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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막삼 Dec 23. 2020

습관성 승낙주의자

당신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사람

'넉넉하진 않았지만 엄격하신 아버지와 현명하신 어머니 밑에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로 시작할 만큼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같은 재단의 여중, 여고를 졸업했고, 중학교 때는 학교 댄스동아리 팬클럽을 하다 고등학생이 되고 댄스동아리에 들어가면서 진지하게 댄서의 꿈을 꾸기도 했다. 일주일에 4일을 노래방에서 살면서 목소리도 잃어봤고, 몇 개월치 학원비를 빼돌려 호화로운 생활을 하기도 했다. (엄마 눈감아..)

H.O.T. 오빠들 생일이면 동네에 축하 벽보를 붙이는 일에 온 하루를 썼다. 평범함보다는 오히려 외향적이고 통통 튀는 시절을 보냈다. 


남의 시선이라는 감옥에 갇힌 것은 아마도 대학이라는 무한경쟁시대에 뛰어들고부터였던 것 같다. 그 애가 그 애였던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니 각지에서 모여든 새로운 캐릭터들이 많았다. 통통 튀는 녀석들에 비해 나는 너무도 평범했다. 아무도 그렇다 말한 적 없는데 나는 스스로 내가 부족하다 생각한 것 같다. 나는 쟤보다 키가 작아, 나는 쟤보다 뚱뚱해, 나는 쟤보다 공부를 못해, 나는 쟤보다 못생겼어, 나는 쟤보다 인기가 없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남과 비교해가며 내 자신을 평가하고, 내 위치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내 ID는 성형미인!>에서 주인공 강미래는 외모 콤플렉스가 상당했음에도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등급과 점수를 매기는 버릇이 있는데 내가 그랬다. 그동안 자신감, 긍지 이런 단어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심적으로 문제없는 인생을 살았는데 이상하게도 그 시절 나는 누가 뭐라한 것도 아닌데 한없이 위축되어 있었고 늘 내가 작게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길은 묻어가는 인생이었다. 적당히 놀고,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잘하고, 적당히 목소리를 내고, 적당히 친절한 그런 사람 말이다. 


문제는 너무 튀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의 '적당히'는 별로 적당하지 않았다. 내 친절은 누군가가 바라봤을 때 호구에 가까운 정도였고, 내 목소리는 늘 묻히고, 나는 늘 뒷전이었고,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만 있었다. 튀고 싶지 않아 거절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기만 했다. 그렇게 나는 그런 어른이 되었다.


회사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졌다. 편안하지 않은 생활이었지만 살은 1년에 몇 키로 씩 꼬박꼬박 쪘고, 눈은 점점 나빠져서 안경알은 세 번을 압축해도 두꺼웠다. 미팅이 많은 직종에 일하면서 잦은 괄시와 무시를 분명 느꼈다. 능력과 상관없는 그런 것 말이다. 


친한 동료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가 '싫으면 싫다고 해라' '넌 너무 속 이야기를 안 한다' 이런 말들이었다. 회사 후배들에게는 힘들면 말해야 한다, 네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부당한 일은 거절해야 한다, 이래라저래라 충고할 때마다 속이 따끔따끔했다. 사실 내가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이었다.


거절하지 못하는 태도는 좋은 점도 있는데 남들이 부탁한 일과 남기고 간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공부했다. 덕분에 다양한 방면으로 스킬과 경험을 쌓을 수도 있었고 나름 성장했다. 


내가 거절을 조금씩 시도한 일에는 계기가 있다. 그때는 크게 친하지 않은 후배 동료가 아주 진지한 말투로 '막삼님이 그렇게 참고 받아들이면 우리도 그래야 해요'라고 말했다. 따끔하다 못해 얼얼했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모델들의 군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한혜진이 군기 문화를 없앤 멋있는 사람으로 평가받았는데 본인이 당한 일들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라고 했다. 업무 협업으로 일러스트 작가와 컨택했을 때 너무 터무니없는 금액을 제시해서 거절한 적이 있었는데 본인이 정당한 금액을 받지 않으면 후배들 역시 정당한 금액을 요구하지 못한다는 답신을 받고서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비웃은 적이 있었다.


그래. 내가 수용하고 묵인하는 동안 나와 함께하는 이들은 반강제적으로 동조할 수밖에 없었고, 불만을 말하지 않는 상사의 못난 성격에 억지로 맞추느라 속이 곪아도 아무도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답답한 동료이자 나쁜 상사였다. 


변화를 시도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항상 받아주는 입장에서 거절을 표출하는 순간 모두가 당황할 것이고, 쟤 갑자기 왜 저래? 하며 외면할 수도 있다는 충고를 마음에 새기고 당황하지 않도록 천천히 실행에 옮겼다. 아주 작은 부탁부터 하루를 소비해야 하는 업무까지도. 


이 이야기의 끝은 없다. 나는 여전히 거절을 못하는 사람이다. 동료의 간절한 요청에는 한없이 약해지고, 친구의 부탁이나 권유 역시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변화한 것은 그 중심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다. 나를 갉아먹는 일에는 화낼 줄 알고, 거절과 거부에 익숙해지려고 노력 중이다. 인정받기 위해, 모나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일을 줄이고 있다. 이제 타인보다 내가 나의 중심이 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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