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M. 콘포드가 논박한 투퀴디데스

- 콘포드, ⟪신화-역사가 투퀴디데스⟫(1907) 2장 번역과 해설

by 김요

[일러두기]


1. 이 글의 구성은 일러두기, 번역문, 주석, 옮긴이 해설 순으로 되어 있다.

2. 번역문의 대본은 F. M. Conford, ⟨Athenian Parties Before the War⟩⟪Thucydides Mythistoricus⟫(1907)이고, 본문의 주석은 후주로 처리하였다.

3. 번역문에 게재된 연대는 별도의 표기가 없는 한 대부분 공통력 이전(Before Common Era)을 뜻합니다.

4. 번역문 본문과 옮긴이 해설에 쓰인 고대 지명, 인명 등 고유명사 표기는 대본의 영문 발음을 따르지 않고, 대본이 가리키는 낱말의 헬라어 원전 발음에 따랐습니다. 그러나 한국어의 사용 환경에 이미 고착되어 언중에게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낱말은, 대본에 실린 영문 표기를 덧붙여 이해를 도모하였습니다(예: 쉬리아인들[Syrians]).

5. 헬라어 원문의 입실론 ‘υ’의 발음 표기는 국립국어원의 표기법을 따르지 않고, 헬라어 원문 기록의 식별력을 높이기 위해 ‘ㅣ’가 아닌 ‘ㅟ’로 표기하였습니다(예: 투키디데스→투퀴디데스).

6. 대본의 괄호 ‘()’는 번역문에 그대로 옮겼고, 대괄호 ‘[]’는 대본 이해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영문 표현을 옮기거나, 추가 내용을 기입하는 목적으로 쓰였습니다. 대본의 이탤릭체 낱말, 괄호로 묶이지 않은 헬라어 낱말은 굵은 글씨로 표기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이탤릭체 영문은 한국어와 병기하였고, 괄호로 묶이지 않은 헬라어 낱말은 저자의 의도를 반영하여 굵은 글씨로 그대로 옮기되, 발음과 한국어 뜻을 대괄호 안에 병기하였습니다.



[번역문]


전쟁 전 아테나이 정치 집단




아테나이 쪽에서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은 누구였고, 그들은 왜 전쟁을 일으켰을까? 누가 “라케다이몬인들의 공포심”을 야기해, 그들을 싸움으로 “내몰았을까?” 우리는 페리클레스가 했던 공식 발언의 이면을 살펴야 하고, 그가 힘을 합쳤던 다수파에 대한 분석을 시도를 해야 한다. 이제 투퀴디데스가 전하는 대로 “아테나이인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아테나이인들 모두가 페리클레스의 축도縮圖[miniature]는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전쟁 기간 아테나이 정치 집단의 상태를 다룬 글은 많았다. 당시 상태는 현존하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초기 희극에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대단히 중요한 한 가지가 쉽게 간과된다. 전쟁 기간 동안during 정치 집단의 상태가 전쟁 전before의 그것과는 매우 달랐을 것이라는 점이다. 해마다 감행된 앗티케 침공은 시골 인구의 아테나이 유입을 초래했고, 그 결과 정치 집단의 균형을 바꿔 놓았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우리에게 후자 즉, 변경된 상태만을 보여 줄 뿐이다.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는 사태가 벌어지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아울러, 과두주의자나 민주주의자 등, 사태와 무관한 용어의 사용으로 전체 논의를 흐리는 일도 피해야 한다.

신원미상 저자의 글, 『아테나이 정체政體에 관하여On the Athenian Constitution』(주석 1)에는 아테나이 데모스에 관하여 투퀴디데스의 책 전체에서 찾을 수 있는 것보다 몇 쪽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하면서, 구태舊態한 귀족정 지지자의 눈에 비친 각 정치 집단의 차이가 어떠했는지 보여준다. 그는 세 가지 대립을 활용한다. (1) 평민commons(δῆμος)은 태생이 좋은 사람들men of birth(γενναῖοι) 반대편에 선다─귀족이 통치하던 지난날의 향수. (2) 밑바닥 기능공들base mechanics(πονηροί,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원래 의미가 일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은, 단순히 “최고the best”(οἱ χρηστοί, 혹은 οἱ βέλτιστοι)라 불렸던, 여유 있고 교양 있는 계급에 반대한다. (3) 가난한poor(πένητες) 사람들은 부유한rich(πλούσιοι) 사람들이나 지위와 재력을 갖춘 사람들(δυνατώτεροι)과 대비된다.

