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으로 술을 처음 마신 건 대학생이 되고부터였다. 입학 전 신입생 모임 때 처음 제대로 소주를 마셔보고 '아 이 길은 내 길이 아니구나'하고 깨달았다. 소맥의 맛을 알기 전까지는 내가 술을 안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지금은 소맥보다 알싸한 술자리를 더 좋아하고 누구와 함께 마시냐에 따라 주종을 달리 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가 되었다. 어떤 안주와도 잘 어울리는 청하를 가장 좋아하는 으른이 되었다.
대학의 낭만은 낮술이라며 패기롭게 깡소주에 과자 몇 봉지로 공강을 때우고 거나하게 취해서 들어간 강의에서 앞자리가 많이 비어있으니 앞으로 오라는 교수님의 말에 어디에 앉든 그것은 학생의 자유라며 꼬장도 부려봤고, 술에 취해 첫 직장 사수에게 좋아한다고 고백도 해봤다. 나는 정말 고마운 마음에 '제가 참 좋아합니다 선배님'이라고 한 말이었는데 오해하는 바람에 웃긴 해프닝도 생겼었다. 사수가 여자였고 나도 여자였으니. 한 번은 회식자리에서 회사 인원 전체가 술에 취했었는데 쇼파에 쓰러져 잠든 동기가 너무 추워 보여서 벗어놓은 외투 전부를 덮어주는 바람에 사라진 그녀를 찾기 위해 술이 깰 때까지 그 많은 인원이 뛰어다닌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번 취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술을 잘 마셔서가 아니라 술이 취할 것 같으면 술잔을 내려놓는 (내가 봐도 멋진) 자제력 때문이다. 물론 자제력을 잃는 경우가 허다해서 문제지만.
대부분 아주 잠시의 순간을 제외하고 큰 사건들은 기억하는데 그 날은 교수님들과 함께 막걸리로 1차를 시작했고, 그 장소에서 맥주와 소주를 더 마셨고, 교수님의 지인이자 학교 선배들이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회사 사장님이 오셨었는데 우리 앞에서 선배들 욕을 신랄하게 했었다. 별로 좋아하는 선배는 아니었는데 없는 자리에서 욕을 해대니 취기도 올랐겠다 '사장님은 얼마나 잘나셨길래 후배들 앞에서 선배 욕을 하냐'로 시작해서 못난 어른 아니냐, 누가 누굴 훈계하냐까지 갔었더랬다. 물론 옆에서 내 허벅지를 꼬집던 후배에게 들은 이야기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모르는 사람 집 앞에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는 나, 편의점 파라솔에 앉아서 누군가와 맥주를 마시고 있는 나, 기억이 이게 전부다. 제정신을 차린 곳은 노래방이었다. 어디서 오바이트를 한 건지 신발은 더러워져 있고, 사이키 조명이 번쩍이는 방을 주욱 훑어보니 학회 동기들과 선후배 몇 명이 보였다.
계속 인사불성인 나를 보고 안 되겠다며 택시를 태웠다. 1차를 시작한 게 오후 6시 즈음이었는데 택시를 탄게 밤 9시가 조금 넘었었다. 우리 집은 학교에서 꽤 멀어서 당시에 택시비가 만 오천 원 정도 나왔는데 학회장 선배가 열린 택시 창문으로 이만 원을 줬다. 나는 술이 덜 깬 상태였고, 그 선배가 얼마나 힘들게 학교를 다니는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유 이 바보야 만 오천 원이면 학식이 몇 끼냐! 너 밥이나 사 먹어라!'하고 창문 밖으로 돈을 던졌다고 한다. 역시 우리 집을 택시기사에게 설명한 동기에게 들은 이야기다. 어휴.
집 근처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에서 택시가 섰다. 걸어서 5분쯤 가야 하는 곳이었는데 여전히 술은 깨지 않았다. 저벅저벅 걸어가는데 어두운 구석에서 불량한 학생들이 몰려와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술에 취한 와중에도 직감적으로 뛰어야 한다고 생각해 냅다 달렸는데 녀석들이 갑자기 나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술에 취해 얼마나 비틀거리면서 뛰었을까 녀석들은 내 뒷덜미를 잡았고 무언가 건네주었다. 내 가방..!! 택시에 내려서 녀석들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가방을 벗어놓고 뛴 것이다. 고등학생 같아 보이는 친구들은 가방을 주워다 준 것이고. 누나가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까? 이 동네 사는 고딩이라면 남동생의 친구일 수도 있겠.. 어휴 술이 웬수다.
