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어디인가요? 질문에 대한 답은 사실 '우리집'이지만 최근 아주 맘에 쏙 들어온 공간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사실 소개라기보다 그 공간에 있으면서 끄적거렸던 생각의 흔적을 남겨보고자 한다.
명동역에 위치한 FLASK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1층은 리빙샵, 2층은 카페, 3층은 서점. 이라고 적혀있으나 아직 3층까지 올라가보지 않은건 함정. (좋아하는 공간이라고 소개해도 되는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ㅋㅋ)
이 공간이 마음에 든 이유는 2층 카페의 시그니쳐 커피들이 비록 물잔같은 작은 컵에 나오긴 하지만 커피를 잘 모르는 내가 마셔도 맛이 좋고, 향도 좋다. 홀짝홀짝 마시면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취하기 딱 좋다. 그리고 음악 선곡 역시 굉장히 좋다. 음악앱을 켜서 이 노래가 뭔지 검색한 순간이 꽤 많았다. 그런데 요상하게도 2층 카페에서 들을 때 가장 좋은 음으로 들린다. 집에서는 그 감성이 안 생기더라. 쩝.
그리고 심지어 1층 리빙샵에는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인 KINTO의 유리컵과 그릇을 팔고, 문구인들을 위한 집에 있는 것 같지만 새롭게 예쁜 스테이셔너리 코너가 흥미롭다. 얼마전에는 손목에 바르는 고체향수를 사기도 했다. 재난지원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내가 몸담고 있는 영화산업은 매일매일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고, 디지털 마케팅을 대행하는 우리 회사 역시 고통의 직격탄을 맞았다. 월급을 깎거나 직원들을 내보내는 회사가 많아졌고, 남아있는 사람들 역시 일이 없어 지겹고도 불편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도 예외는 아니라 무급휴가를 보내는 중이다.
FLASK 2층 카페에서 가장 좋아하는 위치는 테라스가 보이는 어두컴컴한 나무벤치의자 쪽인데 사실 테라스가 마음에 들어서 나가서 커피를 마시고 싶었으나 처음 방문했을 때는 미세먼지때문에 문이 닫혀있었고,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공사 중이었고, 세 번째 방문했을 때는 출입은 가능했지만 뭔가 앉기가 그래서 낡은 주택과 초록빛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카페 BGM은 황홀했고, 오랜만에 하늘이 맑은 날이었고, 햇살이 초록나뭇잎 사이사이로 부서지며 때때로 번쩍번쩍거려서 뭔가 마음이 몽글몽글하기도 싱숭생숭하기도 했다.
게다가 '술'과 관련된 책을 읽는 중이라 술이 고팠고, 이것저것 끄적거리다 오랜 숙원사업이자 평생 숙원사업이 될 것 같은 '나의 카페'에 대해 생각을 좀 해보았다. 많은 사람들의 염원과 같이 예전부터 아담한 카페를 해보고 싶어서 잘 정돈된 카페를 볼 때마다 나는 이렇게 해야지, 저런걸 전시해놔야지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저 날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자세한 아이템들을 적어나갔다.
의외로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인 나는 책 읽기 좋은 카페를 찾아다니곤 했는데 나의 장소가 그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시작으로 주인장이 셀렉하고 카페 여기저기에 비치해둔 책을 읽기도 하고, 책에 코멘트도 쓰고, 방문객이 읽은 책을 추천도 해주는 그런 소소하지만 커뮤니티력이 강한 곳이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실제로 인스타그램에서 이런 스타일의 카페를 방문한 포스트를 본 적이 있는데 '제발 낙서하고, 책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어달라'는 식의 문구들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나의 공간은 이러하다.
FLASK와 같이 주택과 녹음이 살짝씩 어우러진 뷰에 커다란 창을 여러 개 낸다.
각각의 창 앞에 혼자 앉을 수 있는 적당히 푹신한 쇼파나 의자를 둔다. (1인 1창)
테이블은 넓다랗기 보다 음료와 케익 1조각, 스마트폰 정도 올려둘 수 있는 크기면 좋겠다. (케익을 팔건가봐?)
책을 읽지 않는 손님, 3인 이상의 손님이 앉을 수 있는 ZONE은 따로 만들어둔다. 공간 분리는 필수. (아담한.. 카페라며..아 몰라..)
카페 곳곳에 깨알같은 문구를 적어둔다. 이를테면,
'책소개가 마음에 든다면 가져가서 자리에서 읽으셔도 됩니다. 마음에 드는 문장에 밑줄을 그어도 좋고, 기억하기 위해 모퉁이를 접어도 좋아요. 대신 찢어가지만 말아주세요. 당신이 느낀 순간의 울림을 다른 사람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세요.'
'책에 커피를 흘렸거나 책에 문제가 생겼다면 카운터로 가져다주세요. 혼내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책도 병원에 가야해요. 몰래 넣어두시면 다른 페이지들도 아파져요.'
'이 곳에 없는 책 중에서 우리의 공간과 잘 어울리거나 도저히 추천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책이 있다면 노래 신청하듯이 종이에 적어 카운터에 건내어주세요. 연락처 물어보는 쪽지로 오해하지 않도록 책이라고 말해주세요. 저는 오해를 잘 하는 사람입니다. 아참 종이는 카운터에 있습니다.'
'책 읽기 좋은 카페를 찾아다니다 만든 공간이지만 좋은 사람들과 행복한 순간을 나누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가끔 재미있는 이야기에 신이 나 목소리가 커진 분들도 있을거예요. 너무 즐거웠구나 생각해주세요. 이야기 나누는 분들도 책 읽는 분들을 위해 흥분지수를 조금만 낮춰주세요.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해주세요.'
너무 이상적인가? 뭐 이상적일 수는 있으나 나는 지금 만들고 싶은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는거고, 내 꿈이니 아 몰라. 구체적인 생각을 해본게 처음이라 두근두근.
실천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명치 끝이 간질간질하다. 머리로는 이미 인테리어를 끝냈고, 손님들이 북적거리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하늘이 맑은 날이고, 나는 카운터에서 커피를 내리면서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고, 녹음이 부서지는 창가에서 조용히 책에 집중하는 사람과 지난 주말에 있었던 이야기로 오손도손한 사람들. 깨고 싶지 않은 평화로운 모먼트다.
쨍그랑, 엄마 ㅠㅠㅠ 너 정말!
안된다. 나도 아이를 좋아는 하지만 여기는 노키즈존이야. 훠이훠이.
좋은 공간은 사람을 이렇게 허무맹랑하고 들뜨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