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유럽 인문 대장정 1편
이어질 글은 2016년 7월부터 10월까지 석 달 동안 유럽을 여행한 기록이다. 5년이 지나도록 묵혀 두었던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은 역병의 유행으로 다시 자유롭게 왕래할 날을 가늠할 수 없게 된 까닭이다. 발길이 닿았던 14개 나라, 37개 도시 가운데 각별히 책과 음악, 그림에 이끌려 방문한 곳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시간이 흘러 흐릿해진 기억은 관련 자료를 찾아 보강하였고, 현재 시점을 교차 반영하였다.
함께 떠날 여정이 방문지에 대한 관심에 그치지 않고 인간과 예술, 문명과 세계를 이해하는 장대한 여행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잘츠부르크를 떠나는 날 아침이다. 숙소에서 중앙역까지는 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이다. 짐을 꾸리고 시간이 조금 남아 육중한 기둥이 늘어선 회랑 그늘에 앉았다. 신학교 특유의 단정한 안뜰로 아침 햇살이 번진다. 코앞에 모차르트가 살던 집과 마카르트 다리가 있지만 대문 안은 딴 세상이다. 세속의 부산함도 신학교 담장을 넘지는 못했다. 아침 정취에 빠진 나그네 앞을 검은 고양이 폼폼이 지나며 이제는 떠날 때임을 알려 준다. 폼폼과 늘 함께 있었던 시설 관리인 미르코 마르코비치를 찾아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그는 세 시간 넘게 공들여 트렁크 바퀴를 고쳐 주었다. 미르코의 노고로 마름돌이 단단히 박힌 유럽의 포장도로에서 바퀴 빠진 트렁크를 끄는 고역을 면하게 되었다. 이 신실한 보스니아인이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빌면서, 신학교의 정제된 평화 바깥으로 나와, 다시 세속의 버스에 올랐다.
중앙역에 내려 필라흐Villach행 열차 시각과 플랫폼 번호를 확인하고 역 광장에서 다리를 풀었다. 트렁크 두 개에 칠십 리터들이 배낭 하나, 그리고 백팩까지. 짐 가방 네 개를 들고 혼자서 두 달 넘게 걸었다. 여독이 쌓일 즈음 머문 잘츠부르크는 축복이었다. 청명한 가을 날씨에 클림트가 반한 아터 호수 물빛을 고스란히 눈에 담을 수 있었고, 음악제가 끝난 아쉬움도 미라벨궁 무료 연주회로 달랠 수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한적한 역 광장을 둘러보았다. 취리히에서 온 이후로 자주 드나든 탓인지 눈을 떼고 기차역으로 돌아서기가 쉽지 않다. 언젠가 이곳에 다시 들른다면, 그때는 음악제에서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듣고 싶다. 미적거리는 발걸음을 하루 종일 가야 할 먼 여정이 재촉했다. 이제 대주교의 도시를 떠나 방앗간 촌장님을 만나야 한다.
오늘 여정은 이렇다. 잘츠부르크에서 기차를 타고 필라흐로, 필라흐에서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의 우디네Udine로, 우디네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최종 목적지인 포르데노네Pordenone까지 가는 것이다. 잘츠부르크에 올 때는 취리히에서 동쪽으로 길게 가로질러 왔지만, 필라흐로 갈 때는 잘츠부르크에서 남북을 관통해서 지난다. 오스트리아가 스위스에서 슬로베니아에 걸쳐 있는 알프스 산맥의 한 가운데 있다면, 잘츠부르크는 그 오스트리아 영토의 중앙에서도 독일에 가까운 북쪽에 있다. 지금 기차를 타고 가는 필라흐는 잘츠부르크 맞은편 남쪽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이다. 이곳에서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로 가는 도로가 나뉜다. 나는 필라흐 서쪽을 크게 돌아 우디네로 들어갈 예정이다.
