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무드보드에 놓인 영화,

키쿠오와 슌스케 그리고 국보

by 요인영

사진 안에 남지도 사진으로 남기려는 시도도 거의 하지 않지만, 가끔은 불가능한 욕심을 품을 때가 있다. 나만 아는 친구의 표정을, 그때의 공기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을 사진으로 기록할 수 있다면.



어떤 감독은 배우의 최고를 끌어낸다고들 하지만 실상은 배우의 내부를 벗겨낸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땀이 흐르는 장면을 찍으면서 겉옷이 아니라 피부 자체를 벗기듯. 연기자의 인간적인 방어막을 흔들어 폭로하는 방식, 그건 일종의 예술적 해부에 가깝고, 보는 사람에게도 혐오나 피로감을 남긴다. 무자비하게 좋은 장면을 만들어내려는 태도에서는 영혼이 아니라 수치심과 과정의 폭력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국보의 이상일 감독은 달랐다. 그는 벗기지 않고, 열어서 보여줬다. 화면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이름 모를 정서와 함께.


영혼이란 단어에서 영적인 의미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더 어둡고 낯선 무언가를 눈빛으로 새겨 넣는 키쿠오와 슌스케. 낯섦을 예리할 만큼 맹렬한 시선으로 포착하는 감독 이상일.


강렬한 붉음을 중심으로 온갖 색을 흩뿌리는 가부키극은 일본 미학의 정점이라 불리는 와비사비(侘寂·わびさび)와는 완전히 다른 극단에 서 있었다. 전율 없이 볼 수 없었던 이유는 그 색채가 품은 광기와 탐욕 때문이었다. 마치 맹수의 입 앞에 서 있는 듯, 언제 뜯길지 모르는 공포가 지속되었고, 스크린 너머에서는 실제로 피 냄새가 번져오는 것만 같았다.


비평보다는 날 것, 해석보다는 체감이 먼저이기에 예술의 옷을 입은 광기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내게 영화는 삼중 필터를 지닌 매체로 다가온다. 시나리오를 거치고, 감독의 시선에 다시 번역되고, 카메라를 통해 최종적으로 스크린에 투사된다. 여러 겹의 막을 통과한 감각은 자연스레 날카로움이 둥글게 마모된다. 그래서 책이 곧장 내면에 침투하는 칼날이라면 영화는 가공된 감정이 흘러나오는 넓은 파이프에 가깝다. 닿기는 하지만 직접 맞닿는 느낌은 줄어든다. 뭉툭하다는 인상은 바로 이 구조적 거리감에서 온다.


국보는 그 뭉툭함을 뚫고 나왔다. 필터를 거쳐야만 하는 영화인데도, 배우의 눈빛과 색채의 폭주는 오히려 필터를 역류하는 듯한 압박으로 다가온다. 삼중 필터가 감정을 희석시키는 게 아니라, 이상하리만치 압력을 더해 무딘 해머처럼 나의 감각에 그대로 내려앉았다. 베이지는 않지만 깊게 멍이 들 듯.

손에 만져지지 않을 만큼 멀어져야 하는 감각이, 오히려 가까운 곳에서 뛰고 있었다. 샤미센의 소리는 순간순간 끊어지며 살갗을 스치는 듯했고, 타이코의 둔탁한 울림은 몸속 깊은 곳을 울려 균형을 흔들었다. 음표들은 벼랑 끝에 위태롭게 걸터앉아 논리나 규칙을 따르지 않았다. 그 기이한 구조가 끝내 귀를 붙잡았다. 듣는 행위가 아니라 묘한 해체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감각에 가까웠다. 기묘한 것이 귓전에서 심박처럼 내내 뛰었다.


온나가타는 현실의 여성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성을 일반화시킨 기운, 결, 정조 그리고 기이할 정도로 절제된 섬세함 같은 것을 추상화한 존재 같았다. 아름다우며 동시에 소름 끼쳤다. 무대 위의 배우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었다. 그냥 어떤 감정이고, 기억이고, 기운이었다. 그런 것이 정신을 내내 혼미하게 만들었다. 사람이 아니라 감정이 걸어 다니고, 살아 있는 인간이라기엔 너무나 완벽한 존재를 보고 있었다.


