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혐오,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란

by 요인영




그렇게 가을이 승리했음을 환호성으로 알게 된다. 한동안 비가 내려 계절임을 증명하는 가운데, 바깥에선 시끄러운 아이처럼 붉은 것, 노란 것이 소란스럽다. 비는 계절을 들리게 한다. 비가 내린 후 온도는 내려가고 냄새는 살아난다. 흙내음, 풀내음, 날카로운 금속성의 냄새가 감돈다.


페트리코어(petrichor).

가을을 못 견디는 나는 지구가 만들어 놓은 향수를 맘껏 흡입하며 겨울이 내민 손을 주저 없이 잡았다. 그리고, 말해지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말해보려 입을 달싹인다. 입김이 설렘처럼 피어오른다. 숨결이 독이 되지 않도록 속삭여본다.

파스칼 키냐르는 호모 루아이다.


호모 루아 Homo Ruah는 히브리말로 숨결 그리고 입김. 시인은 ‘입김을 가진 인간’이라 표현한다. 그것은 얼어붙은 손을 녹이고, 유리창의 성에를 흘러내리게 하며, 촛불을 끌 수도 있지만 목숨 하나 끄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참을 수 없는 악취, 몇 마디 말로 영혼을 만신창이로 만든다고도.(나희덕,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중 호모 루아에서 일부 발췌)


키냐르의 음악에 대한 혐오가 얼어붙은 손을 녹일지, 영혼을 만신창이로 만들지는 알 수 없다. 음악의 무해함이라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는 끝없는 속삭임. 그의 말을 단 한마디도 흘려들을 수 없는 까닭은 자신의 작품을 건 문학적 증명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미적 기호의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에도 경계 짓는 법이 없는 음향이라는 것은 인간들의 귀를 개인적인 것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공동체를 이루는데 기여’했다고 말한다. 그는 이들을 ‘순종자들’이라 불렀다. ‘비경계성과 비가시성’에 대한 키냐르의 두려움. 그에게 음악이란 인간의 감각 위에 세운 질서의 허구를 폭로하려는 철저한 사유였다. 그는 음악을 공리로 본다. ‘호흡과 피를 순식간에 집결시키는’, ‘집단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증명 없이 참이라 받아들이는 공리계.



칸딘스키 홍수.png Wassily Kandinsky <Compositions VI>, 1913


키냐르 글의 독특함은 어린 시절의 무언증에서 비롯되었다. 언어와 침묵, 결핍과 창조 사이에 있어 그는 자신이 무언증을 글쓰기의 도구로 다루었다. 앓던 기억과 두 어머니에 대한 잔상은 그의 문학적 상상력의 핵심 동력으로 작용한다. 그에게 언어는 이미 완성된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지지 않은 것, 드러나지 않은 것을 드러내기 위한 사투에 가깝다.





음악혐오

LA HAINE DE LA MUSIQUE

PASCAL QUIGNARD


음악은 무엇을 위한 수단인가? 음악의 본래 음조는 무엇인가? 어째서 악기가 존재하는가?
왜 신화는 자신의 탄생에 그토록 주목하는가?
어째서 인간은 1) 집단적으로 2) 원형 혹은 그와 유사한 형태로 음악을 들었는가? 이 마술적 원을 희랍어로 orchestra라 부른다. 이 청각적 원 혹은 원무는, ‘그때 그 시간 in illo tempore’이 시간의 질서 안에 새긴 것을 공간 속에 구현한다.

p.114


위의 질문을 증명하는 것은 키냐르 자신뿐이었다. 신화와 역사 속 인물을 소환해 상상력을 덧대어 답하며 그는 두려웠다. 음악이 인간의 가장 원초적 질서를 다시 불러낸다는 사실, 문명 이전의 시간 ‘그때 그 시간’을 현재 속으로 침입시키는 힘에 대한 공포였다. 음악은 미적 수단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 존재의 기원을 반복하는 장치였다.


