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5세 반려묘 '앨리' 이야기
2020년 8월 12일로 다섯 살이 된 고양이 앨리와 함께 살고 있다. 길거리 출신임에도 태어난 날이 저렇게나 명확한 이유는 내가 생일을 지어냈기 때문. 처음 이 친구를 길에서 발견한 분의 말로는 7월 말쯤에 태어난 것 같다고 하셨는데 이름인 '앨리'와 어감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나름 신중하게 생일을 만들어줬다. 앨리 애리 이리 일리 일이... 12일 헤헿.
앨리를 처음 만난 2015년 초겨울쯤 나에게 고양이를 키울 운이 한꺼번에 들어왔었다. 회사 동료가 아기고양이를 얼떨결에 데려오게 되었는데 까탈스러운 반려견과 어울리지 못해 다른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고, 앨리는 모시던 회사 이사님이 길에서 데려온 친구였는데 한참 나이 많은 오빠 고양이들 등살에 못이겨 사무실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내 인생에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는데 앨리의 사진을 보자마자 알 수 없는 기운에 휩쓸려 보러 가겠다 약속을 잡았다. 분명히 한 번 보기만 한다고 말씀드렸었는데 이사님은 사료부터 모래, 화장실, 스크래쳐까지 앨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두셨고, 나는 그 길로 앨리와 함께 차에 실려 우리 집으로 옮겨졌다. 그렇게 앨리랑 오늘부터 1일.
나는 고양이에 대한 지식이 1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당장 밥을 얼만큼 줘야하는지도 몰라서 유명한 고양이 커뮤니티에 가입해서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이야기를 엿봤다. 우리 집 누구가 이런 구토를 했어요, 설사를 했어요 부터 시작해서 투병일기와 같은 범접할 수 없는 이야기까지 고양이와 함께 사는 사람들의 고충이 그대로 녹아있는 곳이었다. 몇 가지 글을 읽고 난 뒤 깨달았다. 이사님은 앨리를 애교쟁이라고 소개했었는데 사실은 예민한 고양이과 동물 중에서도 보스급으로 예민한 친구였다. 우리 집이 낯설어서 그런지 침대 밑에 들어가 반나절을 꼼짝않고 버티다가 새벽에나 나와서 사료와 물을 먹고, 볼일을 보고 다시 침대 밑으로 들어가는 생활을 며칠했다. 배를 깔고 침대 밑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내가 불쌍했는지 일주일만에 침대 위에 올라와 함께 잠을 자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앨리선생님.
고양이와 함께 사는 것은 생각보다 결단이 필요한 일이다. 모든 결단의 과정을 100이라고 놓고 봤을 때 키우기까지의 결단은 1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사료부터 간식까지 종류가 무궁무진하고, 가격도 천차만별인데 입맛에 맞는 먹거리를 찾기까지 다양한 것을 먹여보느라 통장을 탈탈 털리는 일도 부지기수이고, 강아지와는 다르게 배변패드가 아닌 화장실을 준비해줘야 하는 친구들이라 화장실의 크기나 종류부터 고양이에게 맞는 모래를 고르는 일까지 정말 많은 선택과 결정이 필요하다. 물론 그 결정에는 대가가 따른다. 금전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 내가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비교해가며 고른 이 간식을 마음에 들어해줬으면 좋겠는데 먹지 않는다거나 쓰지 않을 때 그 감정. 미안함과 짜증이 섞인.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앨리와 살면서 가장 큰 결단이 필요했던 일은 쉬야사건이다. 책상에 앉아 일을 하는데 뭔가 느낌이 쎄해서 침대 위에 있는 앨리를 봤더니 이불에 쉬를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고, 청각이 예민한.. 온 감각이 예민한 앨리는 내 소리에 놀라 쉬를 멈추지도 못하고 온 집안을 뛰어다녔고, 나는 강제로 대청소를 해야했다. 한 번에 끝났다면 '쉬야사건'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응가는 화장실에서 잘 보면서 쉬야만 이불에 해결했다. 밤마다 코인빨래방에서 이불빨래를 해야했고 이윽코 침대 매트리스에 난리를 치면서 나는 울어버렸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앨리를 붙잡고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물어봤다. 동그랗고 노오란 호박보석같은 눈알을 요리 굴리고 조리 굴리며 내 눈치를 보는 녀석을 부둥켜안고 몰라줘서 미안하다고 소리쳐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새벽 2시에 24시동물병원으로 달려갔다. 초음파 상으로 방광염이 의심된다고 했지만 소변실수를 할 만큼의 상태는 아니라고 화장실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으니 다양한 시도를 해보아야 한다고 하셨다. 야간진료비 20만원. 화장실도 더 큰 걸로, 모래도 유명한 모래들로 다시 바꿔가며 테스트를 해봤고 지금도 나는 앨리의 쉬야크기에 집착하고 있다. 이불빨래는 더이상 하고 싶지 않아 앨리야.