이러한 구분이 정치 체제에 따른 것─민주정 지지자 대對 과두정 지지자─이 아니라, 계급 이해─가난한 사람 대 부자─에 따른 구분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저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준다고 민주 정체를 비난하고 있으며, 전쟁 관점에서 정치 집단을 구분하는 것도 대체로 고려하지 않고 있다. 전쟁 상황은 이해관계에 따라 상이한 갈등을 불러온다. 시골과 도시의 대립은 여기서 중요해진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의 구분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전시戰時에는 시골 사는 부자, 가난한 사람 모두가 도시 사는 부자, 가난한 사람 모두에게 등을 돌리면서 어느 정도 위험을 공유했다.

동일한 저자(주석 2)가 전쟁을 말하면서 이르되(페리클레스가 말한 내용 대부분, 투퀴디데스, 1권 143장), “아테나이가 단지 섬이라면, 침략자들에게 영토를 유린당하더라도 도망갈 수 있다. 실제로, 농부와 부자(οἱ γεωργοῦντες καὶ οἱ πλούσιοι)는 적의 습격을 몹시 두려워한다. 반면에 민중은(ὁ δῆμος), 잃을 것이 없기에, 평온하게 산다.” 이 구절에서 “민중”─이런 용어는 의미가 매우 유동적이어서(주석 3)─은 도시의town 가난한 사람을 뜻하는데, 이는 대지주(πλούσιοι)든 소농小農(γεωργοῦντες)이든, 토지 소유자와 대비된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주석 4)에서, 동일한 계급 즉, 도시 민중은 “가난한 사람”으로 불린다. 우리는 바로 이런 시골과 도시의 대립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기록에 의하면, 지주들의 힘은 매우 컸다. 투퀴디데스(주석 5)는 시골 사람들이 아테나이로 소개疏開하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그들에게는 이것이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아테나이인들은 다른 어떤 헬라스 사람들보다도 늘 땅에서 먹고 사는 데 익숙했기 때문이다. 테세우스에 의해 단일 πόλις[polis, 도시국가]로 통일되긴 했지만, 그들 대부분(οἱ πλείους)은 이번 전쟁 직전까지도 오랜 관습에 따라 시골에서 살았다. 페르시아 침공 뒤에 시골집을 막 복구했는데, 이제 오래된 삶의 방식을 버리고 그들에게는 도시와도 같은 마을을 떠나라는 것이었다.

“가난한”이란 말이 도시 대중을 가리킬 때 특별히 사용된 것에서 암시된 것처럼, 시골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잘살았다. 대지주들은 노예 노동으로 농장을 경영했고, 심지어 소농들도 노예 한둘은 두고 있었다.(주석 6)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이 필요한 양을 대기에는 충분하지만, 주로 수입에 의존하는 도시까지 공급하기엔 부족한 정도의 곡물을 재배했다. 과일과 채소는 아테나이 시장으로, 올리브유는 바다 건너로 보냈다. 이 계급은 교역이나 제국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고, 전쟁이 터져 올리브나무가 쑥대밭이 되면 전부를 잃는 사람들이었다.(주석 7) 그렇다면 수가 그렇게 많았는데, 왜 그들은 전쟁을 막지 못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그들의 지도자들 즉, 토지 귀족은 정치적 영향력이 거의 없었다. 전통적으로 과두정 지지자들인 그들은 라케다이몬 숭배와 민주정을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의심받고 있었다. 시골 사람들 대다수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아카르나이 구역민들처럼,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는 농사꾼들이어서, 거의 또는 아예 아테나이에 가지 않았다. 도시 생활이 주는 속박에 대한 그들의 염증은 디카이오폴리스의 불평에 그려져 있다.

들판을 부질없이 바라보다,
도시를 염오厭惡하여, 평화를 갈망하니,
내 가난한 마을과 농장으로 나 돌아가려네,
“여기 숯 사려!” 외친 적 없고,
“올리브 기름 사려!”도, “아무거나 사려!”도 없는,
그래도 내 원하는 것을, 기꺼이 또 공평히,
값을 치르지 않고도, 한마디 사겠다는 말도,
사라는 말도 없이, 내어 주는 그곳으로.(주석 8)

이소크라테스에 의하면, 많은 시민들은 심지어 축제에도 도시에 나오지 않았다. 그저 집에 머물며 시골에 사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했다.(주석 9)

