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산 회사의 상표, 취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나

파산관재인도 상표 관리 의무가 있다 — 대법원 2024후11460

by 여인재 변리사

파산한 회사의 등록상표는 불사용취소심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대법원은 2026년 3월 12일, 이 물음에 단호하게 답하였다. 파산절차 개시만으로는 상표 불사용의 '정당한 이유'가 되지 않으며, 파산관재인이 상표 사용을 위한 적극적 조치를 취하지 않은 이상 등록취소를 면할 수 없다. 대법원 2024후11460 판결이 남긴 핵심 결론이다.


사건 배경 — 파산, 매각, 그리고 불사용취소심판

이 사건의 주인공은 조선무약합자회사가 보유하던 등록상표 제639053호다. 원형 안에 소나무 도안이 새겨진 흑백 상표로, 콩·두부·달걀·닭고기·우유 등 제29류 식품류를 지정상품으로 한다.

사건의 전말은 복잡하다. 조선무약합자회사는 2009년 회생절차를 개시했지만, 2010년 폐지결정을 받았다. 이후 두 차례 회생 재신청도 모두 기각되자, 2016년 4월 스스로 파산신청을 하여 파산선고를 받았다. 파산재단에는 이 사건 등록상표를 포함한 방대한 상표권 묶음이 포함되어 있었다.

파산관재인은 2017년 7월 법원의 매각허가를 받아, 조선무약합자회사 소유의 상표권 647건을 광동제약 주식회사에 37억 9,900만 원에 일괄 매각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광동제약은 37억 원이 넘는 대금을 지급하고 상표권을 매수했으면서도, 이전등록을 마치지 않았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22년 8월, 광동제약은 오히려 이 사건 등록상표에 대하여 불사용취소심판을 청구하였다. 매수인이 곧 취소심판 청구인이라는 전례 없는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여기에 또 다른 당사자가 등장한다. 기래물산 주식회사는 2009년 조선무약합자회사에 4억 원을 대여하면서 이 사건 등록상표에 근질권을 설정받은 채권자였다. 상표등록이 취소되면 담보가치가 소멸하므로, 기래물산은 참가인 자격으로 취소를 다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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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청구인의 방어 논리

파산관재인 측(기래물산 포함)은 두 가지로 맞섰다.

첫 번째 주장: 파산절차가 개시되어 있어서 상표를 사용할 수 없었다


두 번째 주장: 상표권을 광동제약에 매각하였으므로, 사용·수익 권한이 매수인에게 귀속되었다. 상표권자가 사용하면 오히려 매수인의 권리를 침해하게 되므로 사용할 수 없었다

요컨대, "당신이 사서 가져간 상표를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논리였다.


쟁점별 법원의 판단

쟁점 1 — 파산절차 개시는 정당한 이유인가?

상표법 제119조 제1항 제3호는, 정당한 이유 없이 취소심판청구일 전 계속하여 3년 이상 국내에서 상표를 사용하지 않으면 등록을 취소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여기서 '정당한 이유'는 종래 대법원 판례상 통제할 수 없는 객관적·외부적 요인에 따른 불가피한 사유여야 한다. 천재지변, 법률에 의한 수입금지 같은 경우가 그 예다. 영업 부진이나 법적 분쟁 우려 같은 주관적·내부적 사유는 인정되지 않는다.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파산절차 개시가 정당한 이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상표권자는 회생절차 개시결정 및 폐지결정, 두 차례 회생절차 개시신청 기각결정을 거쳐 스스로 파산신청을 하였다. 이러한 경위에 비추어 볼 때, 파산절차가 개시되었다는 사유만으로는 객관적·외부적 요인에 따른 불가피한 사유라고 보기 어렵다.

파산은 채무자의 내부적 경영 실패에 기인한 것으로, 외부에서 강제된 사유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논리다. 특히 이 사건에서는 채무자 스스로 파산신청을 한 사실이 부정의 근거를 더욱 강화하였다.


쟁점 2 — 파산관재인 선임 이후 판단 기준은?

이 판결에서 가장 중요한 법리가 이 부분이다. 대법원은 파산관재인이 선임된 기간에는 파산관재인을 기준으로 정당한 이유를 판단하여야 한다는 명시적인 기준을 제시하였다.

