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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막삼 Jun 02. 2020

제가 그 유명한 치킨집딸입니다만


나는 21세기 치킨집 딸이다. 21세기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부모님이 운영하신 치킨집 상호명인데 주변 어르신들은 나를 21세기 딸 혹은 닭집 딸, 치킨집 딸이라고 불렀다. 가끔 공주라고 부르는 분도 계셨는데 경상도에서는 누군가의 딸을 부를 때 '공주야~' 라고도 부르니 내가 공주란 소리는 아닌거다. 서울에 살면서 공주야 얘기를 한 뒤로 친구들이 '해운대 공주'라고 한참을 놀렸었는데 그런 공주가 아니란 말이다. 공주라고 한 번도 안불려본 애송이들아.


아무튼 한참 친구들과 어울려 사회성을 길러나갈 나이에 부모님이 치킨집을 시작하면서 아주 친한 친구 몇몇에게만 전하고 나머지 친구들에겐 비밀에 부쳤다. 처음 밝히는 사실인데 나는 21세기 딸 소리가 정말 싫었다. 수학시험 27점 받은 걸 엄마한테 말하는 것보다 부모님이 치킨집을 한다고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이 곱절은 더 어려웠다. 솔직하게 말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부끄러웠다. 요즘 시대 어린 꼬맹이들이 '우리 아빠는 의사야. 우리 집은 62평이야' 라고 자랑한다는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세상 말세라고 혀를 찼었는데 나 역시 엄마가 만들고 아빠가 집으로 배달해주는 공짜 닭은 너무 좋았지만 (그 와중에 떡 많이 넣어달라고 애교도 부렸지만) 요상하게 부모님이 치킨집 한다는걸 말하는게 싫었다.


2002년 월드컵 때 나는 중학교이었는데 우리나라 첫 경기인 폴란드전을 해운대 해수욕장 한 복판 대형스크린으로 보려고 학교가 끝나자마자 뛰어가 자리를 찜해두었다. 우리 선수들이 상대편 진영으로 공을 몰고 갈 때마다 목청 터져라 소리쳤고 범국민적인 대단한 열기덕분인지 첫 경기를 2:0으로 시원하게 마무리 지었다. 그 시절 거리 응원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기분을 모를 것이다. 유쾌통쾌상쾌짜릿 이런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국뽕(?)이 차오르는 그런 시절이었다. 나는 신나는 발걸음으로 부모님의 치킨 집으로 향했는데 간판이 벌써부터 꺼져있었다. 유리문에는 생닭이 다 떨어졌다는 종이가 붙어있었다. 오늘 장사가 잘 됐나보다 하고 가게문을 열었을 때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우리 치킨집은 닭을 튀기지 않고 숯불에 구웠었는데 6월 초였음에도 가게 안은 찜통이었고, 엄마는 긴 바지를 걷어올려 반바지를 만들어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아빠는 러닝셔츠만 입고 연신 물을 들이키고 있었다. 그리고 문을 연 나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식당일을 해본 경험 하나로 시작한 21세기 굽는치킨은 몇 번의 굵직한 대회를 경험해본 적은 있었지만 월드컵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우리 나라에서 열렸으니 그 열기가 시작 전부터 어마어마했고, 예나 지금이나 축구에는 치킨이고, 우리집 치킨은 제법 맛있다. 난리통이었다. 초벌해둔 닭은 순식간에 동났고, 치킨을 담는 석쇠틀을 씻을 정신도, 치킨무를 담고 박스를 포장할 시간조차 없었다고 한다. 내가 황선홍 선수의 첫 골에 미친듯이 친구들과 날뛰고 있을 때 엄마아빠는 식사는 커녕 화장실 한 번을 못 갔고 엄마는 닭만 구웠고, 아빠는 오토바이를 타고 여기저기 배달을 다녔다. 주문은 끊임없이 들어왔고, 사람들은 마음이 급했고, 내 치킨이 언제 오는지 재촉하고, 치킨이 늦어지면 거친 말도 내뱉었다. 전화기를 내려 놨다고 했다.