“마라톤의 전사”들은 이제, 늘 그렇듯, 땅에 정착해 도시 사람들에 뒤처진 세대가 되었고, “민주적인” 페이라이에우스의 새로운 성장에 질색했다. 그들은 본연의, 반-페르시아 토대 위에서만 제국을 반겼고, 파르테논 신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동맹을 부당하게 이용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전통적인 정서에 따라, 스파르테인들을 적대하지도 않았다. 정계의 새로운 집단과도 접촉이 없어서, 자신들이 농장에 조용히 머물 수 있게 평화가 허락되기만 한다면, 그들은 정치적 결사結社에서 무시할 만한 요소였다. 아리스토파네스 작품에서는, 많은 것이 달라진 상황에서, 도시로 내몰린 것에 성이 나 있고 자신들의 집이 침략자들에게 약탈당하는 것에 격분하는 모습만 볼 수 있다. 좀 더 차분하고 앞을 내다보는 사람들이 화평파和平派에 합류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도시 빈민에 동화되어 갈 것이고, 폐허를 겪은 자포자기 심정에서 주전파主戰派에 힘을 보탤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전쟁 후에 시작되었고,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들의 수에 의한 위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쨌든, 시골 사람들은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 사람들을 찾으려면 도시를 주목해야 한다.

아테나이는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둘이었다. 5세기 정치의 새로운 요소는 페이라이에우스 항구였다. 항구는 테미스토클레스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그는 위험에 노출된 데다 모래로 뒤덮인 만灣이었던 팔레론항을, 악테 반도 맞은편에 바위로 보호받을 수 있는 항구로 대체했다. 항구는 요새화되었고, 신도시는 힙포다모스의 가장 선구적인 원칙에 따라 설계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작 즈음이면, 페이라이에우스 항구는 그리스 세계에서 주요한 상업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아테나이 몰락 이후에도 항구의 매년 수출입 교역량이 2,000탈란톤에 달했던 것으로 추산되었고, 따라서 전쟁 전에는 틀림없이 규모가 훨씬 컸을 것이다. 공통력 이전 510년부터 430년까지, 아테나이와 페이라이에우스를 합한 인구는 20,000명에서 100,000명으로 증가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증가는 주로 상업과 산업 인구의 페이라이에우스 항구 유입에 기인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물론, 새로 온 사람들은 외국인들이었다. 튀퀴디데스의 말처럼, 시민의 대다수는 시골 사람들이었던 반면, 대다수의 “거류외인居留外人”[resident aliens]은 다들 도시 사람들이었으며 부둣가에서 산업과 상업에 종사했다. 도시 인구에서 외국인 요소의 영향력은 명백한 자료가 있어도 종종 무시되고는 한다.

외국인 이주민 장려는 솔론에서부터 시작되었다.(주석 10) 그는 “앗티케는 토양이 척박하고 메마른데, 맞바꾸어 가져갈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런 곳에서는 해상 무역을 하는 상인들이 자신들의 물건을 매입하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에 맞춰 시민들의 관심을 제조업으로 돌렸다.” “그는 수공업이 명예로운 일로 간주되게 하라고 명령했다.” 그가 제정한 외국인 귀화법은 모종의 수공업에 종사하고자, 온 가족과 함께 아테나이로 이주한 사람들에게만 시민권을 부여했다. 그 법률의 의도는 이민자들을 저지하려는 데 있지 않고, 시민으로서 권리 획득이라는 희망을 줌으로써, 항구적으로 정착해 산업을 일으키도록 장려하는 데 있었다. 아테나이 토착 인구의 신규 충원은 6세기에서 5세기 내내 꾸준히 이루어졌던 것이 분명하다. 물론, 페르시아 전쟁 이전 아테나이로 이주한 외국인 가구는 5세기 말 무렵이면 아테나이에 상당히 동화되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대거 유입은 틀림없이 페이라이에우스 항구가 구축된 뒤였을 것이다. 480년에서 450년까지, 아테나이는 시민권을 제한 없이 승인했다. 페리클레스가, 이렇게 증가하는 외국 혈통의 침입에 놀랐던지, 귀화 조건을 까다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귀화하지 않은 외국인이라 해도, 산업 목적 덕분에, 여전히 시민만큼 자유를 누렸고, 법률의 보호도 받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에, 이런 조건의 성인 남성이 9,000명에 달했고, 가족을 포함해 30,000명의 외국인 인구를 형성했다. 정치적으로 동일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이 사람들은 동일한 사회 계급에 속했고, 시민권을 승인 받은 그 밖의 최근 이주민들과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졌다. 획득할 분명한 목표, 그 목표를 획득하는 수단에 대한 장사꾼 특유의 현실적인 감각으로, 이 외국인 인구는 최근 이주민들과 연합해 단단한 조직을 형성했다.

