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상처받은 자식들을 위한 위로
한반도 전후 10년, 전쟁은 끝 났어도 내 아비의 고향은 삶이 전투이자 투쟁이었다. 아들 셋 딸 셋 중 정확히 중간에 태어난 나의 아비는 지게를 지고 산을 올랐다. 감자는 너무 먹어 질렸다는 아빠와 간식으로 감자를 삶던 우리 엄마는 서로 같은 시기 다른 삶을 살았다.
흔한 오십년대 출생의 부모들 같이 가난한 고향의 조부모는 여러 자식을 다 돕지 못했다. 어려운 형편에 삶에 끼어든 아이엠에프의 그늘 아래 내 부모는 헤어지는 것이 더 나았을 관계로 40년을 살았다. 1981년에 시작된 결혼 생활이 2023년 아빠의 죽음으로 그 방점을 찍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 싸움이 무서웠다. 이불에서도 들리고 자는 척 눈을 감으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기분이 좋아 마신 술에 기분이 나쁠 때까지 과음하게 된 아빠는 그렇게 자식을 때리고 아내에게 욕을 했다. 가슴이 쌓인 게 많았을 까 그런 이해도 과분하게 느껴지는 아빠였다. 책임감도 없던 아빠 덕에 번듯한 생활비를 규칙적으로 받아본 적도, 등기부등본에 이름 한 번 적어본 적 없던 우리 가정은 위태롭게 유지됐다. 전세 조차도 언니의 희생아래 마련됐다. 결국 아빠는 죽는 날까지 집 한채, 자동차 한대 자기 이름으로 마련하지 않고 떠났다. 아빠가 죽은 후 발견된 현금과 그 보다 큰 빚들을 나누는 것이 의미 없어 나는 한정승인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자유를 얻었다. 생활비를 주지 않던 아빠가 가끔 선심 쓰듯 주던 한 두번의 용돈이 있었다. 안경을 맞추라고 주었던 그 돈을 다시 내놓으라고 억지를 쓰던 날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아빠를 때렸다. 그 단 한 대에 돌아온 그 셀 수 없는 구타 이후 돈을 가지고 나간 아빠는 어느 여자를 안났다. 그 여자를 만나 했던 행동은 여자의 고발장이 집으로 도착한 후 읽게 됐다.
천사에게도 그림자가 있을까, 악마 같았지만 그 긴 세월 아빠는 나의 손톱과 발톱을 잘라주었다. 밝은 대낮에 휴일에만 다듬어 주던 손톱에 지금도 나는 긴 손가락에 반듯한 손톱을 가지고 있다. 기억력이 좋지 않는 나도 반짝이는 햇빛과 나른한 주일 오후의 기운이 선명하다. 우리 엄마는 두 딸의 손톱과 발톱을 깎아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열 아홉 살에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신발끈을 매 봤다. 아빠는 내 운동화 끈을 항상 묶었다. 언니는 그런 아빠의 경향을 이어 내 숟가락 위에 생선살을 발라 얹곤 했다. 항상 나쁘기만 한 것도 무조건 좋기만 한 일도 세상엔 없다는 것을 익힌 시간들이었다. 그런 아빠는 2023년 4월 18일 급성심근경색으로 중환자실에서 홀로 떠나갔다.
아빠가 생전에 퍼붓던 욕 덕분에 언니와 나는 이른 사회 생활 중 남의 욕설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도 누군가 험한 말을 면전에 퍼 부을 때면 나는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대답한다. 그래서 지금 당신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말이다. 험한 말을 듣고 바들바들 떨며 울기에 나는, 너무 자라버렸다. 그 때의 어린 내가 이미 겪은 상처엔 이미 흔적만 남았다. 굳은 살이 박힌 나의 상흔에 깊이 박히지 않고 튕겨나가는 것 같다.
지금 나는 나의 가정을 이루었다. 이따금 떠오르는 아빠의 기억을 마주할 때면 다소 낯선 마음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아빠가 죽었으면 했지만 이렇게 정말 죽고 나니 마치 상대가 보이지 않는 싸움 같기도 하여 허무하다고 표현하기 힘든 어떤 공허감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는 죽었고, 나는 산다. 나의 아이를 키우고 그 아이에게 종종 어린 나를 투영한다. 나는 내 아비의 화를 담고 살지 않겠다. 이를 악물고 되 내여 본다. 사랑이 사람을 살게 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