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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작가 Jun 12. 2016

용서보다 위로가 간절해지는 순간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 연민으로 그들을 위로할 것, 그것이다.

SBS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 화면 캡쳐

사기꾼 오수(조인성)는 자신과 동명이인인 오영(송혜교)의 친오빠 행세를 한다. 
이 사실을 모르는 오영은 다른 오수, 즉 친오빠라 믿고 있는 남자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말한다.

오 수
나무 수.
어릴 때 엄마가 나무 밑에 버렸대. 그래서 나무 수.

오 영
그럼 그 사람은 엄마 얼굴을 한 번도 못 봤겠네?

오 수
봤대. 열 몇 살 때인가, 학교 앞에 불쑥 나타나 오만 팔천 원을 주고 갔다지 아마. 그게 전부.

오 영
안 됐다.
그래서, 그 사람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사기꾼이 됐나?

오 수
핑계 좋네.
그놈은 원래 그런 놈이야. 태생이 쓰레기 같은 놈이지.

오 영
사랑하는 사람은 있었나?

오 수
한 때는. 그런데 여자가 자기 애를 가졌다고 말하는 순간, 
야멸차게 뒤도 안 돌아보고 여잘 버렸대.
그러다 뒤 따라오는 여자가, 그만 사고로..

오 영
그게 그 사람 몇 살 때야?

오 수
열아홉. 여자도 그놈도 열아홉.
나도 한 때 너처럼 부모한테 쓰레기처럼 버려진 그놈이,
쓰레기처럼 살고 싶어 하는 걸 이해하고 동정한 적도 있어.
하지만 그런 놈을 사랑해서 집을 버리고 학교를 포기하고 
자기 애까지 가진 여자를 책임지지 못한 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야.
오 영
니가 뭔데 그 사람을 용서해.
사람이 사람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용서가 아니라, 위로야.
내가 처음 뇌종양이 걸렸을 때 내가 바란 것도 위로였어.
근데 사람들은 오빠 너처럼 위로하지 않았어.
위로는커녕, 여섯 살 아이한테 용기를 강요했어, 잔인하게.

괜찮아 영이야, 수술은 안 무서울 거야. 
괜찮아 넌 이길 수 있어. 항암치료? 그까짓 거 별거 아니야.

오 수
그런 사람들이 그 말 말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오 영
안 괜찮아도 돼.
영희야, 안 괜찮아도 돼. 
무서워해도 돼. 울어도 돼.

만약,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면, 
나는 하루 이틀 울다가 괜찮아졌을 거야.
근데, 그때 못 울어서 그런가. 
지금도 난, 여섯 살 그때만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
오 영
그 사람도 나 같지 않았을까.
기억도 못할 나이에 나무 밑에 버려졌는데
어쩌다 나타난 엄만 고작 오만 팔천 원을 주고 떠났는데,
그것도 모자라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한 여잘 
어린 열아홉 살에 영원히 잃어버렸는데, 아무한테도 위로받지 못했잖아.

오 수
그래도 아이를 책임지지 못한 건 잘못이야.

오 영
잘못이지. 아주 큰 잘못.
하지만 그 사람은 자기도 책임질 수 없는 열아홉이었어.
그 나이에 자기 인생을 꼭 빼닮을 거 같은 아이는 많이 무서웠을 거야.




장작가의
요거트라디오



용서란,
가해자와 피해자로 엄격하게 나뉜 구성에서 나오는 행위로
피해자가 우위에 서서 가해자를 내려다 보고
가해자의 지난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날 두고 바람 핀 애인을 '용서'하고
지난 세월 자신을 따돌림을 시킨 친구를 '용서'하고
어린 시절, 엄마의 무차별한 학대를 '용서'한다.



너에게 면죄부를 줄까 말까



피해자는 자신을 아프게 한 만큼
가해자를 쉽사리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렇듯, 용서는 피해자와 가해자만 행할 수 있는 행위다.

노희경 작가가 여기서 말하는
"네가 뭔데 그 사람을 용서해."는 이렇다.
제 3자는 용서를 하고 말고 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의미다.

다만, 가해자도 피해자만큼이나 가여운 시간들이 있음을 인정하고 보듬어줄 뿐이다.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라면 가해자의 죄를 인정하되 용서의 주체는 될 수 없으며,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이를 가여워할 것. 연민의 마음으로 그들을 위로할 것, 그것이다.

다큐멘터리 방송작가 재직 시절, 법적 가해자를 취재할 일이 있었다.
대부분의 취재를 전화로 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목소리만으로 그 사람을 알아갈 뿐이었다.
죄를 판가름하는 데 있어서는 그 사람은 명백히 가해자였다.
그 과정도 그랬을까. 아니었다.
다만 그것을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한 탓에 가해자가 된 것이었다.
전화기 너머에 있던 가해자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음에 외로워했다.

사실 나는 그저 본분에 충실하여 '취재'했을 뿐인데,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어느새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어떤 울림을 주었던 걸까.
모두가 외면한 자신의 속마음, 진심들. 
가족들마저 자신을 버리고 용서하지 않는데, 
얼굴도 모르는 어떤 여자가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 사람은 용서를 구하는 것도 아니었고, 자신의 말에 동의를 강요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이야기를, 누구도 귀기울이지 않았던 말들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 또한 이때 하나 깨달았다.
상처를 입히고 받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우리는 그것을 판단(judge)할 수는 없는 거구나.
그저 모두들 아픈 사람들이니 그들의 마음을 듣고 위로하는 것, 
그 이외에는 모두 나의 자만에서 나오는 월권이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나도 세상에 바라는 것이라는 게 그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 단지 위로할 뿐이다.



©YogurtRa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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