평범한 연기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문신 같은 것이 표정에서 스며 나왔다. 온나가타 자체인 배우의 등에 새겨진 문신 같은 것이었다. 알 수 없는 제3의 존재가 해석할 수 없는 표정과 언어로 스크린을 지배하고 있었다. 공포와 경이의 중간 지점에 홀로 남겨진 듯했다.


극 중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광기, 욕망, 질투, 비애, 집착들이 가부키 극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어떤 감각을 보고 있는 것인지. 배우의 몸, 음악의 진동, 표정의 기호, 무대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몸으로 전달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좀처럼 느낄 수 없는 공명을 느껴 그 여운이 길게 남아있다. 살갗이 쓸리듯 느껴졌다.


절제되어 있음이 오히려 폭발 직전의 압력을 고스란히 체감하게 하는 것이다. 가부키극이 추구하는 형식 안에 온통 감정이었다. 극에서 일본예술의 여백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의문해야 했다. 빈틈을 찾아볼 수 없는 정교한 형식미,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절제된 움직임. 그 틀 안에서 감정이 파문처럼 번졌다. 화면을 뚫고 바닥에 흥건히. 기묘하기 짝이 없는 경험이었다. 내면 아주 어두운 곳에 잠들어 있던 괴물의 어깨를 툭툭 건드려 깨우는 듯한 감각이었다. 가부키의 과잉과 절제가 보여주는 괴물 같은 형식이 만들어낸 또 다른 감각이었다.


"내가 지금 가장 원하는 건 너의 피야.
내겐 나를 지켜줄 피가 없어.
네 피를 컵에 담아 벌컥벌컥 들이켜고 싶어."


가끔 어떤 배역은 배우에게 한번 입고 벗는 옷이 아니라 이식된 인격처럼 작동한다. 벗어놓을 수 있는 외피가 아니라 연기를 끝낸 뒤에도 내부에 남아 인격 중 하나가 된다.


패왕별희 속 적경은 장국영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는 단순히 배역을 연기한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서늘하게 예감했던 자신의 그림자를 무대 위로 불러냈다. 적경은 장국영의 뒤편에 숨어 있던 어떤 비밀스러운 감정의 모양을 다시 호출했고, 그 감정은 한 편의 영화로 봉인되었다.


베티 블루의 베티는 베아트리스 달의 내부에 잠들어 있던 파괴적 사랑의 원형을 깨웠다. 원형은 하나의 형태가 아니라 상태였다. 베티는 스크린 위에서 광기를 폭발시켰지만, 그 광기는 사실 그녀가 늘 몸 어딘가에 저장해 온 감각이었다. 배우와 캐릭터의 만남에서 일어난 화학적 반응은 흔히 천재성이라 불리지만, 사실은 진짜 자아를 체험하게 하는 순간에 가깝다.


주홍글씨의 가영은 고 이은주의 정서적 밀도와 이상하리만큼 잘 맞아떨어진 인물이었다.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이 무대 위에서 증폭될 때, 두 개의 유령이 한 집을 차지하려는 듯 얽히고설켰다. 촬영이 끝난 뒤에도 싸움은 계속되었다는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어떤 배역은 끝나지 않는 감정의 잔여물을 몸 안에 남긴다. 연기의 종료는 촬영 종료와 일치하지 않는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일종의 균열이다. 악역이라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혼돈의 자아를 극단까지 밀어붙인 상태였다. 조커는 가면이 아니라 균열이었다. 균열은 틈이고, 그 틈을 통해 현실의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히스 레저는 캐릭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가 자신의 신경계를 침범하도록 허용했다.