토박이 아테나이인들이 그들을 어떻게 여겼는지, 우리는 이소크라테스가 연설 중에 터뜨린 격분을 통해 알고 있다. 민주정 지배기 해양 제국 시절을 되짚으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주석 11) “어느 누가 우리 조상들의 극악무도를 참을 수 있었겠습니까? 전全 그리스에서 가장 게으른 악당들을 모아 삼단노선의 노꾼으로 삼고, 그 덕에 모든 헬라스인들의 혐오를 샀던 사람들을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사람들을 내쫓고, 자신들의 재산을 그리스에서 가장 저열한 깡패들과 나눠 가진 사람들을 누가 참을 수 있었단 말입니까!” “그분들은 공동묘지를 시민들로 채웠고, 씨족과 국가의 공공 명부는 외인들로 채웠습니다.” “한 도시국가가 행복하게 되는 때는, 무작위로 세상 모든 나라에서 온 사람들로 많은 시민을 끌어모을 때가 아니라, 다른 어떤 종족보다도 그 나라의 시작부터 살아온 원주민들을 지킬 때, 그제야 비로소 행복할 것입니다.” 그래서 크세노폰은 다른 나라에서 온 그리스인뿐만 아니라, 많은 프뤼기아인들, 뤼디아인들, 쉬리아인들[Syrians], 그리고 온갖 이민족도 거류외인에 포함된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인다.

이 불어나는 대중大衆 즉, 항구 도시에서 상업, 산업, 원양 항해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매우 중요하고도 갈수록 더 중요해지는 요소였을 것이다.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데, 한 귀족정 지지자의 경멸적 표현이 작품으로 남아 우리에게 전해져 있을 뿐이다. 그 사람들의 직업이 순수 아테나이 신사 나리의 역겨움을 샀는데, 이 분은, 솔론이 뭐라고 지시하건, 수공업은 단지 명예롭지 못하고 품위 없는 일 따위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마지막까지 인정하지 않을 테고,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은, 이 계급이 아테나이 정치에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결코 허락해서는 안 될 일은, 우리가 권위를 부여한 사람들의 선입관이 우리 자신의 관점을 왜곡하는 것이다. 선거권이 없는 외인들 가운데 몇몇 부유한 사람들은 매우 존경받았던 것이 사실이고, 동등한 조건으로 아테나이 귀족들과 어울렸다. 뤼시아스의 아버지, 케팔로스는 지식인 사회의 중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비록 정치적으로는 시민 생활에서 배제되긴 했어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 틀림없고, 또한 동등한 사회적 계급에 있는 시민 친구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자신들의 관심사를 표출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그들이 고용하고 있는 많은 수의 자유인 신분의 직공들─이들의 임금은 노예 노동과 경쟁하면서 억제되었다─에 대해 경제적인 지배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직공들 중 많은 사람들이 시민이었고, 따라서 민회에서 그들의 표는 노동하는 사람들을 “덕이 없는” 것으로 간주했던 귀족들의 표와 똑같이 간주되었다. 그들은 독립적인 데모스였다. 따라서, 만약에 직공들과 그들의 고용주들─직공들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안다면, 직공들은 투표하러 갈 수 있게 아침나절 휴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아테나이 정치에 등장한 새로운 세력이다. 이 세력은, 작품으로 알려진 상류 계급 작가들의 무시와 경멸을 받았지만, 조만간, 자신들의 영향력을 결정적으로 행사하게 되어 있다.

그들의 목표와 이상은 무엇이었을까? 우리에게 전해진 바로는, 그 계급 자체에 속한 누군가라도 자신들을 표현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그들의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의 진술로부터 충분히 추론할 수는 있다. 그들에게 제국은 제해권 즉, 교역의 주요 항로를 장악하는 것이자, 동맹들의 금전적인 공물貢物을 의미했다. 그 돈은 임금이나 수당의 형태로 자신들의 주머니로 들어갔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아슬아슬한 기아선상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데 보탬이 되었다. 앞서 언급한 『아테나이의 정체에 관하여On the Constitution of Athens』라는 글에서 잠깐 엿볼 수 있는데, 문학 작품으로는 이른바 경제적 고려사항을 다룬 드문 글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작가가 데모스에 가하고 있는 공격은 귀족들의 그저 그런 공격이 아니다. 그는 데모스가 나름의 관심사를 잘 알고 있고, 또 이익이 되는 쪽으로 경기를 잘한다고 파악했다. 비록, 경기는 야비한 데다, 선수들은 πονηροί[ponēroi, 악의적인]라고 여겼을 뿐이지만 말이다. 그에 따르면, “부는 모든 그리스인과 이민족을 통틀어 오직 아테나인들의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어떤 도시가 배 만드는 데 필요한 목재가 풍부하다면, 바다를 지배하는 세력을 설득하지(πείθει) 않고서 어떻게 목재를 처분할 수 있겠는가? 혹은 철이나 청동, 아마亞麻, 또는 배 만드는 데 쓰는 다른 어떤 물자라도 있다면. 우리는 이런 물자들을, 하나는 어떤 곳에서, 또 하나는 다른 곳에서 수입한다. 그러면서도 수출하는 도시들을 바다에서 쫓아내겠다고 협박해, 우리와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나라들이 필요한 물자를 수입할 수 있게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we will not allow other States, who are rivals, to import them, on pain of being excluded from the seas. 우리는 그저 하는 일 없이 집에 있으면, 이 모든 것이 바닷길로 우리에게 온다. 그러나 다른 어떤 도시도 한꺼번에 이 모든 물자를 가지지 못한다. 한 도시는 아마가 풍부하지만, 그 땅은 헐벗고 목재가 없다. 다른 도시는 철을 가졌지만, 청동이 없고, 등등. 오직 페이라이에우스 항구에서만 이 모든 물자를 구할 수 있다.”

