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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Oct 09. 2023

기록은 기어코 기억이 된다

기록은 기어코 기억이 된다_사진


텍스타일디자인 전공 후 아직 내게 남은 것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사진일 것이다. 사진, <물체로부터 광선을 사진 렌즈로 모아 필름, 건판 따위에 결상을 시킨 뒤에, 이것을 현상액으로 처리하여 음화를 만들고 다시 인화지로 양화 하여 만든다>라고 국어사전에 나와 있다. 교양 과목으로 한 학기만 있던 그 수업에서 교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을 테지만, 우리 중 누구도 카메라가 없었으니 사진 수업에 마음이 들떴다 한들 흥까진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교수님의 이야기는 상을 맺지 못한 채 굴절 없이 우리들 앞으로 흩어졌다.


팍팍했던 삶에 여유가 생길 무렵, 용기를 끌어모아 가입한 Lomo 카페에서 카메라에 대한 잡다한 지식과 남대문 환타 아저씨를 소개받았고, 사라질 곳들을 찾아 출사를 다녔다. 그때가 이십 대 후반이었으니, 벌써 오래전 일이지만 당시에 알음알음 배운 카메라 작동법이 지금까지 손끝에 남아있다. 지금은 사라진 <I Love Lomo> 카페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Slr 필름 카메라를 어깨에 둘러메고 온 사람들이 많았고, 나는 운 좋게도 인생 두 번째 사진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아니 카메라 수업이라고 해야 할까?


사진이 카메라라는 물성 없이 별천지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니 어떻게 이름 불러도 좋을 것 같다. 그맘때 내가 장만한 Slr 카메라는 전자식 셔터 제어 기능을 갖춘 Nikon F3이었는데 탈착식 뷰파인더를 가지고 있어 파인더를 분리해 촬영하면 다른 구도의 사진을 얻을 수 있는 장점 많은 카메라였다. 다만 Slr 카메라 대부분이 그렇듯 제일 가벼운 50mm 단 렌즈를 껴도 종일 매고 다니면 어깨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큰 단점이 있었는데, 이곳저곳 그와 함께한 밤이면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피곤을 달래곤 했다. 이후에는 어렵게 구한 Nikon AF600 *똑딱이 카메라를 경매로 낙찰받아 세트로 함께 들고 다녔다. 그 카메라의 최대 장점이 휴대성이라면 단점은 자동카메라였다는 것뿐 장난감처럼 생기긴 했어도 파노라마 기능까지 갖추고 있어서 사진의 결과물을 받아볼 때면 'Nikon 이 야무진 것들'하며 흐뭇한 혼잣말을 하곤 했다. 물론 그 결과물에는 필름의 역할도 중요하다. 나는 주로 따뜻한 색감을 지닌 Kodak Ektar 필름이나 흑백은 Kodak Tmax, Lomo Lady Grey, 녹색 표현에 탁월한 Fuji 필름을 쓰는 편인데, 결과물을 생각하려 해도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을 때면 시장에 속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이쯤 되면 '부르는 게 값'은 아닐까 하는 불신마저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글을 쓰려고 오랜만에 필름 가격을 검색해 보고 '이게 한 개 가격이라고?' 안 그래도 비싼 Ektar 필름이 한 롤에 23,000원 선으로 훌쩍 올라버린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 계산에서 벗어나 뷰파인더 세계로 진입하는 순간만큼은 피사체를 사랑하게 된다. 더 예쁘게, 더 고유하게, 그것이 풍경, 사물 사람이어도 마음을 듬뿍 담아 한 컷 한 컷 소중하게 찍는다. 그 한 장들이 추억이고 기억이라면 사랑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것이 오히려 힘든 법이니까. 수많은 컷이 모여 그날의 정취로 이름 되어 온다.


언젠가 용감무쌍하게 필름 카메라로 회사 동료의 웨딩 스냅을 찍어준 일이나 (물론 전문 사진작가도 같이 찍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겨우 눈썹, 손동작 정도가 보이는 셀피 속 내가 진짜 나인 것 같다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을 찍을 때 좀 더 자연스러워지는 순간들이나, 과 노출되거나 노출 부족한 사진들은 그것 그대로 운치가 있어 좋다. 바람과 공기와 냄새까지 생생히 박제된 사진을 볼 때면 '이때 그랬었지!' 하며 일순간 과거로 턴 하는 기분 또한 남다르다. 너무 좋아진 세상 탓에 꽤 불편한 존재가 되어버렸지만, 필름 카메라를 사용한다는 것은 다시없을 순간에 기대어 조리개와 때에 따라 셔터스피드를 맞추고 피사체에 집중하고 숨을 고르며 셔터를 누르는 일, 사진이 인화되기까지 느릿하게 실행되는 과정에 동반되는 번거로움, 돌이킬 수 없음에도 그 모든 것이 좋아서 특히 여행의 순간에 함께 길을 나서는 이유가 됐다. 여차하면 위험한 순간에 무기로 쓰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물론 디지털카메라도 핸드폰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도 좋다. 나 역시 필름 카메라를 좋아하고, 그에 대해 썼지만, 삶에 더 가까이 있는 그들에게 의지해 기록을 이어 나가고 있으니까.





사진작가 정멜멜은 자신의 책 <다만 빛과 그림자가 있었고>에, 사진에 관한 말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묻는 Q&A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낸 골딘(Nan Goldin)의 말을 전했다. "나는 사진을 충분히 찍어놓는다면 그 누구도 절대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사실 내 사진들은 내가 누군가를 얼마나 잃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함께 덧붙인 글은 "사진의 참 잔인하고 무정한 속성을 나타내는 말인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느끼곤 합니다. 늘 이 말과 함께 아직 찍히지 않은 사진들과 내가 사랑하지만 언젠가는 잃어버려야 할 사람들을 생각합니다."라고 썼다.


이 글을 읽으며 사진이 글쓰기의 속성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쓰고자 하는 것도 결국에는 어느 순간의 기록이자 내가 잃은 것들의 총합이며, 내게 소중한 것들을 돌아보게 하는 힘을 지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동안에도 무한히 내 안에서 재생되었고, 저만치 떠난 기억과 사람이 더듬더듬, 성큼성큼, 와락 안기기도 했다. 기록은 기어코 기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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