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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Oct 13. 2023

멈추지 말고, 저장.

글을 위한 필사 <저는 이 정도가 좋아요, 송은정>


한동안은 생활의 중심이 글쓰기로 옮겨진 것이 어색했다. 바깥과의 접점은 거의 끊어진 상태였고 가끔은 내 세계가 방의 크기만큼 작아진 것도 같았다. 그렇다고 우울에 빠진 않았다. 지금의 이 시간이 다음을 보장해 줄 것이라 기대했기에. 첫 책을 계기로 두 번째, 세 번째 기회를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확신은 없었다. 출판 시장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건 책방을 운영하며 숱하게 절감했으니까. 하지만 조금의 가능성이 있다면 시도해 볼 만하다고도 생각했다. 단점은 아니지만 장점이라 하기도 어려운, 모호한 낙관에 나는 꽤 의지하는 편이다. 그 미지근한 열기로 여차저차 여기까지 왔다. (...) 어떤 기회는 떠나보내고, 어떤 기회는 가까스로 붙잡으면서 나는 매일같이 불안을 의식한다. 그래도 이제는 예전보다 마음이 한결 너그러워졌다. 모든 기회가 균질한 성취와 미래를 담보하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이 어렴풋 들면서였을까. 더 나아가 내가 믿고 의지할 대상은 출간 계획서가 아니라 오늘의 성실함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렀다.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것만이 미래의 내게 새로운 기회를 안겨주리라는 단순한 계산. 더하고 곱할 것도 없는 정직한 결론. 내가 예측할 수 있는 내일이란 딱 이 정도 일 것이다. 그러니 미래의 나여. 너무 조급해하지 말길. 오늘의 내가 쓰고 지우는 일을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나를 조금 더 믿어보아도 좋겠다.


송은정, <저는 이 정도가 좋아요_미래의 나에게>






퇴근 후에 간단한 요기를 하고 난 이후에 한 시간 안팎으로 운동을 한다. 샤워 후에는 대체로 책을 읽는 편인데, 그러다 벌떡 일어나 노트북을 켜고 무엇이라도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빈화면, 네모난 칸들의 자음과 모음을 한껏 노려본다. 뒤죽박죽 엉킨 생각의 실타래를 어쩌지 못하고 마침표는커녕 시작하는 단어 하나 구하지 못하지 못한 나는 문득 덮어 놓은 책장 속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기왕에 이렇게 된 거 '아, 몰라' 내가 좋아하는 <용감한 형사들>나 봤으면 좋겠다. 그러다 뜬금없이 목이 마른 것 같아, 냉장고 속 음료들을 떠올려 본다. 고개를 떨구니 카펫 먼지도 신경 쓰이고, 곧 떨어질 것 같은 선크림도 사야 할 것 같고, 오전에 속옷 세일 알림을 받은 것도 생각났다.


그 사이 '오늘은 쓰자'라고 마음먹은 오전의 내가 총총 안녕을 고하고, 나는 걔가 떠난 줄도 모르고 눈치 없이 아까와 같이 흰 화면, 네모난 칸들을 노려보고 있다.


무언가를 쓰고자 할 때, 생각 사이로 끼어든 것들을 가벼이 여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엉킨 실타래를 풀며 하려던 말을 유려하게 써 내려갈 수 있다면, 곁다리로 얻어걸린 이야기가 녹아들 수 있게 중심잡기에 탁월한 문장가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은 쓰자'고 마음먹었을 뿐인데. 그저 그런 문장하나 완성하지 못한 내가 싫어 자책의 시간까지 갖고 나서야 '발행' 옆에 서있는 '저장'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 나의 사색은 노트북 바깥으로 가지 못했지만, 괜찮다. 일단 저장하고 내일 다시 시작하면 된다. 작가의 말처럼 나도 <나를 조금 더 믿어보면 좋겠다>고 내일 다시 빈화면만 노려보더라도, 그럴듯한 문장 하나 구하지 못하더라도 <쓰고 지우는 일을 멈추지 않고> 차근차근 나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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