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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막삼 Nov 24. 2020

카피라이터들의 말맛 넘치는 책들

알고 보니 다들 TBWA 출신이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나는 책을 거의 읽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루만 휴가를 써도 몇 백 통의 메일이 쌓이는 별난 일을 하는 처지로 일 외에 더 이상의 활자를 읽어낸다는 게 고역스럽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 인스타그램에서 '오늘 하루 힘들었을 당신을 위한 책' 이런 뉘앙스의 광고를 보는 족족 사버리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읽은 책 보다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제대로 된 책장도 없는 나에게 집 안 곳곳 널브러진 책더미는 골칫덩이고 죄책감이었는데 마침 작년에 한 달 정도 회사를 쉬면서 손에 잡히는 책 몇 권을 읽어냈다. 그때부터였을 거다. 우리 집 책들이 골칫덩어리 위치에서 벗어난 것이.


모두가 그렇겠지만 나는 술술 읽히는 책을 좋아한다. 특히 어려울 내용 없는 에세이 장르를 좋아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인생 구경도 하고, 그 사람들이 다녀온 곳,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어디 멀리 여행 나온 기분이 든다. 이 책을 통해 어마어마한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 일단 책장을 넘기는 일이 가볍다. 


재미있게 잘 읽은 책들을 주르르 줄지어보니 공통점이 있었다. 작가가 카피라이터 출신이거나 현재 카피라이터이거나. 글을 다루는 직업이지만 전문 작가들과는 느낌이 다른데 그들의 문체는 오래 입은 청바지같이 몸에 착 감긴다. 


그래서 나만의 리바이스진 같은 책과 작가님들을 소개해볼까 하는데 뭔가 각 잡고 1번 OOO 작가님, 그분의 책은 이런 게 있었고, 이런 문체와 어쩌고.. 이렇게 소개하기엔 그냥 책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 중 한 명이라 너무 낯부끄럽기도 하고, 사실 거창하게 책 소개! 책 추천!이라는 말머리를 달만큼 정확하게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니 그냥 뭐가 좋았는지나 읊조려본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 김하나, 황선우 작가

김하나 카피라이터와 황선우 패션 잡지 에디터가 친구로 만나 각자의 고양이까지 합세해 여자 둘, 고양이 넷이라는 'W2C4' 분자 가족으로 탄생해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책. 친구와 함께 살면 1년 안에 절교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다 큰 성인이 함께 산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인데 같으면서도 너무나도 다른 두 여자가 고양이 네 마리와 함께 사는 에피소드가 어찌나 재미있던지 앉은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냈다. 특이하게 두 작가가 번갈아가며 한 챕터씩 이야기를 전하는데 서로가 너무 잘 알아서 혹은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을 때 얘는 이런 애고, 쟤는 저럴 때 꼭 그런다는 둥 술집에 두런두런 앉아 미주알고주알 친구가 쏟아내는 수다를 듣는 기분이랄까. 


특히 내가 1인 가구에 고양이까지 키우는 여자 사람으로 두 작가님과 공통점이 있고, 심지어 동향이라는 사실까지 합치면 거의 운명적인 독자 같은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는 그녀들의 후배 세대로 결혼이라는 제도가 아닌 새로운 가족이 탄생한 것을 널리 널리 알려주신 것에 경배하는 바이다. 


이 책으로 하여금 무릎을 탁 치고 이마를 탁 칠 정도로 깨달은 바가 있다면 나는 지금 나로도 충분히 괜찮게 살고 있다는 것. 굳이 애써 사회가 만들어낸 규칙과 합리적이지 못한 규율에 나를 맞출 필요는 없다는 것. 


이 책 덕분에 좋은 작가님 두 명을 알게 됐다. 인스타그램도 팔로우했고, 김하나 작가님의 힘 빼기의 기술, 말하기를 말하기도 읽었고, 팟캐스트도 종종 듣고 있다. 올해 무더위가 찾아오기에는 조금 일렀던 계절에 두 분의 고양이 '고로'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는 이야기를 인스타그램을 통해 전해 들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우리 집 고양이에게 달려가 미안하고 고맙다고 속삭였다. 그래 이렇게도 가족이 탄생하는 거겠지.




모든 요일의 기록 / 김민철 작가

김민철 작가님의 책을 고른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앞서 소개한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에 등장하는 인물이었기 때문. 회사 선후배로 만난 두 사람 역시 많이 닮았었는데 김민철 작가의 문체도 역시 리바이스진과였다. 