우리가 거론하고 있는 계급은 아테나이 해군이야말로 그리스 해역에서 해상 운송 교역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있는 도구라고 여겼던 것이 분명하다. 세 가지 제국 지향 동기 중 세 번째─이익─가 이들에게는 지배적이었다.

페리클레스 사후, 클레온의 다수파가 주로 이 상업, 산업 계급 출신으로 채워졌다는 것은 애초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그들이 장사꾼들─가죽 장수, 꿀 장수, 치즈 장수─이라고 증언한다. 트뤼가이오스가 “농부, 상인, 목수, 직공, 외인, 타국인, 섬사람들”을 불러, 평화의 여신을 구덩이에서 끌어내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자, 농부들만 그 소환에 응할 뿐, 나머지는 아무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리스토파네스의 증언은 물론 훗날에 속하고, 벌써 전쟁은 첫 번째 단계를 지난 때였다.

고대 작가들이 남긴 인상은, 이 정파의 어떤 대표격 인물─이 계급 출신은 아무도─도 페리클레스가 죽을 때까지 표면에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인상을 준 책임은 주로 투퀴디데스에게 있는데, 그의 마음속에서는, 동시대인들의 마음이 그랬던 것처럼, 페리클레스의 죽음과 함께 한 시대가 끝났다. 그렇게 대단한 인물의 영향력이 사라졌을 때, 사람들에게는 민중이 중대한 변화를 맞이한 것처럼 보였다. 『아테나이 정체The Athenian Constitution』의 저자에 의하면, 페리클레스의 죽음이 있기까지, 민중의 지도자는 모두 존경할 만했다. 그 목록에는 크산티포스, 테미스토클레스, 에피알테스, 페리클레스─클레온, 클레오폰. 우리가 알기로는, 클레온은 무두장이, 클레오폰은 뤼라 제조공이었다. 근엄한 귀족 뒤에, 이 얼마나 대단한 추락인가! 그렇지만 그것이, 다음 설명에 보이는 것과 같이, 갑작스러운 추락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클레온은 “장사꾼 왕조”의 시조始祖가 아니었다. 뱃밥 장수요 밀기울 장수였던, “멜리테 출신 멧돼지,” 에우크라테스는 공금 유용에 대한 회계 조사 결과, 유죄 판결을 받고 아테나이 정계에서 물러났다─아리스토파네스 표현대로, “밀기울 가게로 감쪽같이 내뺐다.” 다음으로 양羊 장수 뤼시클레스가 있는데, 소크라테스의 제자 아이스키네스가 전하는 바로는, 페리클레스가 죽은 뒤 아스파시아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가 경멸 받아 마땅했다고 믿을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 클레온은 그 다음으로 상층부에 진입한 비공식 지도자였다. 그가 일찍이 431년에 페리클레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남아 있는 희극 단편斷片[cosmic fragment]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 그는 430~429년 겨울에 장군들에 대한 소송에서 고소인 역할을 맡았다. 투퀴디데스는 그에 대한 첫 언급에서 클레온을 일컬어, “그 무렵 민중의 신임으로는 단연 첫손에 꼽히던 사람”이라 했다. 이때가 페리클레스가 죽은 뒤 이 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임을 감안하면, 그는 오래전에 영향력을 행사할 토대를 닦았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클레온에 대해 알고 있는 거의 전부는 아리스토파네스나 투퀴디데스에게서 나온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곡은 전쟁을 개시하고 몇 년쯤 지난 때부터 시작한다. 투퀴디데스는 클레온이 공식 지도자이자 민중의 대변자로 나서기 전까지는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며, 에우크라테스는 이름 한번 부르지도 않고, 뤼시클레스는 거의 언급되지 않다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원정길에 오른 장군으로 딱 한 번 언급될 뿐이다. 우리는 이런 지도자들을 포함해, 이제 이름 말고는 거론조차 되지 않는 여타 사람들로 대표되던 이 계급이, 페리클레스 사후에야 비로소 중요하게 되었다는 추정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전쟁 전에는 시골 사람들이 정치적 요소가 아니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면, 페리클레스가 힘을 합해야 했던 대다수는 대개 이 상업과 산업에 종사하는 동일 계급으로 구성되었다는 분명한 사실을 알게 된다. 그가 두려워해야 했던 반대파는, 무기력한 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과두정 지지자”가 아니라, 민중 자체의 상층부에서 나왔다. 투퀴디데스라면 차마 입에 올리지도 않을 이런 천출의 장사꾼들이 민중을 이끌었다.