번화한 잘츠부르크에서 남쪽 변경으로 향하는 손님은 많지 않았다. 여행 중에 만난 가장 한가한 열차였다. 햇볕 드는 창가에 널찍하게 자리를 잡았다. 도심을 벗어나자마자 골짜기 사이를 내달린다. 창틀에 턱을 괴고 이쪽저쪽 번갈아 보아도 깎아지른 산뿐이다. 계곡 물빛은 흐릿한 하늘색이나 녹색이다. 알프스 전체가 석회암 덩어리라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지금보다 훨씬 가혹한 환경에 놓였을 할슈타트 고대인들이 새삼 경이롭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산비탈에서 유유히 풀을 뜯는 소떼나, 어쩌다 보이는 인가에서 사람 사는 흔적을 찾다 보면, 기차는 어느새 사람 없는 산골 마을에 도착해 있다. 남북으로 골짜기를 이어서 낸 철도는 의외로 짧아서, 두 시간 반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작은 산골 마을의 중앙역을 빠져 나왔더니 날은 벌써 한낮이다. 오른편 버스 승강장 앞으로 배낭을 멘 사람들이 보인다. 대부분 베네치아까지 가는 장거리 여행객들이었다. 경유지인 우디네까지 가는 표를 사고, 승강장 앞에서 잠시 기다리다 이층 버스에 올랐다. 운 좋게도 화장실과 가까운 일층 창가가 내 자리였다. 이 고개를 넘으면 지중해가 펼쳐진다. 두 세계의 경계로 향하는 버스에는 아쉬움과 설렘이 뒤섞여 있었다. 출발한 지 이십여 분,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의 압도적인 산등성이가 드러났다. 불쑥 솟은 땅 덩어리가 코끼리 등처럼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등줄기를 따라 비스듬히 돌아가는 가파른 도로는 뭐라도 붙잡지 않으면 곤두박질칠 것 같은 심한 공포를 일으켰다. 기차를 타고 왔더라면 겪어보지 못했을 아찔한 질주가 한 시간 정도 계속되다, 갑자기 완만하고 평탄한 구릉이 장애물 없이 펼쳐졌다. 낭떠러지 같은 석회 산맥과 거기서 흘러내린 퇴적물이 평원을 이룬 극단적인 지형이었다. 도로 옆으로 줄지어 선 포도나무에 긴장이 풀릴 때쯤 오래된 중세풍 도시에 진입하는데, 그곳이 우디네이다.
힘겹게 도착한 이탈리아의 첫 도시였지만, 우디네는 스치듯 지나쳐 남은 기억이 많지 않다. 살갗을 파고드는 따가운 햇살과 서둘러 찾아든 역사 안의 시원한 냉기, 통일호 열차를 떠올리게 하는 네모난 녹색 열차 정도가 남아 있다. 다만, 도시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무너진 건물 잔해는 비교적 생생하게 떠오른다. 허물어진 채 그대로 쌓여 있는 담장 벽돌, 그을려 매달려 있는 창틀, 지붕도 없이 버려진 집들은 여행지에 흔한 풍경이 아니었다. 중세를 풍미하던 도시의 영락한 듯한 인상이 내내 의아했지만, 내력을 알아볼 시간도 없이 환승 열차에 올랐다. 떠나는 기차에서 만난 왁자한 풍경도 남은 기억 가운데 하나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의 뜻 모를 재잘거림을 노래 삼아 들으며 이탈리아에 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기차는 매끈하게 이어지는 포도밭 사이를 내달려 정거장 몇 개를 지나 작은 역 플랫폼 위에 늘어진 그림자 하나를 부리고 떠났다. 하루를 다 쓴 긴 여정의 끝, 포르데노네에 도착했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먼 길을 마치고 메노키오가 살던 곳 지척에 당도한 이 밤을 자축하고 싶었다. 숙소에 올 때 택시를 타고 온 길을 거슬러 불 꺼진 상점들이 늘어선 중심가를 무작정 걸었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가 불이 환하게 밝혀진 시청 시계탑 앞에서 멈춰 섰다. 문을 닫은 상점들이 많아 시계탑 주위를 빼면 어둑했지만, 군데군데 식당 불빛이 밝힌 밤거리는 홀로 걷는 동양인에게도 편안하고 넉넉했다. 돌아가는 길에는 두리번거리다 우연히 접어든 골목 끝 식당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었다. 이 지역 전통 음식이라는데 얇게 썬 갖가지 햄에 치즈를 얹었다. 스파게티와 이 지역 포도주까지 곁들여 푸짐하게 먹고,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이탈리아에서 첫 밤을 보냈다.
내일 찾아갈 몬테레알레Montereale(현재 지명은 몬테레알레 발첼리나)는 숙소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다. 이제 메노키오와 그의 삶을 세상에 알린 책 한 권을 이야기해야겠다.
메노키오의 이름은 도메니코 스칸델라이다. 사람들은 그를 메노키오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1532년에 태어나 1599년 죽기까지 거의 평생을 몬테레알레에서 살았다. 방앗간 주인이자, 몬테레알레를 포함해 인근 다섯 마을의 촌장이었고, 교구 행정관도 역임할 만큼 사람들의 신망도 두터웠다. 그의 나이 오십이 넘은 어느 날, 삼십 년 전부터 마을 사람들과 주고받은 말이 빌미가 되어 종교 재판소에 이단으로 고발되었고, 1584년과 1599년 두 차례 재판에서 각각 이단자, 배교자라는 판결을 받고 결국 화형에 처해졌다. 평범한 방앗간 주인이자 농부가 맞이하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한 죽음이었지만, 메노키오의 삶은 자신이 혼자서 읽고 생각한 끝에 찾아낸 더 고귀한 것들로 향해 있었다.
