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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Jun 19. 2024

보통의 행복

기록은 기어코 기억이 된다_김장과 생일


23년 생일에 만든 김장김치를 꺼냈다.

생일에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배추 속이나 버무리게 하다니,


큰 언니는 즉흥적인 사람이다. 계획 없이는 문 밖을 나서지 않는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 함께 외출이라도 하는 날의 약속은 하나의 통로일 뿐, 내일이 오늘 밤이 되기도 하고, 오늘 밤이 지금 당장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나 다름에도 큰 다툼으로 번지지 않는 이유가 번번이 부르르 떨며, 화를 내면서도 결국 언니가 원하는 대로 따르는 나와 내가 실컷 떠들어 될 때까지 듣고는 언니가 원하는 대로 해버리는, 그러니까... 언니는 듣기 보유자인 동시에 내가 해대고 미안해할 포인트를 정확히 짚어내는 기술자이기 때문이다.


그 해 엄마는 작은 빌라로 이사하며 자신 명의의 집을 처음 가졌다. 아빠와 함께 살던 이전 집들을 생각하면 작디작았지만, 엄마가 사는 그 집이 한때 4인 가족을 품던 곳이라 생각하면 혼자 지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엄마의 건장한 두 딸이 이사를 돕고, 손발이 되다가도 엄마 몰래 버리고 또 버리며 엄마가 지낼 공간을 알뜰히 살피는 동안, 나는 냉장고와 가스레인지를 선물로 보낸 후 설에나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내 생일을 앞둔 오일 전 큰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한테 갈 건데, 엄마가 너도 꼭 데려오래."

"그날 내 생일인데?"

"응"

"근데 그날 왜...?"

"몰라 엄마가 너 꼭 데려오라고 했어."


언젠가부터 생일에 건강검진을 받아왔다. 겨울이라 뒤로 미루다간 가능 일정이 부족해 검진을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 거절했으나, 언니는 다음 날 그 다음다음 날에도 전화를 걸어 같이 가자고 했다. 건강검진이라 해봤지만, 누가 생일에 검진을 받냐는 물음이 되돌아왔고, 변명 같은 진실을 반복하고 있자니 거짓을 둘러대는 것만 같아.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언니의 차에 실려 엄마의 새 집으로 향했다.


도배장판을 새로 입은 엄마 집은 언니들 덕분에 말끔한 새 얼굴이 되어 있었다. 여기저기 둘러보는 나를 향해 엄마가 집이 괜찮은지 물어왔다. "아기자기하네" 내 한 마디에 이번에는 "집이 너무 작지?" 한다. "엄마 이 정도면 딱이지." 하고 말하니, 돌아서며 "우리 식구 다 모이면 집이 좁지 뭐". 여전히 큰 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해 더는 말을 보태지 않기로 했다.


집을 둘러보고, 밥을 먹고 쉬는 중에 엄마가 슬슬 배추를 절이러 가자는 것이다. 이전에 살던 전셋집이 아직 빈집이라 거기에 김장 거리 배추를 준비해 놓은 모양이었다. 아니 그런데 김장이라니? 하는 눈으로 언니를 쳐다보니, 언니는 신속히 내 눈을 피하고는 지금은 너무 피곤하니 새벽에 일찍 일어나 가자고 하는 게 아닌가?

아니 어째서 이 대목에 김장이 튀어나온단 말인가?


나를 낳느라 고생한 사람이 엄마란 건 알겠는데, 묘하게 내 생일만 잊는 것이 서운했던 터라 이번에는 어쩐 일인가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김장 일꾼으로 섭외된 것이었다니... '엄마가 잡채를 해주면 좋겠다'며 집으로 오는 길에 품었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렇게 일꾼으로 뽑혀간 나는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입도 뻥끗 못하고 김장 속을 채우고 돌아와,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엄마 내 생일이라서 언니한테 나데려 오라고 한 거 아니었어?" 나는 그때 엄마의 눈에서 작은 진동과 말 줄임표를 보았고, 옆에선 언니가 웃고 있었다. 작은 집이라 아쉬워하더니 막내딸에게 집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김장은 둘보단 셋이지, 큰언니의 계략에 속은 걸까? 이제와 뭣이 중헌가? 나는 그 둘을 모녀 사기단으로 명명하고 싶을 뿐이었다.


와중에 저녁 찬으로 먹으려 했던 고등어시래기조림을 생일이라 만들어 봤다고 태연스럽게 말하는 엄마는 귀여웠고 이 모든 걸 알고도 기어이 나를 데려온 언니는 조금 미웠기에 상을 무른 거실에 누워, 지금 당장 귤이 먹고 싶으니 슈퍼에 다녀오라고 하니 엄마가 눈을 흘기며 언니한테 그런다고 한 소리 했다.


이번에야 말로 질 수 없었던 나는 가늘게 눈을 뜬 채로 "그럼 엄마가 갈래?" 하자. 엄마는 모른 척 이불을 끌어당겨 누웠다. 언니가 사 온 밍밍한 귤을 나눠 먹으며 어떤 이야기를 했더라, 잠이 솔솔 쏟아질 정도로 거실이 따뜻했고, 곁에 누운 엄마의 몰랑몰랑한 살이 살가웠던 것밖에. 대단치 않은 이런 순간순간들을 우리는 보통 이런 순간을 행복이라 부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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