채무자회생법에 따라 파산재단을 관리 및 처분하는 권한은 파산관재인에게 속하므로, 파산재단에 속하는 등록상표의 상표권을 관리 및 처분하는 권한도 파산관재인에게 속한다. 따라서 상표권자가 파산선고를 받고 파산관재인이 선임된 기간 동안 그 등록상표 불사용에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는 파산관재인을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파산관재인에게는 채무자회생법 제486조에 따른 영업 계속 허가 신청이라는 선택지가 있었다. 법원의 허가를 받아 영업을 계속하였다면, 이 사건 등록상표를 지정상품에 사용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파산관재인이 이러한 허가신청을 한 사정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그 밖에 사용을 불가능하게 하는 다른 불가피한 사유도 없었다.

대법원은 이 점을 정당한 이유 부정의 핵심 근거로 삼았다.



쟁점 3 — 이전등록 없는 매각은 방어 수단이 되는가?

피청구인의 두 번째 주장인 '매각으로 인한 사용 불가'에 관하여, 특허심판원과 법원은 일관되게 이를 배척하였다.

상표법 제96조 제1항에 따르면, 상표권의 이전은 등록하여야 효력이 발생한다(상속 등 일반승계 제외). 매매계약의 체결만으로는 법적인 권리 변동이 생기지 않는다. 광동제약이 이전등록을 마치지 않은 이상, 상표권자는 여전히 조선무약합자회사이고, 파산관재인에게 사용의무가 남아 있다.


pdf_page6_img2_738x432.jpeg 등록상표

상표권의 매각은 질병 등 불가항력이나 법률에 의한 규제 등 상표권자의 귀책사유로 인하지 아니한 경우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불사용의 정당한 이유라 할 수 없다. (특허심판원 2022당2247)

매수인이 이전등록을 지체하는 사이에 상표가 취소되면, 대금을 지급하고도 권리를 취득하지 못하는 결과가 생긴다. 이 사건은 그 위험이 현실이 된 사례다.


실무 시사점 — 누가,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가

파산관재인 — 상표는 능동적으로 관리하라

이 판결은 파산관재인의 역할을 단순한 재산 환가·배당에 국한하지 않는다. 파산재단에 속하는 상표권의 가치를 보전하기 위한 조치가 가능했는지를 따진다. 구체적으로 다음 세 가지를 검토할 수 있다.

채무자회생법 제486조에 따른 영업 허가 신청 — 필요한 범위 내에서 상표를 직접 사용

제3자에 대한 통상사용권 설정 — 사용료를 받으면서 상표 사용을 유지

상표권 매각 시 이전등록의 신속한 완료 — 사용의무를 매수인에게 이전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이행하였다면, 이 사건의 결론은 달라질 수 있었다.


상표권 매수인 — 이전등록은 즉시 완료하라

광동제약이 37억 원을 주고도 상표권을 잃은 이유는 단 하나, 이전등록을 완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표권 거래에서 이전등록 지체는 단순한 절차적 문제가 아니다. 이전등록 전에는 제3자가 취소심판을 청구할 수 있고, 상표가 소멸할 수 있으며, 그 불이익은 고스란히 매수인에게 돌아온다.


근질권자 — 담보 상표의 사용 현황을 감시하라

이 사건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당사자는 기래물산이다. 4억 원의 채권을 담보하기 위하여 설정받은 근질권이, 상표등록 취소와 함께 담보가치를 완전히 잃었다. 근질권은 상표법상 사용의무를 이행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다. 상표법은 전용사용권자·통상사용권자에게만 사용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질권자가 불사용취소를 방어하려면 별도로 전용사용권 또는 통상사용권을 설정받아 실제로 상표를 사용하여야 한다. 근질권 설정 계약 시점에 이 사항을 명시적으로 약정해 두는 것이 현실적인 방어책이다.


파산절차라는 비상 상황도, 수십억 원의 매매계약도, 담보권 설정도 — 이 판결 앞에서는 어느 것도 불사용취소의 방패가 되지 못했다. 파산관재인이 할 수 있었던 것, 즉 영업 허가 신청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행동 하나가 판결의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는 점이, 이 사건이 실무에 남기는 가장 날카로운 교훈이다.

이 판결의 전문 분석과 관련 법령 정리, 유사 사건 비교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판결 전문 분석 보기 → sodami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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