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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막삼 Aug 22. 2020

자기소개는 항상 어렵다.


Let me introduce myself
안녕하세요. 어디 사는 몇 살 누구입니다. 


서른 중반쯤 되니 일어나서 자기소개 하는 일이 거의 없다. 아주 가끔 업무 미팅으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 '어느 회사의 누구입니다' 정도가 내 자기소개의 전부인 것 같다. 이름보다 직위로 불리는 일이 더 익숙하고, 직업이 아닌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기가 참 어렵다. 내가 이렇게 특색이 없는 사람이었나? 


얼마 전 영화 한 편을 보고 느꼈던 감정이나 인상 깊었던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사전 안내사항에 자기소개 시간이 있고, 나이나 사는 지역 등을 언급하지 않고 자신을 소개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고민했다.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소개해야 할까?



자기소개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다가도 이불을 걷어차는 순간이 떠오르는데 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의 내 자기소개다. 비슷한 또래, 서로 모르는 수십 명의 아이들이 강의실에 모여 학생회 이야기를 듣고는 학번순서대로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다. 모두 웅성거렸다. 평범한 소개들이 이어졌다. 다른 지역에서 온 친구들은 고향을 밝혔고, 같은 지역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친구들은 잘 지내보자라는 말로 소개를 퉁쳤다. 하나둘씩 독특한 소개를 한 친구들도 있었는데 문제는 나였다. 내 순서가 다가올수록 식은땀이 흐르고 손이 저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요동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에 정리가 되지 않은 채로 강단 앞으로 나가서는 다이어트를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응? 뭐라고? 듣고 있던 선배들도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뒤로 골 때리게 웃긴 자기소개를 한 친구들이 있었고 다행히 내 순서는 잊혔는데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양치를 하다가 책을 읽다가 문득문득 그 날의 기억이 떠올라서 골이 띵하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난다. 왜 그랬을까?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 왜 내 치부를 들췄을까? 지우고 싶은 흑역사의 순간이다. 그래서 자기소개를 할 타이밍이 오면 헛소리만 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다이어트를 하겠다느니, 우리 집 치킨집 한다느니 이런 거 말고.


우리는 자기소개라 하면 응당 '안녕하세요. 어디 사는 누구입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자기소개 = 사는 곳과 나이와 이름' 공식이라도 있는 것처럼 모두가 자신을 그렇게 표현한다. TV 프로그램에서 전화연결이 된 시청자도 그렇고, 뉴스에서 인터뷰를 당한 시민도 그렇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지역과 나이와 같이 본인을 특정할 수 있는 내용을 빼고 자기소개를 하라니. 앞이 캄캄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모임에 참석하게 된 이유가 마케팅 일을 하는 사람으로 새로운 자극을 얻고 싶었고, 심리적인 바운더리를 넓혀가고 싶었기 때문인데 수학공식 같은 자기소개는 이런 이유들과 거리가 멀지 않은가. 모임을 주관한 호스트의 선택이 탁월하다 생각했다. 모임에 참석한 이유에 집중해서 자기소개를 했다.


영화를 영화답게 보고 싶은 사람 ㄱㅁㄹ입니다. 저는 영화 마케팅 일을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 '아 이 타임에 관객이 이만큼 들면 이 영화는 이번 주 이만큼 돈을 벌겠구나' '영화 시작 1시간 30분 만에 결정적인 장면이 나오네' '저런 장면으로 SNS 짤 만들었으면 재밌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 영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편안해야 할 시간에도 일을 하고 있더라. 그래서 영화를 영화답게 보고 싶었다. 경쟁작이나 유사작 조사가 아니라 처음 영화일을 시작하기로 생각했던 그때의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다시 돌아가기까지 분명히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데 영화를 영화답게 보는, 복 받은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이 영화를 봤는지 궁금해서 참석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썩 마음에 드는 내용은 아니었다. 자기소개라기보다 참석 동기에 가까운 내용이었고, 이렇게 말했으면 어땠을까 하고 후회 아닌 후회를 하기도 했는데 자기소개공식을 깨고 처음으로 한 진짜 나를 소개하는 첫 번째 순간이었으니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나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제주맥주에서 제주 한 달 살기 프로젝트를 오픈했다. 다른 스타일의 2가지 장소에서 한 달 동안 제주도에 머무는 프로모션이었는데 회사원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본 제주살이라서 나도 덜컥 신청 페이지를 클릭해서 지원동기를 작성했다. 


이름보다 직위로 불리는 일이 더 익숙한 서울살이 11년 차 ㄱㅁㄹ입니다. 마케터입니다 혹은 영화일을 합니다 같이 직업이 아닌 나를 표현할 수 있는 한 마디를 찾기 위해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중입니다.
일과 사람에 치여 살지만 여전히 일과 사람을 가장 좋아합니다. 타인의 취향은 잘 알면서 정작 나라는 사람은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천천히 생각해볼 시간을 가지고 싶습니다.


물론 탈락이었다. 나는 지원동기에 쓴 내용처럼 직업이 아닌 나를 표현할 수 있는 10줄 내외의 자기소개를 작성하기로 다짐했다. 마케팅 일을 한답시고 다른 사람들의 취향은 들여다보고 살면서 정작 나 자신의 취향은 어떤지 모르고 살았다. 내가 동경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장소, 책, 브랜드를 따라 하며 그것이 내 취향이라고 자위하며 살아왔었다. 나 자신만의 취향과 가치를 알아내는 것이 올해 나의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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