“제가 생각하고 믿는 바에 따르면, 흙•공기•물 그리고 불, 이 모든 것은 혼돈 그 자체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하나의 큰 덩어리를 형성하는데 이는 마치 우유에서 치즈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구더기들은 천사들입니다.”
위 문장은 메노키오가 책에서 얻은 지식을 일상생활의 토대 위에 독창적으로 재구성한 우주관을 담고 있다. 초등학교 수준의 기초적인 라틴어를 익힌 것이 전부인 방앗간 주인의 생각은 이단 심문관들을 놀라게 할 만큼 자신만만하고 설득력이 있었다. 평생 방앗간 주인이자 농부로 살아 온 그가 상층문화의 언어를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은 인쇄술의 발전 덕분이었다. 더 나아가, 책에서 얻은 지식에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판단으로 종교 권력과 세속 권력이 농민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구조를 통찰하기에 이르렀다. 성모 동정녀설을 거부했고, 교황을 부정하고, 성사와 세례를 상업적 발명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했으며, 성서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세 개의 반지 비유로 종교의 동등성까지 주장했다. 종교 개혁이라는 당대의 열망은 평범한 방앗간 주인도 자신이 깨달은 것을 마을 사람들과 토론하고 나눌 수 있는 용기의 원천이었다. 메노키오는 지식을 독점한 권력의 부당함과 자신이 깨달은 지식을 공유하는 것의 사회적 의미까지도 각성하고 있었다. 그는 다만 숭고한 것을 추구한 기독교인으로 살고자 했고, 부정하고 허식이 넘치는 교회를 넘어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삶의 방식을 원했을 뿐이었다. 종교 개혁에 맞선 로마 가톨릭의 반종교개혁 폭력이 마녀 사냥과 종교 재판으로 관철되던 시대에, 더 고귀한 것들을 향한 메노키오의 꿈은 화형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방앗간 주인, 도메니코 스칸델라는 지배 계급의 역사에서는 이름도 없는 사람이었다. 메노키오의 삶과 그의 이름이 부활한 것은,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가 출간된 뒤였다. 1976년 출간 이후, 미시사의 방법론을 제시한 책으로 호평 받았고,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은 미시사의 고전으로 세계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다. 1970년대 태동한 미시사는 지배 계급의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개인이나 공동체의 역사를 복원하여, 거시사가 놓친 역사의 복잡다단한 구체성을 드러내는 성과를 올리고 있다. 진즈부르그는 자신의 대표작이 된 『치즈와 구더기』에서 메노키오의 삶을 “기록 문화의 언어로부터 ••• 구전 문화의 언어를 분리시키는 중요한 역사적 도약을 경험한 첫 번째 인간의 삶”으로 규정하고 있다. 진즈부르그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방앗간 주인의 삶을 되살리기 위해 메노키오의 심문 기록을 추적하고, 몇 권 되지 않는 도서 목록을 그가 살던 시대에 비추어 해석하고, 교황의 명령 아래 그의 사형 집행을 독려한 두 차례 서한까지 추가한다. 메노키오의 마지막 탄원서에서는 자비를 바라는 애처로운 간구 너머로, 자식에게도 마을 사람들에게도 버림받은 그의 상처와 고독까지 읽어낸다. ‘실마리 찾기’라는 진즈부르그의 탁월한 추론적 상상력이 없었더라면, 거대한 폭력 앞에서 무력하게 스러져 간 메노키오의 삶과 이상은 여전히 조르다노 브루노나 몽테뉴의 것으로 알려져 있을지 모른다. 메노키오는 곧 나의 이름이자 기록되지 않을 우리 모두의 삶이었다.
