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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막삼 Dec 17. 2020

SNS 속 가짜 행복


자유여행으로 떠난 발리에서 유난히 코스가 겹치는 커플이 있었다. 여행 계획 짜는 게 너무나도 싫은 우리는 유명하다는 곳을 순서대로 방문했는데 그 커플을 처음 만난 곳은 우붓에서 가장 핫하다는 스위밍클럽이었다.

발리는 바닷가를 기준으로 비치클럽이 아주 잘 꾸며져 있는데 우붓은 우리나라로 치면 대전, 대구 같은 내륙 지방이라 바다 대신 수영장을 클럽처럼 꾸며놓은 곳이 굉장히 많았다. 그중 가장 유명한 스위밍클럽에 편하게 누울 수 있는 침대 타입의 자리를 예약해서 맥주와 안주를 즐기고 있을 때 그 커플이 등장했다.


수영복으로 환복한 그들은 클럽에서 가장 명당이라고 알려진 스팟에서 핑크색 주황색으로 물들고 있는 석양을 배경으로 사진을 천 장 정도(?) 찍고 나서야 줄지어 서있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들은 침대가 아닌 식사용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수박주스 한 잔으로 2시간을 즐기다가 주문한 햄버거를 놓고는 다시금 오백 장 정도의 사진을 찍고, 그마저도 여자 친구 마음에 드는 컷이 없어서 타박을 받고서야 자리를 떠났다.


우붓에 오기 전 한국 관광객이 거의 없는 지역에 머물러서 그들의 연예인 화보급 플래시 세례에 진절머리가 났었는데 다음 날 유명한 사원에서도, 커다란 연못이 있는 공원에서도 어김없이 마주쳤고, 가이드의 이제는 가야 한다는 만류에도 그들은 촬영을 멈추지 않았다.


그날 밤, 친구와 맥주를 마시면서 그들은 그 많은 사진 중 어떤 사진을 픽했는지 너무 궁금해서 인스타그램 장소 태그 검색으로 혹시나 모를 그들은 찾아보았다. 시간 순으로 보니 바로 등장한 커플은 사진 속에서 한껏 밝게 웃고 있었고 행복했다. 오빠와 함께 한 지상낙원이라는 코멘트도 잊지 않았다. 


우리가 본 그들은 늘 사진을 찍고 확인하느라 주변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보지 않았고, 잠깐 쏟아진 소나기가 연못에 떨어져 장관일 때도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고, 그마저 눈을 마주치는 순간은 내내 싸우고 있었는데 지상낙원이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인스타그램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싱크대가 엉망이 될 정도로 뻑적지근하게 요리를 해놓고 사진을 찍기 위해 그릇에 예쁘게 옮겨 담아 마치 셰프라도 된냥 #집밥스타그램 해시태그를 달아 올릴 때도 있고, 셀카는 눈도 살짝 키우고, 턱도 살짝 깎고, 나인 듯 나이지 않게 올리기도 하고, 돼지우리처럼 더러운 집이지만 인스타용 사진은 정갈해 보이는 스팟을 찾아 찍고는 한다.


그리고는 좋아요 알림이 울릴 때마다 누가 눌렀는지 기억하고, 저번 사진보다 하트가 적으면 실망하기도 한다. 해시태그를 몇십 개씩 달아 보이는 것은 너무 팔로우나 좋아요에 환장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 해시태그를 댓글로 남기기도 하고, 요즘은 피드보다는 스토리에 감성 가득한 사진을 올려 여유 있는 사람인 척하기도 한다. 


우리는 보여지는 사진으로 행복을 만든다. SNS는 행복할 때를 추억하려고 사진을 남기기보다 행복한 척하기 위해 존재하는 미디어 같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이런 생각을 더욱 견고히 하게 된 계기가 있다.


친하지는 않지만 이름 정도는 아는 고등학교 동창의 인스타그램 계정이 친구 추천에 떴다. 분명 내 기억으로는 통통한 친구였는데 볼살이 쏘옥 빠져서 예뻐 보이기까지 했다. 사진을 살펴보는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과하게 깎인 턱라인, 부조화스럽게 큰 눈, 콧구멍이 없을 정도로 줄어둔 콧망울. 그밖에도 사진마다 얼굴은 형태가 달랐고, 얼굴이나 허리라인 왜곡이 심해서 주변 건물이나 기둥이 휘어지기까지 했다. 


순간 눈을 의심했는데 그녀의 인스타그램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얼굴이 왜곡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인인지 지나가는 사람인지 모를 사람들의 예쁘다는 댓글에 감사하다는 답글을 일일이 남기고 있는 그녀였다. 그래 성형수술이 잘못된 걸 수도 있잖아? 그녀의 친구들 인스타그램에 등장하는 그녀의 얼굴을 또 달랐다.


기술의 발전 덕분인지 우리는 손가락 터치 몇 번이면 미의 기준이 되는 얼굴로 변신할 수 있다. 그리고 보여지는 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나와 많은 이들 덕분에 나인지 누구인지도 모를 사진이 계속 생산된다. 크리스 헬더의 책 <내 안의 소음을 줄여라>에서 SNS로 연출되는 가짜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진정성을 추구해야 한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진짜 '나'를 보여줄 때 불필요한 스트레스는 줄어든다.
소셜미디어에 비춰진 모습이 자신의 실제 삶과 거리가 멀어질수록 사람들의 반응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맞는 말이다. 나는 지금 일자리가 너무나 간절한 사람인데 인스타그램에는 여유 있는 척, 이런 생활이 너무나 만족스럽다는 듯 커피를 마시며 책 읽는 사진을 올리고 있는 노릇이다. 얼굴이 깎이고, 다리 길이가 늘어날수록 친구는 행복했을까? 사람들이 누르는 좋아요에 만족스러웠을까? 어느 날 문득 잠에서 깨어나 화장실에서 마주친 거울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진 않았을까? 


거울 속에 비친 저 사람이 나인지, 인스타그램에 올려진 눈도 뾰족 턱도 뾰족한 여자가 나인지 헷갈리지 않을까?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커질수록 현실을 자각할 수 없게 될까 봐 나 역시 나 자신이 걱정스럽다. 남에게 보여지는 모습이 뭐길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병들게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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