때마침 등장한 나를 노려본 아빠의 눈빛은 이 와중에 너는 친구들과 경기를 보았구나 우린 이렇게나 바빴는데 그리고 나도 보고싶은데. 짜증과 부러움 뭐 그런 것들이 섞인 눈빛이었던 것 같다.


대한민국의 두 번 째 경기부터는 거리응원에 나가지 못했다. 동네 어귀에서 대형 스크린을 틀어놓고 열광하는 꼬맹이들 틈에도 끼지 못했다. 학교가 끝나면 치킨 박스를 접고, 치킨무를 담고, 장사 준비를 했다. 한 동네에 꽤나 오랫동안 살아서 주변 아파트나 지리를 잘 알고 있어서 전화 주문도 곧잘 받았고, 내 자랑이 맞는데 손이 야무진 편이라 포장도 꼼꼼하게 잘했다. 자전거를 타거나 뛰어서 가까운 거리는 배달도 다녔다. 비탈길을 오르고 올라 배달간 집에서 박지성의 결정적인 골이 터지는 순간을 들었고, 치킨을 받던 내 또래 남자애는 만원짜리 두 장을 쥐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고, 나는 남의 집 현관에서 기웃거리며 월드컵을 들었다. 그렇게 나의 첫 월드컵은 지나갔다.


부모님은 2018년까지 치킨집을 하셨는데 그동안 5번의 월드컵, 5번의 올림픽, 6번의 아시안게임을 거쳤다. 나는 독립하기 전까지 21세기 굽는치킨에서 일했고, 대학생 때는 학교 마치면 부모님 가게로 갔고, 휴학을 한 1년 동안은 거의 매일 직원처럼 일했다. 그동안 나도 3번의 월드컵, 3번의 올림픽, 3번의 아시안게임을 경험했다. 내가 일하는 동안 가게는 2번의 이사를 했는데 나름 번화가 언저리에 자리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직원생활이 시작되었다. 엄마는 주방일을 하고, 아빠는 배달을 하고, 나 혼자 홀서빙을 했었는데 여름이 되면 가게 주변으로 설치한 파라솔을 포함해서 10개가 넘는 테이블을 혼자 처리했다. 


좋아하는 영화 중에 2000년 개봉한 '코요테 어글리'에서 작곡가가 되기 위해 뉴욕으로 온 주인공 바이올렛이 코요테 어글리란 클럽에서 일하게 되는데 출근 첫 날에 잘리고 돌아가던 길에 클럽에서 시비가 붙은 손님들을 능숙하게 떨어뜨리며 다시금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런 기술은 어디서 배웠느냐는 사장의 질문에 "축구 결승전 날 피자집에 있어보세요" 라고 말한다. 나도 '월드컵 때 치킨집에 있어보세요' 라고 말할 수 있을정도로 노하우가 생겼다. 손님들의 농담을 더 짓궂게 받아칠 줄도 알게 되었고, 술취한 손님을 고이 집에 보내는 방법도 터득했다. 짬이 쌓여가는게 느껴졌다. 어딜가든 뭘하든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같은게 생겼다. 그래서 굳게 다짐하게 된다. 서울로 가야겠다. 미지의 세계 서울로. 


겉으로는 참 밝은 성격이지만 나는 의외로 내성적이고, 조용한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당황스러운 일을 맞닥들이면 얼어붙거나 눈물 흘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21세기 굽는치킨은 나를 밝고 건강한 사람으로 자라게 해주었다. 그리고 지금 내 덩치를 만들어준 8할이 21세기 굽는치킨이다. 여러모로 참 고마운 존재다. 짜식 고오맙다.

지금은 치킨집 딸이었다고 말하는게 창피하지 않다. 게임 닉네임이 치킨집딸일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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