목적지와 이름을 같이하는 숙소 앞에서 버스를 탔다. 나는 지금 몬테레알레로 가고 있다. 버스 안에는 토요일이어선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학생들이 많았다. 뒤쪽에 자리를 잡고 학생들을 따라서 안전벨트도 맸다. 포르데노네를 출발한 버스는 비스듬히 북서쪽으로 꺾어 우람한 산과 평지가 맞닿은 산자락으로 향했다. 몬테레알레는 이 산자락 맨 위쪽에 있다. 아이들이 내리고 버스가 출발하는 정류장이 여러 차례 지나갔지만, 내 기억에는 아비아노와 그리초 정도뿐이다. 아비아노는 생각보다 규모가 커서 놀랬고, 그리초는 딱히 표지판이 없었지만 몬테레알레와는 아주 가까웠다. 한쪽으로 보이는 능선을 따라 드문드문 이어지는 농촌 마을을 한 시간 가까이 달려 좁다란 마을길로 들어섰다. 스칸델라라는 이름을 건물 외벽에서 얼핏 본 것 같고, 휴대전화 지도 좌표도 여기가 몬테레알레라고 알리고 있었다. 분명히 내려야 했는데, 그만 지나치고 말았다. 안전벨트가 화근이었다. 어느 정류장인지 망설이다 안전벨트를 더듬는 사이에 버스는 떠나고 있었다. 차분히 안전벨트를 풀고 다음 정류장에서 내릴 채비를 갖췄지만, 순식간에 마을을 빠져나간 버스가 계곡을 가로질러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당황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내리겠다는 신호를 보냈지만, 다리를 건넌 버스는 회전교차로에서 빙그르 돌아 다시 우측으로 꺾은 뒤 멈춰 섰다. 유럽에서 보내는 칠십 일째, 처음으로 길을 잃었다.
거리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이따금 개 짖는 소리만 들린다. 이 낯선 곳은 어디인지, 당혹스럽고 난감했다. 위치를 봤더니 첼리나 계곡을 사이에 두고 몬테레알레 맞은편에 있는 마니아고였다. 마니아고는 메노키오가 첫 재판에 앞서 이단 조사를 받던 곳이다. 다행히 왔던 길 끝으로 몬테레알레가 있는 산등성이가 보여 반대쪽에서 버스를 타고 돌아가면 그만일 것 같았다. 길 건너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기를 이십 분, 버스가 오지 않는다. 외딴 마을에 주말까지 겹쳐 버스는 없다시피 했다. 걷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휴대전화 지도 안내로는 지금부터 한 시간 삼 분을 걸어야 한다.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뗐다. 오후 두 시, 뫼르소의 태양이 쏟아진다. 한동안 계곡으로 뻗은 도로에는 길 잃은 이방인과 그의 그림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조금 걷다보니 나무가 점점 많아지고 갓길이 사라졌다. 어쩌다 지나가는 차를 피해 조심조심 사오십 분을 걸었다. 잠시 나무가 사라지는 구간에서는 낙석방지용 쇠그물이 걸쳐 있었다. 석회 암반이 그대로 노출돼 조그만 돌멩이 소리에도 예민해지는 구간이었다. 메노키오가 살던 시절에도 이 길은 마니아고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자 가장 위험한 길이었을 것이다. 잰걸음으로 통과한 낙석 구간 끄트머리에 계곡을 잇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 다리 건너가 몬테레알레였다. 다리 앞에 이르러 초록빛 계곡물에 발길이 붙들렸다. 잠시라도 물속에 잠기고 싶었지만, 내처 다리를 건넜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줄지어 서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에 탄성이 터졌다. 나무를 따라 인가가 보였고, 더 깊숙한 곳까지 집들이 이어졌다. 계곡 길을 걸은 지 한 시간 반, 메노키오의 고향에 도착했다.
마을로 들어가기 전에 사이프러스 나무 앞에서 숨을 골랐다. 건너온 다리를 꼭짓점으로 계곡이 좁은 삼각형을 이루며 길게 퍼졌다. 마을이 선 지면에서 계곡 바닥까지는 꽤 깊었다. 계절이 가을로 접어들어 바닥이 드러났지만, 계곡에서 내려온 물이 첼리나 호수를 이룰 만큼 유량이 풍부한 곳이었다. 메노키오는 이 계곡 어디쯤에선가 방앗간을 돌리며 손님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마을은 산자락과 계곡 사이의 좁은 지면을 따라 길쭉하게 뻗어 있었다. 마을길을 따라 걷다가 들머리에서 식당이 보이자 바깥 그늘에 앉았다. 점심을 거른 채 한참을 걸어서 갈증과 허기가 밀려왔다. 늦은 점심으로 배를 채우고, 표지판이 가리키는 중심가를 향해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해가 지기 전에 메노키오의 흔적을 찾아야 했다.