우리는 5세기 아테나이명역사를 일련의 격변으로 묘사했다. 이 격변의 마지막이 페리클레스를 이론의 여지없는 최고 권력으로 끌어올렸고, 동시에 정치 체제에 대한 문제도 매듭지었다. 민주주의는 달성되었으되, 개혁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럼에도 시간은 가만히 있지 않아서, 새 세대가, 새로운 목표와 권리를 요구하며, 페리클레스의 골칫거리로 성장하고 있었다. 평화 시기는 상업과 산업에 새로운 추진력을 제공했고, 그에 따라 페이라이에우스 항구는 아크로폴리스 아래 옛 도심을 능가할 만큼 규모가 커지고 있다. 이 벅적거리는 인구는 대개 외국 출생이거나 겨우 어제 귀화한 사람들로, 알크메오니다이가와 필라이다이가 사이에 대대로 내려오는 반목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은 토박이 시골 사람들과는 전통으로나 관심사로나 전혀 공통점이 없다. 시골 사람들은, 자기들 딴에는, 그들을 “뱃일하는 어중이떠중이,” “교양 없고 상스러운 패거리”라고 멸시한다. 그들은 한물간 반-페르시아 동맹의 이상에 대해 아는 바 없고, 아테나이를 헬라스의 학교로 여기는 페리클레스 시대의 이상에 하등 관심 없다. 페리클레스의 경력 후반부는, 그가 잘 구슬려야 했던 민중 대부분이 그의 고매한 생각에 공감하지도 않았거니와, 그의 장엄한 장례식 연설의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설명된다. 그 사람들은 페리클레스에게서 사회주의적 조치를 강제로 얻어냈다. 그가 동맹 재산을 웅장한 건물을 짓는 데 사용했을 때, 그는 두 가지 목적을 충족시켰다. 하나는 그 자신의 목적으로, 아테나이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위해, 다른 하나는 그 지지자들의 목적으로, 공공 기금을 통한 고용과 생계유지를 위한 것이었다. 그와 같은 명민한 타협으로 페리클레스는 그들을 장악할 수 있었는데, 그것도 일반 대중을 잘 이해하는 몇몇 사람이 나타나, 그들에게 호의로 부여된 것을 정당한 권리의 하나로 간주할 수 있다고, 민중에게 떠들어 대기 전까지 일이다. 자주적인 민중이 그들 자신의 힘을 깨닫게 되는 순간부터, 페리클레스는 그들이 가려는 대로 따라가든지, 아니면 주도하든지 해야 한다. 그는 군중을 앞장서 가든지, 아니면 발아래 짓밟히든지 하겠지만, 군중은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어디로? 장사꾼과 수공업자, 상업과 산업의 지도자, 무역상과 선장으로 이루어진 미천하고 말주변도 없는 이 군대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다음 장에서 답을 찾아보도록 하자.




[주석]


1) 위-크세노폰, 『아테나이 국가de republica Atheniensium』.

2) 위-크세노폰, 『아테나이 국가de republica Atheniensium』, 2장 14절.

3) 투퀴디데스, 2권 65장: 시골 인구에 한정해 말하면서, δῆμος를 소규모 경작지를 가진 소농[소작농]의 의미로 사용하고, 대토지 소유자인 οἱ δυνατοὶ와 구별한다.

4) 『여인들의 민회Ecclesiazusae』, 197행: τῷ πένητι μὲν δοκεῖ,|τοῖς πλουσίοις δὲ καὶ γεωργοῖς οὐ δοκεῖ. 참조) 플루타르코스, 「니키아스전」, 9장 4절: οἱ εὔποροι καὶ πρεσβύτεροι와 대부분의 οἱ γεωργοί는 평화를 선호했다.