도그빌의 그레이스는 니콜 키드먼에게 '역할을 끝냈다'는 감각을 허락하지 않았다. 연기란 자신을 숨기는 일이 아니라 도저히 숨길 수 없는 것들이 화면을 통해 드러나도록 허용하는 일일지 모른다. 좋은 연기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 안의 균열을 인정하는 용기일 수도 있다.


예술이 자아의 열어 둔 틈으로 스며들 때 어떤 배역은 배우의 심리적 면역체계를 통째로 무너뜨린다. 그 역할은 처음엔 작은 돌연변이처럼 조용히 기생한다. 그러나 감정이라는 먹이를 받는 순간 급작스럽게 증식한다.

배역은 배우의 내부에서 암세포처럼 커지고, ‘내가 연기한 나’가 ‘실제의 나’를 밀어내기 시작한다. 그때 배우는 배역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배역에게 서서히 잠식되는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네 피를 마시고 싶다는 대사는 육체적 충동의 고백이 아니라 이미 자아를 잃은 존재가 마지막으로 붙잡을 수 있는 감각에 대한 절규다. 피에 대한 갈망은 단순한 폭력성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까지 내어준 채 스스로의 경계를 잃어버린 괴물에게 나타나는 대표적 증상이다. 자아의 잔해가 타인의 생을 빌어 연명하려는 거의 병적인 반응 같은 것. 그는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도록 조작된 상태에 이르렀다.




국보는 일본 예술의 독특한 진화라는 맥락에서 그 진화의 한 부분을 눈으로 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지점에서 영화가 주는 감각은 단순히 가부키를 소재로 한 영화를 넘어선다. 가부키라는 예술 자체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돌연변이를 일으키며 발전해 온 존재라서 인지 마치 일본 예술의 진화 과정을 실시간으로 관측하는 실험실에 들어선 느낌이기도 했다.

영화 안에서 펼쳐지는 것은 전통 형식의 규율, 미세한 변화가 큰 의미를 갖는 구조, 그리고 전통을 깨뜨릴 때 생기는 아름다움과 파열감을 아주 세밀하게 시각화한다. 이건 역사적으로 반복해 온 패턴이기도 하다.

국보는 미세한 진화의 순간들을 극적 사건처럼 보여주기 때문에 내게 일본 예술의 DNA를 직접 목격한 듯한 환각적 감정을 주는 것이다.





일본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그간의 불신이 뒤죽박죽 남아있는 상태로 영화를 접했다. 국보라는 제목이 주는 과한 무게감, 가부키라는 생소하면서 희극적인 이미지까지 더해 이 영화를 보러 가는 이유를 재차 의문해야 했다.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인지 선입견을 확인하러 가는 것인지 애매한 상태였다.


직접 대면 형식인 극을 보러 가는 이유는 스크린이라는 다소 두터운 막이 거둬진 곳에서 배우와 혹은 연주자와 작품과 대면하기 위해서다. 흔히 오해하는 친숙한 이미지를 뚫고, 들끓는 에너지를 온몸 가득 받아 안기 위해 공연을 보러 간다. 즐긴다라기보다는 복층에서 끓어오르는 욕구를 듣기 위한 일종의 사냥에 가깝다.

다소 피곤한 만남을 지속하는 이유는 오로지 그들의 감춰진 욕망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문장이 실사화하는 장면을 목도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상일 감독이 그리고 싶은 것은 추한 것을 혹은 낡은 생각을 아름다움으로 변환하는 일이다. 그것은 오래 들여다본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오래 들여다보며 감각의 물꼬가 트이길 기다리는 적극적인 자세에서 나오는 자신감이다.


감독의 시선이 곧 와비사비였다. 오래된 전통, 과장된 희극성, 낡은 감각을 미적인 것으로 다시 말해 자유롭게 바라볼 수 있는 상태로의 전환이다. 와비사비는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이 아니다. 상처 난 표면, 오래된 것의 질감, 부서지기 직전의 선 같은 곳에서 감각을 발견하는 미학이다.














이미지 모두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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