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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신 Dec 26. 2020

Let me introduce myself #2

화학인에서 패션 브랜드에 입사한 나



이 글을 접하시기 전, Let me introduce myself #1 의 구구절절한 제 역사를 읽어보고 오시면 더욱 좋습니다.



#01. 나를 위해 뉴욕으로 떠나다.


뉴욕은 내 마음의 고향이자 정신의 고향이다.


6년이란 긴 시간 동안 화학 공부를 마친 나는 재학 시절 틈틈이 모은 돈으로 뉴욕으로 날아갔다. 친누나가 뉴욕에서 거주 중인 덕에 가끔씩 여행 차 뉴욕에 가곤 했는데, 이번엔 나의 사회진출에 앞서 스스로를 정리하기 위한 대의를 품고 미국으로 향했다. 정리의 시간도 필요했지만 마음의 환기가 더 중요했고, 틀에 박혀있던 삶으로부터 탈피해 다양한 문화와 아이템을 접해야 한다는 강박도 뉴욕행에 큰 몫을 차지했다.



뉴욕에 가서도 작업을 해보겠다고 여러 장비를 챙겨갔다. 근데 결국 별걸 하진 못했다.


정말 정처없이 걸어다녔다. 확실히 어렸을 때 왔던 뉴욕과 조금 더 머리가 커서 방문한 뉴욕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누나는 회사를 다녔기 때문에 나 홀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집에 머물며 음악 작업을 하기도 했고, 홀로 나가 정처 없이 걸어 다니며 사진도 찍고, 공원에 앉아 멍때리며 잔잔한 생각을 하는 사치의 시간도 많이 가졌다. 스스로를 돌이켜 보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하는 성향의 나로선 이런 시시콜콜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역시 백수가 최고다. 그래서 뉴욕이라는 배경에 비해 좋은 음식, 좋은 카페, 좋은 옷도 그다지 필요치 않았다. 그냥 나 홀로 시간을 보내며 다른 문화와 도시를 느끼고, 더불어 나의 미래를 조심스럽게 그려보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흥분되고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모든 일에 앞서 나 스스로부터 사랑해야 한다는 내 나름의 지론에 이상적으로 부합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2018-2019년을 보낸 뉴욕에서의 시간은 내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좋은 자양분이 되었다.


* 나중에 시간이 되면 뉴욕에서 보냈던 시간에 대한 글도 써보고 싶다.



#02. 사실 전 마음을 굳혔습니다.



사실 내 진로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대학시절, 정말 운이 좋게 좋은 분을 만나 패션업계에 대한 경험을 야금야금 쌓을 수 있었다. 방학 때마다 브랜드 매장에서 세일즈를 했고, 매장과 회사가 함께 붙어 있던 덕에 디자인 회사의 시스템, 프로세스를 어깨 너머로 경험하고 있었다. 원체 패션에 관심이 많았던 탓이기도 했지만 그런 광경들이 꽤나 신기하게 다가왔고,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그래서 이 경험을 계기로 좀 더 패션이란 시장과 가까워지기 위해 패션 블로그를 만들었고, 이를 운영하며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나 디자이너, 뉴스들에 대해서도 깊이 파고들며 소소하게 칼럼을 작성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패션을 업으로 삼기엔 좀 더 냉철한 시각이 필요했다. 단순히 얄팍하게 경험하고, 흥미를 느꼈다고 해서 나의 미래를 맡기기엔 너무 큰 리스크가 존재했다. 더군다나 나는 음악에 열의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고민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때때론 이상보다 이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음악을 분명히 하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은 업으로 삼을 만큼의 실력은 갖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을 이성적으로 나눠보기로 했다. 하고 싶은 일은 음악이었다. 잘하는 일은 생각하고 글을 쓰는 일이었으며, 특히 패션 관련한 부분에 대해선 어느정도 근자감이 있었다. 패션과 인문학 그 사이쯤으로 생각했던 것같았는데 막연하게 그 분야가 나에겐 블루오션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건강한 패션 브랜드로서의 이상적 형태를 갖추는 일. 거기에 일조하는 일이 내가 업으로 삼을 수 있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패션 브랜드는 무엇보다 비주얼라이즈가 중요하다. 멋진 컨텐츠, 디자인 등. 시각적인 요소가 매우 중요한 영역이었지만 정작 가장 중요시 여겨야 하는 철학에 대해 깊이있게 다루는 브랜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어떤 일이건 집단의 철학을 명문화하고, 함께 대의를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며, 이상을 향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잘 팔리는 디자인을 능숙하게 다루는 브랜드는 많았다. 그래서 나는 그런 브랜드들이 그저 단순히 소모적이고 일시적인 브랜드라고 생각했다. 이런 브랜드들의 일시적인 성공을 지속가능하게 만들고, 오랜기간 사랑받을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선 제 나름의 철학, 인문학적인 요소가 필수적이란 믿음이 강하게 다가왔다. 나는 남들이 생각했을 때 남사스럽다고 표현할 정도의 감성과 대의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요소들에 대해 좀 더 쉽고 빠르게 다가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앞날이 조금은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시선이 과포화된 패션 시장의 진정한 블루오션을 만들어줄 수 있는 자극이라고 생각했다.