어째서 청각은 지상의 것이 아닌 무언가를 위한 문구실을 하는가?
어째서 청각적 세계는 그 시초에서부터 다른 세계로 연결된 특권적 관문에서 이루어지는가?
존재는 공간보다 시간에 더욱 얽매여 있는가?
태양이 매일 선사하는 가시적이고 다채로운 세계보다도 존재는 언어와 음악과 밤에 더 깊게 관련되어 있는가?
시간이란 존재의 개화이자 그 어둠의 꽃에 대한 복종을 의미하는가?
시간은 존재를 겨냥하는가?
음악과 언어와 밤과 침묵이 그 화살인가?
죽음이 그 표적인가? p.120


청각은 단순한 감각기관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잇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문구실(門口室)이었다. 지상의 것이 아닌 저편을 향해 열려 있는. 눈이 빛에 묶여 사물의 윤곽을 붙잡는 동안, 귀는 경계를 넘어 시간의 흐름 속으로 스며들었다. 청각의 세계는 언제나 ‘이 세계’의 밖을 향했다. 그래서 가장 초월적인 문법을 지닌 기관이 되었다.


시각이 공간을 질서 짓는 동안, 청각은 시간을 구조화하였다. 그러나 구조는 언제든 흔들리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섰다. 키냐르는 이 불안정함을 두려워했다. 음악은 순간을 묶어 의미로 변환시키지만, 그 순간은 한순간이었다. 존재는 공간보다 시간에 얽매여 있었고, 개화와 복종, 탄생과 소멸이 한 호흡 안에 공존했다. 음악은 그 호흡을 연출하는 가장 잔혹한 예술로 작가의 눈에 비췄다.


눈은 눈꺼풀을 내리면 보는 것을 멈출 수 있다가도 들어 올리면 다시 볼 수 있다. 그러나 겉귀는 듣지 않으려 해도 스스로 몸을 접을 수가 없다. p.126


이 글에서 닫힘과 열림은 은유이다. 눈은 스스로 문을 닫을 수 있었고, 그러므로 선택적이다. 인간은 보지 않음으로써 세계로부터 잠시 물러날 수 있다. 겉귀는 자신을 접을 수 없고, 세계의 진동을 거부할 권리를 잃었다. 청각의 본질은 타자의 침입을 허용하는 감각’이다. 명확히 드러나는 저항 불가능성에 그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는 듣는다는 행위를 ‘자기 경계의 침식’으로 보았다. 항상 열려 있으므로 언제든지 인간의 내부로 침입하는.


어째서 음악은 "수백만의 인간을 처형하는 데 연루"되었는가?
음악은 이에 "가장 적극적으로" 관여했는가?

p.191


그의 문장들은 아포리즘이며 거의 주술적인 밀도를 지닌다.


누군가의 명령에 반응하는 음악은 명령의 언어가 된다. 수용소의 음악은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리듬은 죽음의 속도를 정돈했고, 멜로디는 고통의 박을 무심히 셌다. 음악은 명령의 형태를 취한 쾌락이며, 쾌락의 모습을 한 통치였다. 음악은 청자의 자율적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다. 귀는 눈처럼 닫을 수 없으며, 리듬은 신체에 그대로 꽂힌다. 이 지점이 다른 예술과 달리 인간의 육체적 복종을 즉각적으로 유발하는 곳이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음악이 동원된 이유도 바로 이 지점이었다. 키냐르는 폭력의 구조적 리듬과 결합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음악은 감정의 순화나 위로의 수단이 아니라, 질서의 구축과 복종의 내면화를 수행하는 기술이었다. 그가 언급한 플라톤은 조화는 자유로운 다성의 공존이 아니라, 일정한 질서에의 복속이다. 라고 말한다. 프리모 레비가 수용소의 음악을 ‘지옥 같다’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혔다. 음악은 고통을 완화하는 최면이자, 사유를 마비시키는 리듬이다. 그것은 죽음의 현실을 감각적으로 미화함으로써 잔혹함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든다. 이때 음악은 폭력의 미학적 포장, 지배의 쾌락화로 넘어간다.



칸딘스키 대홍수.png Wassily Kandinsky <Improvisations28>, 1913


내 손은 비어 있다.
나는 명령도, 의미도, 평화도 견딜 수 없다. 나는 시간의 여파를 그러모은다. 나는 내가 납득할 수 없었던 과거와 현재의 규율들은 찢어발긴다. 로고스는 본래 수집을 뜻하는 단어였다. 나는 이내 사라지고 마는 빛의 틈새와 파편들을,
'죽음의 구간'을,
불청객과 헤매는 이를,
동굴 속 비천한 자들을 모은다. 밤은 세상의 밑바닥이다. 그 속에서 모든 것이 비언어적인 것을 향한다. 나는 규칙도, 노래도, 언어도 없이 세계의 근원을 떠돌아다니는 것들을 복원시키려 했다. 무가치한 포식 행위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했다. p.256








나눌 수 없어 덧대는 글 혹은 읽히길 원치 않아 아래 숨는 글.


