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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신 Jan 12. 2021

Let me introduce myself #3

나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 저는 이런 일을 합니다.

이번 글을 읽기 전에 Let me introduce myself #1, #2를 읽고 오시면 더 스펙터클한 저의 이야기를 느끼실 수 있습니다.




#01. 저는 사회 초년생이 아닌 '초짜 사회인'입니다.



'초짜 사회인'


분명히 어색한 표현이지만 '사회 초년생'이라는 익숙한 표현보단 나와 더 어울리는 표현이라 생각했다. 어색하고 어리숙한 느낌. 앞선 #1,#2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패션에 관련한 고등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그저 패션에 관심이 많고 인문학적인 사고에 능하단 이유 하나만으로 패션 회사에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하늘이 도우신 덕에 입사를 할 수 있었고.


다행히도 회사 분위기는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대다수 임직원의 연령이 나와 비슷했기 때문에 공감대를 쉽게 구축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선배, 동료들의 인품이 훌륭했다. 보통 회사 생활이 인간관계 때문에 힘든 법인데 나는 정말 운이 좋은 편인 것 같다. 사람들 간의 관계는 정말 이상적이었으나 예상치 못하게 내 발목을 잡은 게 있었다. 바로 나 자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직무. 그리고 지금부터 고난의 글 시작.


나도 경험이 전무했지만 회사 입장에서도 브랜딩에 관련한 인재를 채용한 건 내가 처음이었다. 회사 내 새로운 직무를 실행하는 실무자가 생겼으니 새로운 팀이 생겼다고 봐도 무방했지만 사실 경험도 없는 비전공자 신입을 위해 새로운 팀을 꾸리는 일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랬다. 나는 디자인과 머천다이징 MD로 양분화된 회사 내에서 판매와 데이터 중심으로 돌아가는 MD팀에 속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MD의 업무를 소화하기 시작했다. 브랜딩이란 이름으로 입사했지만 직무에 대한 명확한 팀과 사수가 없었고, MD팀에 속하게 되었으니 나의 사수는 자연스럽게 일손이 부족한 MD팀이 되었다.





처음엔 MD와 브랜딩 업무를 최대한 병행하고자 했다. 몇 년 간 시즌을 전개해 온 브랜드에 내재되어 있는 필로소피는 무엇인지, 그리고 이 필로소피로 어떤 지향점을 그려야 이상적인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지, 여기서 어떤 가치를 도출하고 내세워  소비자들에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찰을 이어갔다. 그래서 틈틈이 브랜딩에 관련한 잡다한 지식들을 구글링과 전문 서적을 통해 취합하여 이것저것 테스트를 해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너무너무 이론적인 접근방식이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브랜딩에 관련한 업무뿐만 아니라 MD로써의 업무도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브랜딩에 눈길을 줄 시간이 넉넉지 않았다. 오랜 기간 팀 단위로 업무가 진행됐던 MD팀은 이미 업무 프로세스가 잘 잡혀 있었기 때문에 워크 플로우가 단단하고 매끄럽게 흘러갔고, 이제야 첫 발을 내딘 브랜딩은 말 그대로 굉장히 흐릿한 정체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부) 자연스럽게 MD팀 쪽으로 흡수될 수 밖는 환경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실질적인 직무인 브랜딩과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입사 초기에는 병행하겠다란 의지가 강했지만 막상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닥쳤고, 이를 다 처리하다 보니 나의 존재가치에 대해 생각할 겨를조차 사라진 셈이다. 결국 MD팀에 흡수된 것도 문제라면 문제였겠지만, 나 스스로가 정확하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 업무 신조가 서질 않았던 탓도 분명 큰 몫을 했을 것이다. MD팀은 MD팀대로 나를 귀속시켰고, 나는 나대로 확고한 업무 철학이나 인지가 없던 탓이라고 해두자. 그렇게 나는 점점 정체성을 잃어가는 브랜딩 MD라는 이름으로 회사의 한 자리를 채워가고 있었다.





#02. 역시 사람은 예상보다 오만하다.