* 블루오션은 새로운 아이템과 영역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각에서 오는 것이다. - 정태영



아! 드디어 찾았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이쪽이구나. 그럼 이런 일을 하는 걸 뭐라고 해야하지? 어떤 직무가 있지? 오랜시간 관련된 직무를 찾아보니 브랜딩 branding 이라는 결론에 닿았다. 브랜드의 철학을 소비자들에게 인식시키고, 이를 중심으로 단단하게 성장해 나아가는 과정.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꽤나 흥분이 됐다. 그래, 이런 철학적인 부분에 나의 장기를 잘 얹어서 패션 브랜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보자. 나 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역시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다.



#03. 겁없이 패션 브랜드에 문을 두드리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귀인 貴人 을 만나기 마련이랬다.


 뉴욕에서 시간을 보내며 받았던 여러 가지 영감과 정리된 생각을 토대로 인생의 포부를 열거해보았다. 내가 잘한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 그래서 어떤 결과를 창출하고 싶은지. 그리고 분명 힘든 시기가 닥칠 것인데 포기하지 않고 잘 헤쳐나갈 의지가 있는지.  


고심 끝에 대학 시절, 우연히 인연을 맺었던 브랜드 쪽으로 나의 어리숙하지만 열정 어린 포부를 담은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일방적으로 보내버렸다. 이미 세일즈로도 일을 해봤고, 일부 임직원들과는 막역한 관계였기 때문에 비경력직인 나의 지원을 두고 '낙하산'이라는 오명을 받게 될 것 같아 정말 영혼을 갈아 자기 소개서와 이력서를 준비했다. 정말 오버라고 생각할 정도로 손을 많이 봤다. 어떻게 보면 특수 관계로 볼 수 도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도 나름의 위험요소가 있었고, 비경력자인 나를 채용한다면 브랜드 입장에선 더 큰 위험요소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더 열심히 준비했던 것같다. 


메일을 보낸 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일단 만나보자.'라는 브랜드 측의 회신이 도착했다. 일단 실낱같은 동아줄은 떨어졌으니 나는 그걸 꽉 잡을 차례였다.


* 비즈니스란 들어 온 기회를 딱 붙잡는 것이다. - 베르나르 아르노





알고 지내던 관계였기 때문에 오히려 더 긴장이 엄습했다. 내가 어설픈 마음으로 관계를 들먹이며 입사하고 싶다고 오퍼를 한 꼴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쭙잖지만 내 나름대로의 브랜드 비전과 제안서를 작성해서 면접에 임했다. 다행히도 나와 친분이 있었던 분들은 면접에 모두 배제가 되어 있었고, 그저 안면만 튼 대표님과의 단독 면접으로 진행됐다.


"내가 생각하는 브랜드의 현상황은 이러하다, 그래서 이런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이러하고, 이를 보완해야지만 좀 더 건강하게 패션 시장에 안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포트 폴리오랄 것이 없어 내가 준비해 온 여러 가지 제안서와 PPT를 중심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래도 진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식적으로 들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행히도 결론도 나의 진심과 어긋나진 않았다. 일단 브랜드 측에선 '네가 입사를 하고 싶어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잘 알았으니 오늘은 여기서 마치고 다음에 한번 더 만나보고 결정하자.'라는 답변이었다. 쉽게 말해 2차 면접을 한번 더 가져보자는 의미였다. 2차 면접이랄 게 별다른 건 아니고 앞으로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에 대해 함께 고민을 해보자는 취지였다. 


