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위한 필사 <까다롭게 좋아하는 사람, 엄지혜>
책 마감 약속을 하염없이 어기는 나날이다. 얼마후면 이 책을 계약한 지 4년이 지난다. 얼마 전 만난 1인 출판사 대표님은 "그래도 출판사가 기다려 주네요?"라고 물어서 얼굴이 빨개졌다. 약속된 마감일을 1년 넘기고는 원고를 도저히 못 쓸 것 같아서 계약 해지의 뜻을 슬쩍 비쳤었다. 출판사는 나의 평온할 수 없는 사정을 아는 터라 기다려주겠다고, 편히 쓰라며 조금의 부담도 주지 않았지만 글빚도 얼마나 무서운 짐인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SNS로 독자들을 모집했다. 쉰 명의 독자들께 두 달간 이틀에 한 편씩 이메일로 원고를 보냈다. 답장은 안 해도 되니 그저 읽어만 주십사 부탁했다. 약속을 하면 어떻게든 지키려고 노력하는 나의 근성을 믿었다. 오전 8시. 내가 메일링을 예약한 시간이다. 신청자들은 서너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모르는 사람들, 빠르게 메일을 확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퇴근 시간 무렵에 메일을 여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나의 페이스메이커였다. 천천히라도 쉬지 않고 원고를 쓸 수 있도록 답장을 보내왔다. 글에 대한 리뷰일 때도 있고,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편지일 때도 있었는데, 몇 통의 긴 응원 메일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독자 K와는 지금도 종종 소식을 주고받는다. 수영을 시작한 그는 새벽형 인간이 되어 이로운 점을 설파하며, 어서 수영에 입문하라고 동네 수영장까지 소개해줬다. 나는 그에게 수영 일기가 재밌으니 브런치에 연재해 보면 어떠냐고 슬쩍 떠보았는데, 다독가인 K는 딱 잘라 말했다. "서점에 가 보면 수영 에세이가 은근히 많아요." 하지만 K는 오래전부터 책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아직 뚜렷한 주제를 발견하지 못했을 뿐, 꾸준히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다. "친구 공개로만 글을 올리지 마시고요. 책 제목으로 검색어 유입되도록 공개 글을 써보세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께서 말씀하셨죠. '비밀 글만 쓰면 글은 늘지 않는다.' 저는 일부러 공개 글을 쓸 때도 있어요. 어떤 글에 독자들이 더 반응하는지, 재밌어하는지 알고 싶어서요." K는 나의 설득에 못 이기는 척 공개 블로그를 따로 개설했다. 주제는 '출퇴근길에 읽는 책'. 서평을 올리는 블로그는 너무 많으니 꼭 출퇴근할 때 읽는 책만 올리라고 권했다. 반드시 교통수단(지하철, 버스 등)을 배경으로 책 사진을 찍어 올리고 너무 긴 서평이 아닌 1천 자 정도의 적당히 짧은 글, 하지만 강약이 있는 리뷰. 표지와 함께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문장 하나를 찍는 패턴으로 부담 없이 시작하라고 했다. 주 5일 근무를 하고 있으니 매달 쌓이는 리뷰는 스무 개. 두꺼운 인문서 리뷰를 쓸 때도 있고 문고본 사이즈의 짧은 에세이 리뷰를 올릴 때도 있는데, 의외로 댓글은 '벽돌책' 리뷰에 많이 달린다. (...) K는 50번째 서평을 올리며 '땡스 투 Thank to'를 길게 남겼다.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준 나에게 무척 고맙다며 독자가 있다는 사실이 글쓴이에게 큰 힘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나는 곧장 댓글을 또 달았다. K님이 먼저 나의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주셨다고. 어쩌면 우리에겐 멘토보다 페이스메이커가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비법은 모두에게 통하지 않지만 응원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니까. 상대의 속도에 맞춰 같이 뛰어주고 북돋아주는 일의 귀함을 우리는 안다.
엄지혜, <까다롭게 좋아하는 사람_페이스메이커가 되어주는 사람>
<책을 읽으며 내 마음에 와닿았던 문단 덩어리를 찾고 타이핑합니다. 그 아래에 왜 그 문장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유를 적습니다. 주말에는 그 문단에서 비롯된 주제로 한 편의 에세이 써보기를 시도합니다.>
24년 4월의 일이었다. 번번이 실패해 왔던 글쓰기를 해보겠다며 사람들 앞에 선 그 일은 극 내향인인 내게 보기 드물게 찾아온 바깥세상의 손짓이자 무모한 시작이었다. 랜선이긴 해도 낯선 이들과의 만남이라니 더군다나 글을 쓰고 공개하는 일이라니, 한 움큼 집어먹은 두려움. 이유를 알 것 같은 초조함. 뱅뱅 맴돌던 셀프디스전이 하루에도 몇 번씩 대 충돌했기에 시작과 동시에 후회가 찾아왔다.
처음에는 읽었던 책에서 문단의 꼬리를 추적했다. 무엇이라도 써야 했기에 책상머리에 앉아 빈 화면 생각 많은 커서 앞에서 내가 좋아하는 문단에, 줏대 없이 골라낸 문장을 쓰고. 애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글쓰기를 끝낸 후 메이트들의 글을 읽었을 때, '이토록 멋진 문장과 생각을 할 수 있다니' 타인에 대한 감탄이 늘어갈수록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나에 대한, 글쓰기라는 지지부진한 결괏값에 실망의 크기를 부풀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자주 길을 잃었고, 무엇을 쓰면 좋을지 몰라 안절부절못했으며 메이트들을 남몰래 질투하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최근 엄지혜 작가의 까다롭게 좋아하는 사람,『페이스메이커가 되어주는 사람』를 읽고 어쩌면 그들이 나의 <페이스메이커>였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쓴 글에 확신 없이 의기소침해 있을 때, 메이트들의 피드백과 공감이 불안한 나를 키워줬다. 단점 많은 내 글에서 장점을 솎아내줬다. 조금 더 과감해져도 된다고, 글의 모퉁이에 숨어있던 나의 손을 잡아 이끌어 주었다. 모두가 비슷하고도 다른 삶을 살았고, 크기가 다른 기쁨과 슬픔 안에 삶을 녹여낸 진실된 이야기는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단조롭기만 한 내 일상을 다채롭게 만들어줬다.
문득문득 그립니다. 한 뼘 가까운 곳에 있던 사람들과의 연대가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기록과 조건 없는 응원이. 문장 수집 끝에 잃었던 기억과, 스쳤던 현재를 채굴하듯 건져 올렸던 나의 집요함이. 그때 그 시간이 없었다면,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노트북 빈 화면 앞에서 자주 고꾸라지지만, 그때 들였던 책 읽는 습관만큼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좋아하는 문단의 덩어리를 찾아 타이핑하고, 너무 많은 덩어리를 발견할 때면 플래그를 사용해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글이 필요할 때, 글이 나를 찾을 때 언제든 가닿고 싶어서,
<어쩌면 우리에겐 멘토보다 페이스메이커가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비법은 모두에게 통하지 않지만 응원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니까. 상대의 속도에 맞춰 같이 뛰어주고 북돋아주는 일의 귀함을 우리는 안다.> 책을 읽으며 오뚝이처럼 끄덕거렸던 문장 앞에서 그 귀한 것을 다시 한번 경험해 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