만을 오가는 꽉 막힌 인간이었다. 사실 복학을 하고 나서야 모태솔로를 벗어날 수 있었는데 여자 친구와 많이 놀러 가지도 못할 정도로 나는 학업에 매진했다. 아마도 삼수에도 물구하고 맺지 못한 제 나름의 결실을 향한 갈증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싫어하는 일이라도 사회에 나가기에 앞서 뭐 하나라도 성취를 해보자. 자기 피해의식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 피해의식 덕에 늘 괜찮은 랭크에서 노는 학생이었다. 열심히 했으니깐. 싫어하는 것도 열심히 해보는 습관의 대상이 대학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화학이 내 길이 아님은 애당초 깨닫고 있었다. 화학을 하면 탄탄한 대로를 달릴 수 있으리란 믿음이 있었지만 그 대로가 탄탄한 가시밭길일 것만 같았다.
그리고 졸업. 졸업 때가 되면 지도교수님과 면담을 나누게 된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교수님은 자연스럽게 대학원 진학을 권장하셨다. 만약 내가 화학을 했다면 나는 ph.D 까지 했을 것이다. 물론 화학에 뜻이 없었기 때문에 막연하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하지만 나는 다른 길을 가겠노라 선언했다. 교수님도 안타까워하시는 눈치였지만 꽤나 개방적이신 사고를 가지신 분이셨기 때문에 나의 앞날을 응원해주셨다. 그렇게 졸업 면담을 마친 후, 나는 영원히 화학과 안녕을 고했다.
Let me introduce myself #2 에선 제가 패션 브랜드로 입사하게 된 계기와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