마을 안길은 차 한 대 지날 정도의 골목이었고, 나무 덧창이 달린 야트막한 건물들이 돌담으로 이어져 있었다. 조금 길이 열린 곳에 여느 집들과는 다른 하얀 대리석 건물이 보였고, 뒤편으로는 중세에 종탑으로 쓰였을 시계탑이 서 있었다. 이곳은 메노키오가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한다고 꼽았던 권위의 주체였고, 실제로 당시 토지 대장에 대토지 소유주로 이름을 올렸던 산타 마리아 성당이었다. 조금 더 갔더니 안전벨트 때문에 지나쳤던 우체국 정류장이 나왔다. 몬테레알레에서는 비교적 널찍한 주차장이 마련된 공간이자 광장으로 쓰이는 곳이었다. 버스는 마을길이 협소해 광장을 사이로 오가는 길을 나눠 쓰고 있었다. 마을에 머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우체국 앞 꽃 가게에 들러, “메노키오”라고 물었다. 점원으로 보이는 어린 학생이 길 건너 삼층 건물을 가리켰다. 깊이 숨을 쉬고 천천히 길을 건넜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스치듯 읽었던 스칸델라라는 문구가 건물 이층 푯말에 적혀 있었다. 나는 도메니코 스칸델라 주민 센터(Centro Sociale D. Scandella)라고 쓰인 글씨 아래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메노키오는 여기 다시 살아 있었다.
도로를 마주하고 열려 있는 디귿 자 모양의 공공건물이었다. 포장돌이 깔린 건물 뜨락을 이리저리 서성이다 건물 정면 한쪽 유리창에 붙은 메노키오(Centro Sociale Menocchio)라는 이름에 눈길이 멈췄다.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었지만 문이 닫혀 있었다. 문 앞에 서서 머뭇거리는 동안 꽃 가게 학생이 아저씨 한 분을 모시고 다가왔다. 학생과 함께 온 분은 메노키오 문화원(Circolo culturale Menocchio) 원장님이셨다. 꽃 가게 학생은 마음을 다해 낯선 방문객을 돕고 있었다. 원장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했다. 알도 콜로넬로 원장은 직접 문을 열어 나를 안내했다.
문화원으로 쓰이는 작은 방에는 메노키오를 알리는 소책자들이 탁자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반대편 벽면에는 메노키오를 그린 수채화와 목탄화 몇 점이 걸려 있었다. 알도와 나는 『치즈와 구더기』 번역서를 모은 포스터 앞에 멈춰 섰다. 알도는 이미 스무 개 넘는 나라에서 번역서가 출간되었고, 마을을 다녀간 진즈부르그도 수차례 만났다고 했다. 책 한 권이 마을을 바꿨다며 진즈부르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나는 배낭에서 책 한 권을 꺼내 그에게 보여 주었다. 포스터에 없는 한국어 번역본이라고 말했다. 번역본을 건네받은 알도는 한국어로 번역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다음번 포스터에는 한국어판 표지도 꼭 실어 달라고 부탁드렸다. 알도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낯선 이를 몸소 맞이하는 그의 태도에는 진지함과 긍지가 배어 있었다. 메노키오가 꿈꾸던 ‘새로운 세계(uno mondo nuovo)’가 국적과 피부색, 빈부와 언어를 뛰어넘는 인류 보편의 가치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그가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니아고에서 걸어오는 바람에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인사를 나누고 문화원을 떠나는 내게 알도가 선물이라며 책 한 권을 건넸다. 『메노키오』라는 그림책이었다. 문화원 벽에 걸려 있던 메노키오의 그림을 그린 작가가 『치즈와 구더기』를 그림으로 엮은 책이었다. 책 선물에 이어, 오늘밤 그의 집에서 묵고 갔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청했다. 처음 만난 알도와 나를 잇는 언어는 메노키오뿐이었다. 알도는 내게 최고의 환대를 보내고 있었다. 메노키오가 화형을 당한 콘코르디아에도 가보지 못했다며 에둘러 사양했지만, 밤새 이야기 나누고 싶은 마음은 그와 같았다. 알도는 다음에 오거든 꼭 미리 알려 달라며 자신의 전자우편 주소를 적어 주었다. 나 또한 답례로 묵고 있는 숙소와 전자우편 주소를 알려 주었다. 작별 인사를 마치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에 꽃 가게에 들러 고마움을 전했다. 몬테레알레에 머문 짧은 순간을 감동과 경이로 채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 명민한 학생 덕분이었다. 해 질 녘 산자락을 따라 돌아가는 버스는 엷은 햇살을 받으며 새로운 세계로 떠났다. 그곳은 고작 2솔디 책 때문에 죽임을 당할 일이 없고, 종교적 신념 때문에 하비텔로를 입고 모욕을 당하지도 않으며, 상업적 발명품이 없어도 인간이 야수처럼 살지 않는 세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