5) 2권 16장.

6) 이런 이유로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인들을 대조적으로, αὐτουργοί라고 불렀다.

7) 자주 언급되는 곳: 투퀴디데스, 2권 62장, 65장[역자 주: 원문에는 72장, 75장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저자의 실수로 판단, 수정 게재한다]; 아리스토파네스, 「아카르나이 구역민들」, 182행, 232행, 512행; 「평화」, 628행 등등.

8) 아리스토파네스, 「아카르나이 구역민들」, 32행[33-6행]. 프레레[Frere, John Hookham: 1769~1846] 의 영문 번역.

9) 이소크라테스, 「아레오파기티쿠스Areopagiticus」, 52절. 참조) 에우리피데스, 「오레스테스」, 918행: ὀλιγάκις ἄστυ κἀγορᾶς χραίνων κύκλον,|αὐτουργός; 「탄원하는 여인들」, 918행: γαπόνος δ᾽ ἀνὴρ πένης,|εἰ καὶ γένοιτο μὴ ἀμαθής, ἔργων ὕπο| οὐκ ἂν δύναιτο πρὸς τὰ κοίν᾽ ἀποβλέπειν.

10) 플루타르코스, 「솔론전」, 22장.

11) 이소크라테스, 「평화에 관하여de Pace」, 79, 88, 89절.





[옮긴이 해설]


교역의 확대와 아테나이 민주주의의 변모

- 고전기 아테나이의 산업 발달과 민중 분석을 통한 민주주의 재해석



20세기 초에 출간된 위 번역문의 저자는 투퀴디데스가 오늘날 널리 알려진 대로 “과학적 역사학자”가 아니라, 그가 아무리 “최대한 엄밀히 검토한 다음 기술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할지라도 당대 헬라스인의 신화적 사고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남아 있는 고대 기록을 통해 논증한다. 필자가 게재한 부분은 투퀴디데스가 전쟁의 원인이라고 기록한, “아테나이의 세력 신장이 라케다이몬인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켜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던 것”이라는 진술을 반박하면서 실질적인 전쟁의 주체가 상업과 산업에 종사하는 도시 빈민 즉, 민중이었다는 점을 부각하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논지는, “그 계급 자체에 속한” 저자의 기록물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가 권위를 부여한 사람들의 선입관이 우리 자신의 관점을 왜곡하는 것”을 막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필자는 페이라이에우스 항구 구축과 그에 따른 외국인 인구의 대량 유입이 민주주의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21세기 민주주의의 향배를 간략하게 논하고자 한다.

고대 그리스의 긴 암흑기(12세기~8세기 BCE)가 기후변화에 의한 것이었고, 8세기 무렵 “강우량이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지중해 세계 전역이 생산력을 회복했다고 현대의 학자들이 밝히고 있다. 6세기 초 솔론의 개혁이 있기까지, 아테나이는 농업 중심 사회였다. “잉여물자”를 거의 기대할 수 없는 땅에서 비옥도에 따라 소출에 차이가 발생했고, 이 차이가 누적되어 가난한 농부는 채무를 상환하지 못해 대지주의 노예가 되거나 자식들을 팔아야 할 정도로 계급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에 솔론은 권력의 부분적 민중 이양과 함께, 부채 탕감, 통화 가치 절하라는 개혁 조치로 빚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한편, 교역의 기반이 되는 제조업 육성책을 법으로 제정했다. 뒤를 이어 19년 장기 집권한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의 제조업 기반 위에서 처음으로 도기와 올리브유를 수출하는 등 경제적 도약을 성취했다.

6세기 초에 있었던 아테나이 경제적 도약에는, 흑해 연안에서 생산된 값싼 밀수입이 배경에 놓여 있다. 곡물 수입은 채산성이 떨어지는 1차 산업에 후대의 ‘인클로저’에 버금가는 혁명적인 구조 조정을 초래했고, 여기에서 비롯된 연쇄적인 인구 이동이 아테나이의 전반적인 사회 구조에도 압력으로 작용했다. 대지주들은 “포도나무와 올리브처럼 수익성이 좋은” 작물에 집중했고, 농지를 잃은 대부분의 시민들은 도시로 유입되어 교역과 관련된 산업에서 임금 노동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솔론과,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연이은 개혁과 공공사업 발주, 제조업 육성 정책은, 처음부터 교역 확대로 졸지에 자영농에서 도시 빈민으로 추락한 다수의 민중을 기반으로 계획되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페이라이에우스 항구 구축은 외국인 인구의 대량 유입과 함께 아테나이가 해상 제국으로 나아가는 발판을 닦았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신항구 구축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플루타르코스의 말처럼, 아테나이를 이제 “육지가 아니라 바다에 의존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군사적으로는 전투의 주체가 중갑보병에서 삼단노선으로 변하는 것이자, 경제적으로는 상업과 산업이 농업을 대체할 규모에 이르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폭발적으로 증가한 ‘거류 외인’과 기존의 도시 빈민의 결합으로, 아테나이 정치에는 무시할 수 없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게 되었다.