어엿 입사한 지 1년 9개월이란 시간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브랜딩 MD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다니고 있다. SNS 콘텐츠와 시즌 트렌드, 시즌/프로모션 리뷰, 디자인-MD의 커뮤니케이션 허브, 협업 및 그 외 HR적인 부분까지 조금씩 혹은 많은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여전히 꽤나 다양한 업무를 처리하고 있지만 정작 내가 책임져야 할 <명확한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여전히 부재중이다. 전문적으로(?) 브랜딩을 하시는 분들이 보시기엔 다소 의아한 상황일 수도 있다.


"브랜딩이 없는 회사에서 브랜딩이라는 이름을 가진 직무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낯부끄러운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결과론적 업무태만. 나는 비록 브랜딩을 담당하고 있지만 여전히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제대로 도출해내지 못하고 있다. 첫 번째 이유는 나의 능력 부재였다. 이는 나의 오만함에서 비롯된 재앙이었다. 내가 생각한 브랜딩은 임직원 간의 진중한 의사소통과 적절한 소비자 조사를 통해 브랜드의 방향성을 모색하고, 이를 명문화시킨 뒤, 회사 모든 구성원들에게 안착시키는 일이라고 매우 심플하게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이 생각에 대한 큰 변화는 없다. 하지만 내가 놓친 건 이론이 아닌 현실이었다. 이론은 단순했지만 현실은 앞서 언급한 요소들을 실천하기 위해선 나만의 의지가 아닌 '집단의 의지'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브랜딩이란 나 혼자 절대로 설계할 수 없는 작업이란 의미다. 어찌 보면 실무자가 할 수 있는 말 중 가장 비겁한 표현일 순 있겠지만 이것이 곧 내가 처한 현실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이상과 현실은 큰 간극을 갖고 있었다. 간극에 대한 경험은 30여 년의 인생 동안 충분히 느껴왔지만 이번에도 나의 오만함은 이를 망각하게 만들었다. 자책도 자책이지만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였다.


"이 오만의 결과를 어떻게 헤쳐 나아가야 할까."


어떻게 생각하든 결과는 '진정한 브랜딩 프로세스에 착수하기 전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성공적인 브랜딩을 마쳐야 할 사명이 있고, 그를 지켜내기 위해선 나만의 의지가 아닌 집단의 의지를 도출해야만 했다. 이제야 맛있는 밥상을 차리기 전에 장을 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03. 나의 대한 시각을 뒤바꾼 후, 나는 돈을 받으며 경험을 쌓아가는 중입니다.



입사를 하며 행운과 불행을 동시에 얻었던 나는 꽤 오랜 시간 혼란 속에서 살았다. 하지만 나의 고민이 무색하게 시간은 무심히도 흘러갔고, 매일매일 그리고 어김없이 새로운 업무들이 나의 책상 위로 올라왔다. 나는 무아지경의 상태로 업무들을 해 나아가고 있었지만 정처 없는 업무 정체성을 두고 무기력하게 끌려다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이어갔다. 하다못해 브랜드의 중심을 확실하게 먼저 잡아둬야지 이 업무들을 좀 더 효율적으로, 그리고 이상적으로 처리할 수 있겠다란 생각이 머릿속을 벗어나질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랜 기간 유지해 온 브랜드가 앞으로 더욱 오랫동안 유지되었으면 하는 소망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그에 반해 브랜드의 매출은 오름세를 보이긴 했지만 브랜드는 조금씩 조금씩 가라앉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자리하는 순간이었다.





지금 나의 상황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했다. 다른 표현으론 재정립. 그래서 여태까지 브랜딩의 방법론을 연구해 온 자세를 허물고, 브랜딩이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성을 느꼈다. 소위 브랜딩을 맡고 있다면 브랜딩에 대한 자기만의 해석이 있어야 할 것이란 믿음의 결과였다.



일단 이성적인 기준에서 바라본 브랜딩은

<수익을 목적으로 브랜드의 이미지를 소비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인식시키는 것>.

말 그대로 '브랜드가 이렇게 보였으면 좋겠다.'라는 브랜드의 취지와 가장 가까운 이미지로 소비자들에게 인식시키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일종의 이미지 설득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나의 주관적 해석이자 최종적 목표는 이보다 조금 더 감성적이다.


