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실레의 붓을 빌려오다

by 요인영



에곤 실레의 <네 그루의 나무, 1917>


실레의 자연을 그린 회화는 무표정하다.

나무 하나는 홀로이 다른 시간 속에 서 있다. 앙상한 가지들은 마치 뼈처럼 뻗어 있고, 배경은 텅 비어 있다. 나무는 죽음을 직감한 듯하지만 여전히 서 있다. 침묵 속에서 아주 느리게 시간을 통과한다.


그 한 그루의 나무가 인간이 되었다.


에곤 실레 네 그루의 나무 1917.png Egon Schiele, Four Trees (1917)



실레의 나무가 억겁의 세월 동안 인간이라는 짧은 형태로 살아본 것.

살과 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욕망의 불길을 다 겪은 뒤 다시 식물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그 귀환의 여정이 실레의 작품 속에 그리고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동시에 새겨져 있다. 실레의 나무는 인간의 고통을 알게 되었다. 그의 선은 땅으로부터 나온 뿌리이자 몸의 신경이다. 그 선이 떨릴 때 그것은 영혜의 몸이 떨리는 순간과 맞닿는다.


한쪽은 나무가 인간이 되는 꿈을 꾸었고, 다른 한쪽은 인간이 나무로 돌아가는 꿈을 꾸었다.

두 꿈이 교차하는 지점에 불안과 평온이 한 몸처럼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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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레의 선은 아름답지 않다. 오히려 칼날 같다. 살갗을 스치며 내면을 드러내려는 듯 종이를 긋고 또 긋는다. 그 선들이 모여 만들어낸 건 육체의 형상이 아니라 존재의 불안이다. 화가의 세계에서 아름다움은 불안으로 불린다.


실레의 인물은 앙상하다. 비례는 무너지고, 피부는 창백하게 마르고, 뼈와 근육이 낯설게 드러난다. 인간이지만 이미 인간을 떠나 있는 몸, 그 왜곡된 형태 속에는 사회가 강요한 이상을 거부하는 자의 고집이 있고, 고통이 있다. 벌거벗은 몸은 방어할 수 없는 진실처럼 놓여 있다. 배경은 텅 비어 있다. 그 공허함 속에서 인물은 마치 공기 중에 매달린 듯 위태롭다. 발붙일 자리 없는 인간, 어쩌면 그것이 실레가 그린 모든 존재의 초상인지도 모른다.


한강의 문체는 그런 실레의 붓질을 언어로 옮긴 듯하다. 영혜의 몸은 점점 식물의 형상으로 변해가고, 그 과정을 묘사하는 문장은 이상하리만치 차갑다. 감정은 절제되어 있고, 문장은 얇게 벼려진 칼처럼 날카롭다. 실레가 선으로 육체를 파고들었다면, 한강은 언어로 내면을 파고든다. 작가의 문장은 피가 흐르지 않는다. 대신 피가 빠져나간 자리에서 고요가 응고한다. 영혜는 고통을 벗 삼아 육체를 비워내고, 그 빈자리에 나이테를 드러낸다.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뿌리를 내리고 싶어하는 존재로의 회귀.


채식주의자의 세계에서도 배경은 비어 있다. 가족, 사회, 세계 모두 영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떠돌고, 그녀의 내면은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그 고립은 실레의 허공과 닮았다. 아무도 닿을 수 없는 곳에서, 그녀는 서서히 사라지며 완성되어 간다.


그의 인물들이 정면을 바라보며 나와 눈을 맞출 때 나는 그 눈 속에서 어떤 질문을 마주한다. “살아 있음이란 무엇인가.” 그들은 이미 반쯤 죽어 있거나, 아직 다 태어나지 않은 존재 같았다.


그리고 인간이 된 나무가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부드러운 전이, 나무가 인간이 되는 일이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식물이 되고 싶은 인간.

영혜는 그 경계 위에 서 있다.


무언가 걸린 듯 가슴이 답답하지만, 그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끊어진 식물의 감각이다. 뿌리로부터 멀어진 존재의 혼란. 그녀에게는 피와 살, 그리고 살육의 냄새가 밀물처럼 밀려든다. 세상의 폭력이 한꺼번에 밀려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속삭이듯 절규한다.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 쉬게 할 수 없어.

p.61


식물의 느린 시간을 감각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인간의 초 단위 시간 대신 햇빛의 각도와 수액의 흐름으로 시간을 세는 세계. 그 길게 늘어진 시간의 줄기 속에서, 영혜는 인간의 언어를 잃고 식물의 감각으로 살아간다.


나는 마치 타인인 듯, 구경꾼들 중의 한 사람인 듯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나는 저 여자를 모른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p.64


그녀는 점점 인간의 감각에서 멀어진다. 햇살 아래 토플리스로 선 영혜의 몸은 더 이상 부끄러움의 대상이 아니다. 그녀는 광합성의 방식으로 세상을 느끼고, 바람의 숨을 내쉰다. 나무로서의 감각을 회복하는 순간 그녀의 육체는 훼손되었지만 그 파괴의 끝에서 그녀는 나무로 회귀한다.