페리클레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토대 위에 제국의 위세를 더했다. 저자가 말한 대로, “사회주의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사회 전반에서 민중(demos)은 중요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페리클레스가 반대파인 필라이다이가의 키몬과 멜레시아스의 아들 투퀴디데스마저 축출한 뒤 취한 왕정에 가까운 정책을 보면, 페리클레스가 민중을 중대한 의사 결정의 주체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수數’의 중요성에서 전략적으로 선택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제국 지향 동기” 가운데 “명예”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오직 “이익”에 추동되는 민중을 지지 세력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식민지 확보와 전리품 분배로 “테테스의 꿈”을 실현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솔론의 개혁에서 고전기 페리클레스까지, 아테나이는 농업국가에서 상업과 산업 중심 국가로 변했고, 정치적 중심도 귀족에서 ‘αὐτάρκεια’(autarkeia: 자급자족)를 상실한 도시 빈민으로 옮겨졌다. 고전기 아테나이 민주주의의 토대는, “초기 자본주의”와 유사하게도, 상업과 산업 자본가들이 노예를 투입해 자유인의 임금을 억제하면서 형성된 다수의 도시 빈민이었다. 이들은 나날이 궁핍했고, 그날그날의 생계유지에서 벗어나 사유지를 전리품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식민지 전쟁에 우호적이었다. 페리클레스 시대에 민중은 “다수에 의한 참주정”이라고 불릴 만큼 압도적인 수로 어떠한 공적 가치보다 우위에 있었다.

오늘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확대와 포퓰리즘 정치가의 득세는, 불과 2,400km2정도인 고대 도시국가의 직접민주주의와 대중 선동 정치가 부활하는 기시감을 떨칠 수 없게 한다. 현대 사회의 물적 토대인 자본주의가 심화될수록 대중의 관심이 ‘사적 이익’에 제한되어, 그만큼 ‘수의 정치’에 매몰될 가능성도 커진다고 할 수 있다. ‘평등’의 구호 아래 시작되었던 솔론의 개혁처럼, 사적 이익을 넘어서는 초월적 가치가 부재하다면, 선동과 광기에 휩싸여 전쟁으로 내달렸던 고대의 소극笑劇이 반복될 것은 자명하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가 추동하는 ‘탐욕’을 제어할 새로운 가치 체계를 민중 스스로 도출해내지 못한다면, 헬드가 주창한 세계시민 민주주의도, 기후 위기에 직면할 생태민주주의도, 적정기술을 외쳐야 할 과학기술 민주주의도, 그 밖의 어떤 ‘민주주의’도 초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합리적인 의사 결정 체계로 소환될 리는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참고문헌]


<1차 문헌>

크세노폰. 2012. 『헬레니카』. 최자영 옮김. 서울: 아카넷.

투퀴디데스. 2011.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천병희 옮김. 고양: 도서출판 숲.

플루타르코스. 2010.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천병희 옮김. 고양: 도서출판 숲.

헤로도토스. 2009. 『역사』. 천병희 옮김. 고양: 도서출판 숲.


<2차 문헌>

데이비드 헬드. 2010. 『민주주의의 모델들』. 박찬표 옮김. 서울: 후마니타스.

민주화운동기념사회회 연구소 엮음. 2007. 『민주주의 강의 1-역사』. 서울: 민주화운동기념사사업회.

페르낭 브로델. 2012. 『지중해의 기억』. 강주헌 옮김. 파주: 한길사.

폴 우드러프. 2012. 『최초의 민주주의』. 이윤철 옮김. 파주: 돌베개.

폴 카틀리지. 2019. 『고대 그리스』. 이상덕 옮김. 파주: 교유서가.

H. D. F. 키토. 2008. 『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 박재욱 옮김. 서울: 갈라파고스.

로베르 플라실리에르. 2004. 『고대 그리스의 일상생활』. 심현정 옮김. 서울: 우물이있는집.

브라이언 페이건. 2007. 『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 남경태 옮김. 고양: 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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