<브랜드의 본질을 강화하는 일>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고, 너무나도 추상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나에게 이 표현은 어떤 일을 임하건 중심이 되어 주는 문장이다. 여기서 말하는 브랜드의 본질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데, 그중 내가 가장 중시하는 건 <공동체의 이익과 행복의 분배>이다. 이윤을 추구하는 누군가에겐 비즈니스적이지 못한 마인드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런 감성적 이상이 위에 언급한 이성적 해석까지 실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쉽게 말해 브랜드의 본질을 강화하면 브랜드의 이미지를 소비자들에게 이상적인 방향으로 인식시킬 수 있을 것이며, 그에 따라 수익이 창출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내가 꿈꾸는 브랜드의 본질을 강화하는 일은 어떻게 해야 할까.





매우 이론적이지 못한 영역이다. 내가 좋아하는 인문학적인 영역임과 동시에 전사적인 문제다. 브랜드의 체질을 바꿔야 하며 무엇보다 구성원들이 한 곳을 바라보고, 하나의 마음으로 달려갈 수 있도록 설득하고, 이러한 환경을 구축해야 하는 작업일 것이다. 이를 위해선 브랜드의 전체적인 구조와 과정에 대한 이해도가 필요하다. 마치 최고 경영인처럼 말이다. 그래서 오히려 나는 현재 나의 다양한 업무를 소화하는 내 위치를 새로운 자세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잡다한(?) 업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겐 모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일이며, 내가 바라는 브랜딩의 진정한 의미에 다가서기 위해선 필수적인 과정이란 의미다. MD팀의 워크 프로세스는 어떻게 되는지, 디자인팀과의 관계 구축은 어떻게 해야 효율적인 시즌을 준비할 수 있는지, 외주 핸들링은 어떻게 임할 때 좋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지 등등등. 브랜드 내외적으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업무와 과정, 결과들에 대한 이해력이 내가 생각하는 브랜드의 본질을 강화하는 일을 완성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한 뒤로는 나 스스로에게 갖고 있던 불만을 많이 해소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믿음이 아직 여물지는 않은 터라 가끔씩 내가 뭘 하고 있는가에 대한 현실 자각이 올 때도 있지만 그래도 끝까지 이를 악 물어볼 동기는 생긴 셈이다. 가끔은 아주 바보 같은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오히려 나에게 명확한 직무만 주어졌다면 나의 시야는 근시안적으로 갇혔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쁘게 말하면 정체성이 없지만, 좋게 바라보면 아주 많고 다양한 일을 하며, 봉급까지 받으며 값진 경험을 하고 있다. 합리화 절대 아님


*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팍팍하지만 괜찮아> 매거진을 통해 차근차근 진행할 예정입니다.



#04. 그래도 저는 목표가 있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방황. 여전히도 나는 방황 속을 거닐고 있지만 인간은 역시나 적응의 동물이었고, 정말로 행운인 건 여전히 나는 열정이 있다는 것이다. 회사에 들어오며 스스로 했던 다짐이 하나가 있었다.


<이 브랜드를 한 층 업그레이드시킬 것.>


나로 하여금까지는 아니고 우리 브랜드가 한 층 더 업그레이드되어 있을 때 조그마하게나마 일조했던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었으면 하는 목표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브랜딩이 더욱 중요하고, 빈 손으로 입사한 만큼 이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와 고찰 그리고 노력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조금씩 공유하다 보면 나 자신의 성장은 물론, 독자 분들로 하여금 유익함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 이 매거진을 만들었다. 기록이자 정보 공유 차원이라고 해야 할까.


여하간 <조금 팍팍하지만 괜찮아>를 통해 조금은 건조해도 건강한 성장을 위한 나의 과정을 조금씩 기록해 넣어볼까 한다. 최대한 미흡함을 줄이고, 진심 어린 마음으로 글을 써 내려갈 예정이니 많은 독자 분들에게 아주 작은 선물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 글을 끝으로 저의 기나긴, 장황한 설명은 막을 내리고자 합니다.

물론 어떠한 계기와 명분이 생긴다면 다시 소개할 날이 오겠지만 한동안은 그럴 일이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는 제가 하는 업무에 대한 지식이나 제가 생각하는 대의, 그리고 회사 내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이야기 등을 적절하게 조리하여 글을 써 내려가 볼까 합니다. 


여태까지 저만의 난해한 흐름을 잘 따라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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