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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막삼 Jun 04. 2020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먹방


네 살 터울의 언니, 나보다 다섯 해 늦게 태어난 남동생.
적지않은 나이 차이 때문에 남동생과 나는 언니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을 하기도 한다. 심심하다고 하면 기꺼이 일어나 춤을 추기도 하고, 심부름은 물론 리모컨도 늘 언니몫이어서 남동생은 저녁부터 연예인들이 화장품을 추천해주는 프로그램이나 눈물뽑는 드라마를 줄곧 같이 봐왔다. 그래서인지 녀석은 다 자라고나서도 젠더감수성이 풍부해서 여자사람친구들이 제법 많다. 

나이 차이때문도 있겠지만 어릴 때부터 지켜본 언니는 성실하고, 주관이 뚜렷함과 동시에 예민함과 냉철함이 공존하는 분이기 때문에 남동생과 나는 그 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물론 여느 남매들처럼 설거지나 심부름같은 것들로 싸우는 날도 있었지만 어차피 승리는 늘 언니쪽이었다. 불만은 없다. 언니는 그때나 지금이나 무뚝뚝하지만 없는 용돈을 쪼개서 늘 우리 간식거리를 사줬고, 월급을 받고부터는 작지만 용돈도 더러 줬고, 내가 성인이 되고부터는 여자형제가 있는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아도 괜찮은 우리 집의 든든한 존재인걸 나를 포함한 모든 가족이 알고 있다. 그냥 단지 조금 예민한 사람일 뿐이다.


언니는 공부를 꽤 잘하는 편이었는데 집안 사정 상 가고 싶었던 서울의 대학을 포기하고 지방의 국립대 간호학과에 진학했고, 무려 4년 내내 장학금을 받고 졸업했다. 간호사가 되고 돈을 벌면서부터는 집 안의 크고 작은 일들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첫 째는 살림밑천이라는 말 참 싫어하지만 우리집은 그랬다. 


대학병원 간호사라 3교대 근무를 했었는데 한 달 스케줄이 나오면 항상 냉장고 문에 붙여뒀었다. 

'아 내일은 언니가 아침 일찍 나가는 날이구나. 저녁부터 조용히 해야지' 

'아 오늘 밤은 언니가 안 들어오는구나. 오예'
언니가 나이트 근무를 나간 날은 남동생과 나에게 해방의 날이었다. 실컷 떠들 수 있고, 보고 싶은 예능을 늦게까지 볼 수도 있고, 이것저것 심부름시키는 사람이 없어서 소파에 널부러져서 여유를 떨었다.

오전 근무때문에 새벽 6시에는 일어나야 하는 언니가 일찍 잠든 밤이었다. 일찌감치 소등한 탓에 집안은 어두컴컴했고, 남동생과 내 방에서 새어져나오는 불빛만 반짝반짝했다. 반강제로 각자의 방에서 갇혀 있는 상태가 지겨웠는데 배까지 고프니 죽을 맛이었다. 삐-걱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잠에서 깨는 언니의 꿀잠을 위해서 2억만년같은 시간동안 천천히 문고리를 돌리고, 까치발을 들고 부엌으로 나왔다. 그리고 가스렌지 앞에서 냄비뚜껑을 들고 있는 남동생과 마주쳤다.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그것보다는 같은 이유로 부엌으로 모인 우리가 너무 우스웠다.


가스렌지에는 엄마가 끓여놓은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간 김치찌개 한 냄비가 있고, 밥솥엔 하얀 쌀밥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가스렌지 소리조차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밥솥 코드를 뽑아 통째로 들고 남동생 방으로 직행했다. 누나가 밥솥을 옮기고 있을 때 남동생은 이 때 처음으로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숟가락을 챙겨왔다. 사실 밥솥을 통째로 옮겨야만 할 정도로 긴박한 상황은 아니었는데 먹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지니 별일을 다 저질렀다.


김치찌개는 완벽했다. 적당히 비계가 붙은 두터운 돼지고기와 얼마나 푹 끓였는지 젓가락이 닿기만 해도 결결이 찢어지는 묵은지까지. 양껏 떠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밥 위에 흩뿌렸다. 숟가락으로 슥슥 비비는데 쇳덩이와 밥솥이 부딪히는 소리가 무슨 박격포마냥 우렁찼다.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손은 눈보다 빠르니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불을 뒤집어 썼다. 그녀가 깨는 순간 소중한 야식타임은 끝나고, 우리의 세상도 끝난다. 이불 안에서 먹는 흰쌀밥에 돼지고기 김치찌개. 삼십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살면서 내가 먹어본 김치찌개 중 단연코 제일이었다. 밥이 뜨거울라치면 차가운 김치찌개가 스윽 스며들어서 온도를 딱 맞춰주고, 묵은지가 입에서 녹아 없어질라치면 고깃덩이가 육즙을 쫙 뿜어낸다. 돼지고기는 공평해야 하기 때문에 남동생이 하나라도 더 입에 넣으면 나는 두세개씩 집어넣었다. 밥솥을 박박 긁을 수는 없는 일이라 벽에 붙은 쌀알들이 아쉽긴 했지만 너 한 입, 나 한 입 순서를 정해가며 먹었던 그 김치찌개가 정말이지 맛있었다. 뒤집어쓴 이불이 어찌나 더웠던지 내 안경에 김이 서릴 정도였는데 소리를 내지 않겠다고 용을 쓰며 우걱우걱 먹던 그 맛이 아직도 생각난다.


이후로도 가끔 모두가 잠든 새벽, 발 뒷꿈치를 들고 몰래 방에서 나와 냄비뚜껑을 열고 김치찌개 속 돼지고기만 손가락으로 야금야금 주워먹었다. 젓가락이나 숟가락은 안된다. 왜냐면 하나만 먹을거라 대충 닦아내면 된다. 냄비뚜껑을 닫고 돌아서면 아쉬운 마음에 하나만 더 먹자. 하나만. 하나만 더. 그렇게 아침이 되면 김치찌개 속 돼지고기는 자취를 감춘다. 지금은 혼자 서울살이 중이라 새벽에 당당히 불도 켜고, 김치찌개를 데울 수도 있다. 돼지고기를 나눠먹을 필요도 없다. 그치만 세상에서 가장 조용했던 그 먹방이 아이러니하게도 그립다. 

지금도 혀 뒷쪽 턱 아래에 침이 사악 고이는 맛있는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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