원존재로의 귀환이다.


물어뜯긴 동박새의 몸은 인간으로서 영혜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것은 인간성의 상실이자, 귀환의 징표다. 나무는 인간으로서의 탐구를 끝마쳤다. 사랑, 폭력, 욕망, 배척.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감각을 통과한 뒤 이제 다시 나무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실레의 앙상한 나무가 억겁의 세월 속에서 잠시 인간으로 깨어났다가 다시 뿌리로 귀속되듯 영혜의 육체도 그 오래된 순환 속으로 스며든다.


동박새의 형상은 고통스럽지만 파괴가 아니라 전이의 흔적일 뿐이다. 인간의 껍질이 벗겨진 자리에서 식물의 감각이 되살아난다. 이제 그녀는 피도, 살도, 언어도 필요 없는 존재가 된다.


식물은 인간의 언어와 윤리, 욕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존재다. 움직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확장하고, 침묵하지만 모든 것을 덮어버릴 만큼 끈질기게 번식한다. 인간은 식물을 소유하고 이용한다고 믿지만 실은 식물이 인간의 시간을 초과한 질서로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보다 오래 살고, 더 깊게 뿌리내리고, 우리가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남는다.


식물은 인간의 전복 그 자체다.

그건 단순한 반항이 아니다. 인간 중심적 감각의 붕괴, 즉 인간이 더 이상 중심이 아닌 세계로의 귀환이다. 식물은 욕망하지 않지만 생명을 지속한다. 그 지속은 인간의 욕망보다 훨씬 잔혹하고 오래간다. 욕망이 폭발하고 사라지는 순간의 불꽃이라면 식물의 생명은 그 불꽃이 꺼진 뒤에도 남아 있는 불씨다.


인간을 채색한다는 것은 전복의 순간을 채색한다는 뜻이다. 인간관계의 법칙이 무너지고 남은 자리에서 선 몽고반점 속 '그'는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믿는다. 영혜의 몸에 식물을 이식하듯 욕망을 옮긴다. 생명과 욕망이 맞닿는 가장 수동적이면서도 격렬한 전이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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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수동적인 침범

몽고반점은 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지극히 불편한 소설이다. 누군가의 몰락을 조용히 기다리는 식물의 침범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선이 아니라 식물의 시선으로 읽어야 한다. 존재는 자신보다 느리고 연약하다고 여기는 생명에게 쉽게 자리를 내어준다. 죄를 짓는 순간조차 그것이 자신의 의지라 믿는다. 이 소설은 오랜 시간, 존재의 쇠락을 바라본 식물의 시선으로 읽혀야 한다.


나무는 알고 싶었다.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입가 가득 피를 묻히며 살점을 뜯는 그들을 보며, 마치 지구상에 존재해선 안 될 생명을 탐구하듯이 인간을 궁금해했다. 영혜는 평범했다. 평범함은 침범의 가능성을 품는다.


부드러운 전이를 가장해 비가역적인 침범을 감행하기에 충분한 표식이었다.


식물이 꾸는 악몽이라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식물이 인간의 입을 빌려 꿈을 꾸었다 말한다. 그것은 수만년 동안 인간을 지켜본 식물의 무감한 시선이었다. 우리는 그 무감함에 인간의 언어를 덧칠해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해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잔인해진다. 인간의 연민은 이토록 나약하고 하찮다.


영혜에게 형부는 그저 가장 손쉬운 도구였다. 몽고반점은 그 유혹의 씨앗, 욕망의 홀씨였다. 그것은 발아하려는 식물의 오래된 습성이자 생명의 유혹 그 자체다.


몽고반점은 태어날 때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흔적이다. 그 흔적이 다시 드러남은 원형적인 기억의 복원, 자연으로서의 존재가 되살아나는 신호처럼 보인다. 살갗 위에 생명의 오랜 기원이 푸르게 번져나온다.


영혜는 말을 잃고, 먹는 것을 거부하고, 햇빛과 물만을 받아들이려 한다. 그 과정은 문명에서 자연으로, 동물에서 식물로의 역진이자 회귀다. 식물의 관점에서 이 반점은 빛의 상처라 할 수 있다. 식물은 빛을 먹지만, 그 빛에 끊임없이 타들어간다. 영혜의 몽고반점도 그런 빛의 고통의 자국일 수 있다. 인간의 살 위에 새겨진 살아 있으면서 타는 존재의 흔적일 수 있다.


그녀의 마지막은 세상과의 단절이 아닌 자연과 연결되는 방식인 것이다.










덧붙이는 말


퇴고하면서 썼던 문장을 여러 번 되씹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취할 것만을 남기고, 원문장에 넣어야 했지만 시선이 뿌리처럼 얽힌 자국을 드러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퇴고의 자리에 제 시선의 혼란을 보여주고 싶어 그냥 두었습니다.


채식주의자를 읽을 때면 번역된 문장을 읽는다. 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무엇을 번역한?

작가는 밝힐 수 없어,

네 그루의 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봅니다.


실레의 붓을 빌려 왔을 겁니다.

식물의 음성이 들린다는 고백은 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은 그런 곳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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