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기어코 기억이 된다_ 20만이 뭐람, 100만은 타고 싶어!
비 소식이 잦은 여름이다. 폭염이나 열대야만큼이나 비가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는 건, 변덕스러운 사람의 얼굴을 비에게서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쯤 되니 기상청을 믿어야 할지, 무릎의 통증을 믿어야 할지 모를 정도가 되었다.
오늘 아침도 그랬다. 동남쪽 베란다 창에서 바라본 하늘은 옅은 어둠 속에 푸른 실루엣을 발사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비가 오지 않을 것 같은 마음이 들어, 곧장 날씨앱을 열어 확인해 봤다. 비 표시는 <15:00, 16:00>뿐이다. 그러면 이제는 결정해야 한다. 출근길에 자전거를 탈지, 버스를 탈지, S의 차를 얻어 탈지.
① 자전거: 비소식이 있지만, 왜인지 오늘은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나 자전거 타고 싶어) 그러나 비가 온다면 자전거 보관대 지붕이 없기 때문에 불안하다. 차로 따지자면 20만은 탔을 거라고 종종 고물 취급을 당하는 나의 전기 자전거는 비에 몹시 취약하다. (비가 오면 얼마나 오겠어, 안 올 거야!)
② 버스: 요즘 버스 안 냄새가 심상치 않다. 초밀접할 수밖에 없는 출퇴근 버스 이용이 꺼려지는 건 몸이 반응하는 일이라 어쩔 수 없다.
③ S의 차: 빙빙- 이러쿵저러쿵 사설이 길었지만, 결국 늦잠을 자서 출발이 늦었다는 말에 쿨하게 포기한다.
크게 잴 것도 없이 자전거를 선택했다. 긴 장마에 지쳐 오늘 비표시는 필시 슈퍼 컴퓨터의 오류라고 믿고 싶었다. 일 년 전 철거 후 만들어주지 않는 자전거 보관대를 생각하면 종종 주차장 만들기에는 진심인 회사가 자리비중도 적은 자전거 거치대에는 왜 이리 비협조적인지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지금 그런 걸 생각해 봐야 혈압만 오를 테니까. 자전거를 쓱쓱 꺼내 닦은 후, 힘껏 페달을 밟았다. 귀 사이로 작은 바람이 불었다. 체감상 걷는 것보다 만 배는 쾌적하다. 회사에서 집까지 딴짓을 하지 않고 걸으면 이십 여분, 자전거를 타면 오분 남짓이다. 자전거가 최고다. 회사에 도착 후 혹시 모를 비를 대비해 가방에 챙겨 온 大자 김장봉투를 꺼내 배터리와 안장 부분을 꼼꼼히 감쌌다. 그 작은 움직임을 몸이 벌써 감지했는지, 귀신같이 땀을 흘려보냈다.
오전 일과를 마치고, 15:00를 지나고 있었지만 온다던 비는 소식이 없었다. 속으로 이번에도 역시나 나의 판단이 옳았다며 집으로 가기 전에 마트에 들를 생각까지 야무지게 했더랬다.
15:56 회사 동료의 말 '아 너무 졸리다'와 거의 동시에 '챙- 쾅-콰아아 앙'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동료들은 자리에서 미어캣 모드가 되었고 설마 하는 그 일이 창가 앞에 섰을 때, 이미 벌어지고 있었다.
비가 그냥 오는 게 아니라, 억수로 퍼붓고 있었다. 빗줄기가 얼마나 굵은지 시야가 뿌옇게 느껴질 정도였는데 웅성웅성,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내 자전거 괜찮을까?' 하는 혼잣말에 어째서인지 나를 놀리고 싶어 안달 난 눈코입들이 한결같은 반응을 보였다. "너는 정말 날씨 요정인가 봐, 지금 떨어진 천둥에 두 동강이 났을지도..." 그중 제일 착한 반응은 "이제 새 자전거 살 때도 됐잖아."정도였다. 이 순간 누구를 향한 분노가 무슨 소용 있겠는가? 나의 선택을 원망할 수밖에. 잦아들지 않는 비에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폭우에 베란다 문도 활짝 열어 놓고 왔네.
침수 자전거... 한강 베란다...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 도통 멈출 생각 없는 비... 비... (오늘은 진짜 슈퍼 컴퓨터잖아...) 그런 혼잣말에 조금 사그라든 비의 형태를 보곤 퇴근을 재촉하며 빠른 걸음으로 현관에 다다르자, 다시 세차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날씨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질문했지만, 대답은 않고 맹렬히 물폭탄을 쏟아냈다.
나는 혹시 생명이 붙어 있을지도 모르는 자전거도 구해야 했고, 베란다도 구해야 했기에. 뛰듯 걸었다. 흠뻑 젖은 자전거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잠시 저것을 탈 것인가, 끌고 갈 것인가 고민하다가 이래도 저래도 불편한 상황이니 우산이라도 쓰자는 심정으로 자전거를 끌고, 우산을 쓰는 건지 비를 맞는 건지 모를 상태로 수행하듯 걷고 또 걸었다. 페달이 종아리를 가격했다. 안정감 없는 손동작에 바퀴가 제멋대로 굴렀다.
와중에 불어온 바람에 우산이 뒤집히는 또 다른 경우의 수를 겪으며 자전거와 속살을 드러낸 우산을 번갈아 보며 그대로 멈춰 서 한 참을 웃었다. 누군가 나를 관망했다면 기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집에 와 정신이 들고 난 후에 한 생각이다.
혹시 몰라하면 씌워둔 다이소표 김장비닐봉지가 비를 온전히 막아준 덕분에 배터리는 문제없이 작동했다.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어 이건 조금 더 지켜봐야 할 문제지만) 베란다는 비가 들이닥쳤지만, 다행히 물바다가 되어 있진 않았다. 문제는 우산을 썼나 싶게, 정말이지 온몸이 흠뻑 젖은 나였다. 내일 감기까지 온다면, 정말 가지 가지겠군. 생각하며 오늘 일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그 사이 날씨 앱에는 17:00~ 시간대 별로 비 표시가 그려졌다. ‘드르르륵’ 행정안전부 문자도 연이어 도착했다.
그래서 오늘의 교훈과 다짐은? 백만 배쯤 불쾌한 땀을 쏟더라도 비 표시가 있는 날은 걷자. 그런 날 베란다 문도 닫자. 종종 고물 자전거라는 말을 듣지만, 아직 보내고 싶지 않으니 100만까지는 타고 싶다. 밤이 깊어지니 점점 몸이 쑤신다. 감기약 먹고 잘까? ( ꃼᯅꃼ ) 참으로 고된 하루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