나는 매일 아침 출근할 때 앨리에게 잘갔다 오겠다 밥 잘 먹고 있으라 인사를 하고, 퇴근하면 다녀 왔다고 인사를 한다. 앨리도 출근하는 나를 보며 잠이 덜 깬 부스스한 모습으로 눈인사를 해주고 가끔 현관문까지 배웅을 하기도 하고, 퇴근하고 돌아오면 배를 벌러덩 까고 뱅그르르 몸통돌리기를 하거나 종아리에 머리를 부딪히고 하염없이 부비적거리기도 한다. 앨리가 쉬야사건을 다시 발발하지 않는 이상 우리의 하루는 문제없이 흘러간다. 그런데 동거인이 집을 오래 비우게 되면 동거묘에게 일이 생긴다. 녀석을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것. 혼자 사는 사람들이 외롭다는 이유로 반려동물을 키우는 일이 참 많아졌는데 해마다 해외로 긴 시간 휴가를 가고, 주말엔 산과 바다로 떠나는 삶을 살고 있다면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특히 고양이는 외로움을 타지 않는다는 말때문에 혼자 둬도 괜찮다는 인식이 있는데 아니다. 고양이도 외로움을 느낀다. 매우 많이.
유난히 퇴근이 늦어진 날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달려나와 하루종일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것처럼 야옹야옹 한참이고 수다를 떨고, 옷도 갈아입기 전에 안아달라 만져달라 한참을 보챈다. 물론 고양이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느껴진다. 나를 기다렸구나. 내가 오기만을 하루종일 기다렸구나.
나는 친구도 만나고, 가족을 보러 본가에 내려가기도 하고, 좋은 곳으로 경치 구경도 가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차를 타고 이동하지만 앨리의 세상에서는 내가 가족이고, 친구이고, 전부다. 우리 집 네모난 창문 밖의 풍경이 앨리가 볼 수 있는 전부다. 내가 돈이 많았더라면 더 큰 창이 있는 집으로 갈 수 있을텐데, 신나게 뛰어다닐 수 있는 넓은 집을 살 수 있을텐데, 앨리도 앨리 방을 가질 수 있을텐데. 좁디 좁은 집에서 하루종일 나만 기다리게 하는 일을 해야하는 나의 고양이에게 늘 미안하다.
사진에서 잘 티가 나진 않지만 앨리는 구조될 때부터 앞발이 불편한 친구였다. 사고가 난건지 기형인건지 사람으로 치면 발목부터 발가락까지의 뼈가 제대로 자라지 않아 거의 근육에 의존해서 걸어다닌다. 뛰어다니기도 하고, 점프도 하고, 가끔 간식을 갈구할 때 조금 더 절뚝거리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병원에서는 앨리가 아파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치료나 수술을 하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살아가는게 좋겠다고 했다. 괜찮다 말씀하지만 집사인 나는 앨리가 절뚝이며 걸을 때마다 마음이 저린다. 나때문에 아픈게 아닌데도 그저 미안스럽다. 그치만 내가 우울하거나 슬퍼하면 우리 눈치빠른 고영희님이 내 눈치를 살피기 때문에 더욱 더 밝게 앨리를 부른다.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반려동물을 부를 때 목소리를 들어보았을까? 어디서 그렇게 사랑스럽고 밝고 맑은 목소리가 나오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얼마나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들을 부르는지. 친구들은 앨리를 부를 때 내 목소리가 가증스럽다고 하지만 나도 모르게 혀가 짧아지고, 재수없어 보일 정도로 목소리가 높아지고, 눈이 반달로 접혀서 앨리를 부른다. 오구오구 우리 앨리 와쩌여 이런 말투는 덤이다.
고양이구조단체가 아닌 이상 SNS에 올라오는 고양이 사진은 다들 귀엽고, 행복하고, 탈없이 잘 크는 사진들이다. 나역시 그렇다. 앨리가 예쁘고 귀엽게 나온 사진을 골라 색보정을 하고 인스타그램에 올리며 여러 가지 해시태그를 붙인다. #캣스타그램 #육묘일기와 같은. 매일 24시간 365일 귀엽기만 할까?
동그랗고 귀여운 생명체의 사진 이면에 보이는 것들은 키워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앨리는 검정색을 포함해 어두운 색 옷을 입지 못할 만큼 털이 많이 빠진다. 옷장에 넣어둬도, 새 옷을 꺼내 입어도 어딘가에 묻어있다. 회사에 가져가는 도시락에도 앨리털은 덤으로 들어가있을 정도다. 화장실을 하루라도 치워주지 않는 날에는 냄새가 어마어마하다. 사료며 간식이며 한달에 들어가는 고정비만 해도 사람만큼이다. 그치만 이런건 SNS에 올리지 않는다. 안 행복해보이니까.
고양이와 함께 사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면 반드시 내 통장이 안전한지, 우리 집 그 친구에게 편안한 상태인지, 내가 이 친구의 평생을 책임질 수 있는지, 매일매일 케어해줄 수 있는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한다. 나는 그런 고민을 할 시간도 없이 앨리를 데려왔기 때문에 처음 고양이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 정말 많은 고생을 했다.
손가락을 물려서 피도 철철 흘려봤고, 사료가 맛없어 밥그릇을 뒤엎어놓는 녀석때문에 마음 고생도 했고, 쉬야사건은 말할 것도 없으며, 오래 집을 비워둘 때 호텔에 맡기거나 친구에게 부탁하면 여행이 여행답지 못했다. 앨리는 잘 있는지, 밥은 잘 먹고 있는지, 숨어서 안 나오지는 않는지 걱정에 걱정이 꼬리를 문다.
"유기견 한 마리를 데려온다고 세상이 바뀌진 않겠지만 그 개에게는 세상이 바뀌는 일이다"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한 친구의 세상이 바뀌는 일에 쉬운 결정을 해서는 안된다.
나도 앨리를 키우며 책임감 비스무리한게 생겼다. 나만 보고 살아갈 이 친구의 세상이 조금 더 편하고, 예쁘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