바다의 문법과 달의 농담


그는 어떤 문장도 강조하지 않았다. 전체 문장이 하나의 유기적인 흐름이 되도록 어떠한 것도 스스로를 혹은 독자를 강제하지 못하도록 깊은 강처럼 소리 없이 흘렀다. 그러던 그가 부호를 사용했다. 유일하게 사용한 부호에 담긴 것은 누군가와 유일하게 소통하던 의미 없는 문장이었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을, 그래서 의심할 수 없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문장.


지금도 흐르고 있을 것이다. 책장을 덮은 후에도 오래도록 책을 놓지 못하는 나는 도무지 끝나지 않은 글을 쓰는 그를 거부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 그래서 가끔은 글을 사랑하는 것인지, 작가를 사랑하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창살 없는 감옥은 그러므로 은유가 아니다. 죄목도 없는 나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글 앞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아름다움은 내게 그런 의미이다.


바다의 문법을 이해하고 나면 인간은 그곳으로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어두운 밤 지속되는 달의 농담은 바다로 걸어 들어가는 이의 눈앞에서 특유의 미소를 짓는다. 같은 아름다움을 공유한 자의 은밀한 미소이다.


세계는 문법으로 구성되어 있음이다. 사물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쓰인다. 바다는 그 문법의 가장 오래된 화자이다. 그는 반복을 통해 말하고, 해저의 갱 같은 깊은 침묵을 통해 사고한다. 조석의 리듬은 문장의 규칙이며, 파도의 부서짐은 의미의 변주라 한다. 파도는 문장을 완성하려다 번번이 실패하여 그 연속이 바다의 언어가 된다.


달은 이 문법의 바깥에 존재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바깥이랄 수 없다. 달은 인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구두점을 통해 바다의 문장을 조정한다. 대화와 간섭 그러면서 타협이 불가능한.

달은 바다를 끌어당기지만 둘은 결코 닿을 수 없다. 그 거리는 이해의 거리이자 오해의 거리이다. 충돌 대신 변조를 택한 존재들은 사랑 앞에 침묵한다.


사랑이 언어를 통해 자신을 방어한다면, 자연은 불안정한 반복을 통해 자신을 지속한다. 그래서 그토록 원했던 것이다.


내가 응시한 바다는 눈이 멀어 있었다. 허기진 죽음에게 눈을 바치고 얻은 것이 언어이기 때문이다.


한스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는 자신의 목소리를 마녀에게 주고, 죽음을 맞이하여 파도의 물거품이 된 이후, 목소리를 되찾고는 말한다.

"나는 누구에게 가지?"

p.263






덧붙이는 글.

책을 여러번 다시 읽어도 가슴이 답답하다는 것은 체했다는 거겠죠?

소화하기엔 너무 벅찬 내용이었어요. 잘 파묻었다가 10년 후에 다시 읽겠습니다.

정리 하다 토할 뻔해서 다 쓰지도 못했습니다.


저게 모야. 아이고 속상해라.


올리기로 한 책이 아홉권이었고, 마지막이 파스칼 키냐르의 책이라 일단 올렸습니다. 주말에 시험이 있어 공부에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무드보드>에 연재글을 올리기 전에 책에서 단어를 하나 낚습니다.

앤카슨의 문장에서는 '문학적 지연'이었고, 파스칼 키냐르의 문장에서는 '문학적 증명'이었습니다. 그것을 공리와 연결지어 글쓰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책에서 인용한 수많은 신화와 역사적 사건, 종교와 일화들을 키냐르는 짧지만 인화성이 강한 특유의 문체로 빚어낸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의 신랄한 문장에 휘둘리지 않을 때 다시 읽고 써보겠습니다. 작가의 문장은 읽을 땐 좋은데, 읽고 나선 문제를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그의 입김은 제겐 독인가봅니다.


외딴 섬 같은 저의 브런치에 찾아와서 글 읽어주시는 분들 항상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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