내 생에 첫 회사 면접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렇게 좋은 분위기도, 좋지 않은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다음 만남을 약속 받은 것 뿐이었다. 다만 내 나름대로 조리 있게 생각을 전달하지 못한 것이, 나의 부족한 설명을 메워 줄 전문적인 지식과 신빙성있는 명분이 부족했던 것이 조금의 아쉬움으로 남았다. 하지만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선 최선을 다했고, 나는 두 번째 만남을 준비해야 했다.




#04. 결론은, 행운아가 됐습니다.



이상하게 1차 면접에 비해 2차 면접이 훨씬 더 떨렸다. 아마도 1차 때 내가 갖고 있던 무기를 모두 쏟아 부은 탓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앞으로 내가 회사에 들어왔을 때 명확하게 하고 싶은 업무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라고 하신 게 전부였기 때문에 1차 면접보다 훨씬 더 추상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순 없었다.그래서 얼마 되지 않는 패션업계에 몸담고 있는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했다.


기본적으로 디자인을 다루는 회사는 어떠한 방식으로 운영되며, 어떤 부서엔 어떤 직종이 있고, 그 직종은 어떤 일을 하고. 학생 때 어깨 넘어 배운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체계적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정보를 머릿속에 넣는 것이 매우 힘겹고 복잡한 일이었지만 일사분란하게 흩어져 있던 정보들이 말끔하게 정리되는 것같아 내심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이미 체계를 경험한 사람, 혹은 전문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준할 정도의 준비는 사실 상 불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 내 많은 직무에 대한 공부보단 모든 포커스를 '나' 하나로 맞추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철저하게 생각해보고 준비를 해서 면접을 준비했다.


다행히도 2차 면접은 1차 면접에 비해 조금 더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흘러갔다. 2차 면접 또한 대표님과의 면접으로 진행됐지만 '나'로 국한시켜 추려낸 컴팩트한 정보와 특유의 임기응변으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대표님도 남을 무안하게 하거나,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신 분은 아니었기 때문에 두 번째 면접은 더욱 배려하시려는 것 같아서 나름대로 긴장의 끈을 내려 놓을 수 있었다.





많은 분들의 도움과 귀인과도 같은 브랜드 덕에 나는 취업을 할 수 있었다. 말그대로 행운아였던 셈이다. 취업이란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구나. 새삼스러운 생각들이 마음을 휘저어 놓았다. 계약서를 쓰고 집으로 돌아오며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정말 격변의 삶을 살아가는구나. 정말 앞날은 한치도 예상할 수 없구나.'


정말 어렵게 대학에 입학했고, 4년이란 시간동안 전문적인 지식을 쌓았지만 전공을 업으로 삼지 않았다. 심지어 전공과 아무 연관도 없는 직무를 나의 앞날로 선택한 건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의 철학은 확실하게 갖고 있었다. '한번 사는 인생이란 것.' 굉장히 거창한 표현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것에 비해 과감하지 못한 성격이긴 하지만 적어도 내가 화학을 전공으로 공부했단 이유로 이를 평생의 업으로 살아 갈 의무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10대의 내가 결정한 전공을 평생의 업으로 삼는다. 오히려 이 과정이 전공을 업으로 삼는 것보다 더 큰 베팅이 아니었을까.


나는 나만의 합리적인(?) 논리를 토대로 새로운 인생의 막을 열었다. 누구보다 잘한 선택도, 못한 선택도 아닌 그냥 나만의 선택이었다. 이제 부재된 전문성을 어떠한 현명한 방식으로 메워갈 것인지, 내가 앞서 다짐했던 것처럼 이 브랜드를 어떻게 한 층 더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투철한 고민과 실천만 숙제로 남아 있었다. 그렇게 나는 격변의 삶 속에서 한동안은 정착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되었다.



다음 편 Let me introduce myself #3 은 저의 직무에 관련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해 볼까 합니다. 제가 입사한 이후로 어떤 일을 했는지,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3을 끝으로 저의 대한 설명은 진행되지 않을 예정이며 이후 등재되는 글은 모두 저의 직무에 대한 저의 생각과 거친 세상 속에서 주워들은 지식들을 열거해 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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