우여곡절 끝에 집 앞에 도착은 했는데 이제 내 포근한 침대에 들어가기 위해 제일 무시무시한 보스몹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술에 취한 와중에도 이 모습을 아빠에게 들켰다가는 최소 얼차려였기 때문에 뺨도 때려보고 입냄새도 맡아보고 아무렇지 않은 척 비밀번호를 누르고 적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입성했다.
쇼파에 앉아 TV를 보던 엄마가 먼저 나와서 반겨줌과 동시에 미쳤다고 등짝스매싱을 날렸다. 누가 봐도 술에 취한 몰골로 왔으니 아빠에게 혼날게 뻔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방으로 들어가려는 뒤통수에 대고 아빠가 말했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이제 들어오노!!!! 니 술마셨제!
가씨나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술을 퍼마시고 돌아다니노!
니가 요새 안 혼나니까 정신을 못차리제 몽둥이로 확 마!"
얼른 자라며 방으로 등 떠미는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뒤돌아 아빠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술은 아빠 니가 제일 마시고 맨날 째려서 들어오면서 누구보고 뭐라하노
나는 누구처럼 술 먹고 들어와서 자는 가족 다 깨우고 그런 거 안 한다!
아빠 니가 제일 시끄럽다 조용히 좀 해라"
박지성 선수의 유명한 세레모니 중 하나인 '입닥쳐 말포이' 제스처를 아빠에게 마지막으로 날리고 뒤돌아 방으로 들어갔다. 사실 아빠에게 삿대질한 기억도, 소리친 기억도 나지 않았는데 다음날 아침 술에 취해 들어온 개딸에게 북엇국을 끓여준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다. 아빠는 TV를 조금 더 보다 방으로 들어갔고, 다음날 일찍 집을 나서서 나와 마주치지는 않았다.
평소에도 아빠랑 편하게 말을 하는 사이이긴 하지만 우리 아버님은 무서운 분이다. 말투에서 느껴지듯이 태생이 경상도 남자이고, 가부장적이며, 장손으로 자기 위주의 인생을 살아왔다. 무뚝뚝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런 가정환경이 자식들에게는 그다지 좋은 영향을 주진 못했다. 남동생은 '남자는 이래야 한다, 사내자식이라면 응당' 이런 말을 늘 들어왔고, 아빠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해 늘 위축돼 있었다. 그리고 북엇국을 드링킹하는 누나에게 어제 멋있었다고 말하고는 쿨하게 등교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처음으로 필름이 끊긴 날이다. 교수님 지인부터 학회장 선배, 나를 말리려 애쓴 동기와 후배들까지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거란 생각에 학교를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는데 다행히 나만큼 술에 취한 사람들이 많았던 술자리라 사장님에게 대든 것 정도는 해프닝 축에도 못 낄 정도로 화려한 날이었다고 했다. 어제 택시에 내려서 가방 벗고 뛴 일부터 아빠에게 삿대질한 것까지 썰을 풀었더니 배를 잡고 구르며 짬뽕 대신 한바탕 웃음으로 해장을 했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의 블랙아웃 현상이 있었다. 전 직장에서는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 마냥 1차에 앉아 있다 정신 차리면 2차, 3차, 눈뜨니 집.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 멈췄던 내 음주 스타일은 내가 그렇게도 경멸하고 싫어했던 아빠의 모습과 똑같다. 그리고 술에 진탕 취한 날은 밤새도록 변기통을 붙잡고 있어야 전쟁이 끝나는 것까지 아빠와 닮았다. 유일하게 닮지 않은 것은 대충 사십 몇 년의 음주활동으로 아빠의 피부는 술톤 그 자체가 되었고, 나는 아직까지는 허여멀건한 얼굴이다. 지금은 술을 끊었다기보다 줄였다.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기도 했고, 내 지방의 거의 7할은 술 때문인 것 같아서 체중을 줄이고 난 이후로는 기분 좋은 날, 아주 좋은 안주거리가 있으면 주거니 받거니 반 병 정도면 적당하다.
술에 취해 아빠에게 삿대질한 날에 대해서는 가족 중 어느 누구도 먼저 이야기하지 않는다. 좋은 일도 아니지만 남동생이 취직턱을 내려갔다 술에 취해 누군가의 오바이트를 머리에 쓰고 온 사건이 더 놀림거리에 가까웠기 때문에 나의 패드립은 자연스럽게 묻혔다. 고맙다 전우여. 술은 웬수다. 웬수가 맞지만 가끔 인생살이에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용기를 내게 해 주고, 어색한 분위기를 무르익게 해 주고, 슬픔도 달래줬다가, 기쁨을 함께하기도 한다. 대신 너무 웬수가 되어서 머리끄댕이 붙잡지 않을 정도까지만. 너무 무르익어서 상대방을 함부로 대하는 일이 없도록. 술은 여전히 웬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