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발명 실시가능 요건의 치명적 함정 — 대법원 2024후10658
명세서에는 분명히 기재되어 있는 실시예. 그런데 출원인이 스스로 청구범위에서 제외했습니다. 이 전략적 판단 하나가 관련 청구항 전체의 무효를 불러왔습니다. 대법원 2026. 1. 15. 선고 2024후10658 판결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의 특허발명은 심부전 치료제 엔트레스토(Entresto)의 기반이 된 특허입니다. 두 가지 활성성분인 발사르탄과 사쿠비트릴이 나트륨 양이온 및 물 분자와 비공유 상호작용으로 회합된 초분자 복합체에 관한 것입니다.
초분자 복합체는 두 성분이 단순히 혼합된 것이 아닙니다. 분자들 사이의 비공유 결합력이 균형을 이루어야만 하나의 화학적 실체로 성립합니다. 구성 요소의 비율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결정 구조가 변하거나, 복합체 자체가 형성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명세서에 유일하게 실체가 확인된 형태는 발사르탄:사쿠비트릴:나트륨 양이온:물 분자가 1:1:3:2.5의 비율로 결합된 2.5수화물 초분자 복합체였습니다. 이 2.5수화물은 실제 상용화된 엔트레스토의 핵심 물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특허의 제1항은 다양한 고체 형태(결정질, 부분 결정질, 무정형, 다형 형태)의 초분자 복합체를 청구하면서, 딱 하나 "결정질 형태의 2.5수화물 초분자 복합체만 제외"한다고 명시했습니다. 명세서에 기재된 유일한 실시례를 스스로 청구범위 밖으로 내보낸 것입니다.
오리지널 제약사는 하나의 활성성분에 대해 물질 특허, 결정형 특허, 제형 특허, 용도 특허를 단계적으로 출원합니다. 각 특허의 청구범위가 겹치지 않도록, 한 특허가 이미 보호하는 범위를 다른 특허에서 제외(disclaimer)하는 구조를 취합니다.
이 사건도 같은 맥락입니다. 2.5수화물은 별도의 결정형 특허로 보호하고, 이 특허에서는 2.5수화물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형태의 초분자 복합체를 넓게 청구하여, 경쟁사가 어떤 형태의 복합체를 개발하더라도 특허권의 보호망 안에 두려는 전략이었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제약업계에서 드물지 않은 접근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 전략은 실시가능 요건의 관점에서 치명적인 취약점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실시가능 요건은 청구범위에 포함된 발명을 통상의 기술자가 명세서의 기재만으로 재현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명세서에 기재된 실험례 중 초분자 복합체에 해당하는 것은 2.5수화물뿐이고, 나머지 실험례(프로드러그)는 초분자 복합체가 아닙니다.
2.5수화물을 청구범위에서 제외하면 결과는 하나입니다. 청구범위 내에는 실시례로 뒷받침되는 발명이 단 하나도 없게 됩니다.
대법원은 원심(특허법원 2023허12695)의 무효 판단을 유지하며 상고를 기각했습니다. 판단 근거는 네 가지입니다.
제1항은 2.5수화물을 제외한 다양한 고체 형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물 분자의 수나 결정 형태가 상이한 무수한 변형이 청구범위에 포함됩니다. 이는 화학발명으로서 상당히 광범위한 청구입니다.
대법원은 "정작 이 사건 제1항 발명에 속하는 초분자 복합체의 실시례에 관하여는 명시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실시례와 청구범위의 정합성이 완전히 붕괴된 것입니다.
만약 명세서에 초분자 복합체가 형성되는 일반적 원리나 메커니즘이 기재되어 있었다면, 2.5수화물 이외의 형태도 그 원리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는 주장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명세서에는 복합체 형성 원리 자체가 기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통상의 기술자는 우선일 당시뿐 아니라 원심 변론종결 시에도, 2.5수화물과 물 분자 개수를 달리하거나 물 분자를 포함하지 않는 경우에 여전히 비공유 상호작용이 균형을 이루어 초분자 복합체가 형성될 수 있다고 인식하고 이를 제조할 수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초분자 복합체는 구조와 물성의 관계가 예측하기 어려운 분야입니다. 대법원은 판결 선고 시점에도 이 예측 불가능성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을 명시했습니다.
이 네 가지 근거를 종합하여 대법원은 실시가능 요건 불충족을 확정했고, 제1항을 인용하는 종속항(제3항~제11항)도 함께 무효가 되었습니다.
이 판결의 교훈은 명확합니다. 화학발명에서 청구범위에 포함되는 형태에 대해서는, 설령 하나라도 실시례가 없다면 그 청구항은 위험에 처합니다. 특히 명세서에 실시례가 소수인 경우, 그중 하나를 제외하면 나머지 청구범위 전체가 실시례 없는 공백이 됩니다.
제약·화학 특허에서 포트폴리오 전략은 필수입니다. 그러나 특허 간 역할 분담을 설계할 때, 개별 특허가 실시가능 요건을 독립적으로 충족하는지를 반드시 점검해야 합니다. 다른 특허에서 보호하는 물질을 제외했다는 사실이 이 특허의 실시가능성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초분자 복합체, 다형체, 비공유 결합 구조처럼 분자 수준의 변화가 물성에 미치는 영향을 예측하기 어려운 분야에서는, 더 폭넓은 실험데이터가 명세서에 기재되어야 합니다. 대법원이 "화학발명은 실험의 과학"이라고 반복하여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판결은 제네릭 업체 입장에서도 시사점이 큽니다. 오리지널사가 복수의 특허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때, 각 특허의 청구범위와 명세서 기재 내용 사이의 괴리를 정밀하게 분석하면 실시가능 요건 공격이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제네릭사(소송대리인 법무법인 화우)가 채택한 접근 방식이 정확히 이것이었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기재요건 법리는 다릅니다. 미국 연방순회항소법원(CAFC)은 2025년 1월 엔트레스토 관련 별도 특허(병용투여 청구)에 대해 기재요건 위반 주장을 배척하고 유효성을 인정했습니다(In re Entresto, No. 23-2218). 같은 기술 플랫폼이라도 청구범위의 내용과 각국 법리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글로벌 출원 시 각국의 기재요건 기준을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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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판결의 전체 분석 — 화학발명 실시가능 요건의 판단기준, 초분자 복합체의 기술적 특수성, 글로벌 대비 분석, 실무 체크리스트 — 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