그때 그때 기억나는 것들은 모아놓은 내용이라 줄거리를 설명하기 모호하지만 모든 요일의 기록은 지독히도 기억력이 부족한 카피라이터가 잘 기억하기 위해 메모하고,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세상에 나온 책이다. 여기서 또 나는 작가와 공통점을 찾았다. 기억력 부족. 영화 마케팅 일을 할 때 내가 지난달 담당했던 영화의 감독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을 때 병원에 가봐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대신 감독님이 인터뷰에서 했던 진심을 담은 이야기와 눈빛 같은 것들은 곧잘 기억하는데 그것 또한 김민철 작가와 공통점이었다. 이 분은 몸소 실천하고, 배우고, 습득해서 기억하는 편이니.


여행 작가답게 이 책에는 작가가 푹 빠져버린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적혀있는데 분명 내가 가 본 곳인데도 새롭게 표현하는 재주가 있는 분이다. 같은 곳을 둘러봤는데 어떻게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도 했다. 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여행지에 대해 공부를 엄청 꼼꼼히 하신다는 것.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 있는데 그녀가 출근길 광역버스의 칙칙한 쑥색 커튼을 보고 1년 뒤 퇴사하고 프랑스에 가서 살 것이라는 다짐을 한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이라는 에피소드다. 프랑스에 가는 것만 바라보고 지내온 그녀의 삶을 흔들어놓은 책과 작가를 소개해줬는데 나는 그 책을 소개하는 그녀의 말투에 반했다.


진부하지만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 이 문장을 꺼내먹는다. 포기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분명 나는 더 해낼 재간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포기해도 되는데 진짜 할 거냐고 자신에게 물어본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다. 일상에 매몰되지 않는 것, 의식의 끈을 놓지 않는 것, 항상 깨어 있는 것,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것, 부단한 성실성으로 순간순간에 임하는 것,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 것, 오직 지금만을 살아가는 것, 오직 이곳만을 살아가는 것, 쉬이 좌절하지 않는 것, 희망을 가지지 않는 것, 피할 수 없다면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일상에서 도피하지 않는 것, 일상을 살아나가는 것.




나를 움직인 문장들 / 오하림 작가

또 한 번 다분히 의도적인 작가 취향이다. 오하림 작가 또한 김하나, 김민철 작가와 같이 TBWA 카피라이터니까. 어쩌면 나는 카피라이터가 쓴 책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TBWA 카피라이터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앞서 소개한 두 작가님과 인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오하림 작가와 인연이 있다. 그녀가 나의 대학교 같은 과 2년 후배라는 것과 인스타그램 맞팔하는 사이라는 것 정도? 서로 이름 정도는 아는 선후배 사이이고, 그녀 역시 고양이를 기르고 있어서 공통점 또 하나 발견!


오하림 작가의 서른 살 생일 즈음에 자신에게 영감을 줬던 문장들을 엮어 '나를 움직인 문장들'이라는 개인 출판물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다음 해에는 배송비만 받고 지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도 공유했고, 올해는 정식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아는 척 X 친한 척)


본인이 엮은 이 문장들이 누군가에게 또 다른 영감을 주는 '나를 움직인 문장들'이 되기를 바란다고 책 앞머리에 적어두었는데 결과적으로 그 의도는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책을 거의 다 읽은 지금 이미 책 여기저기에 밑줄을 치고, 귀퉁이를 접어두고, 필사를 하고 있기 때문. 누구나 가슴 뜨겁게 만들어줄 문장들이었다. 


가끔 아주 유명한 사람들의 글을 읽다 보면 '어? 이 사람도 나랑 비슷하네?'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녀가 설명한 본인의 성격이나 일을 하는 모습같이 아주 소소한 부분들이 많은 사람들과 닮아 있어서 공감하고 공유하는 글이 되는 것 같다. 


그녀를 움직인 문장들은 우리도 눈여겨봤을 법한 이야기다. 영화나 드라마의 대사, 예능에서 흘러가는 자막, 수상소감이나 인터뷰 속 한 줄 등 나도 분명히 봤던 건데 그냥 넘겨버렸다. '그걸 다른 사람은 이렇게 주워서 꼭꼭 씹어먹고, 곱씹어서 자기만의 것으로 만드는구나'하고 부러워하기도 했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고무되기도 했다. 


기조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최근 들어 많이 했는데 작가의 평소 생활만 봐도 알 수가 있다. 확고한 취향이 만들어내는 자기만의 방향이 인간을 얼만큼 멋지게 만드는지 말이다.




이런 글의 마무리는 어떻게 해야 멋들어질지 나는 잘 모르겠다. 대신 분명한 것은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따뜻한 글과 작은 목소리가 사람에 따라 더 큰 반향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에세이는 또 하나의 위인전같다.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이루어졌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위인전이 이미 일어난 일을 엮은 책이라면 에세이 장르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작은 변화들의 묶음이다. 


책에서 꼭 어떤 큰 믿음과 깨달음을 얻어가지 않아도 괜찮다. 누군가 내게 이런 말을 조금만 더 빨리 해줬더라면 책 읽는 행위를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권씩 천천히 읽어나가는 것 또한 나의 작은 변화들의 묶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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