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아름다움,

당신도 누군가의 삶에서 지연되고 있나요

by 요인영



<남편의 아름다움>은 바람난 남편을 시적으로 욕하는 책이다.라고 말하면 모욕적일까? 이런 식으로 욕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욕지거리를 입에 달고 살아도 좋을 듯한데.


지연 遲延.

지연을 말하고 지연을 이용하라 하니 같은 의미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사진이나 그림 대신 지연을 이용하라-유리로 된 지연
산문으로 된 시나 은으로 된 타구 같은.”
뒤샹이 한 말이다.
<총각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마저>


이 짧은 은유는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원리라 할 수 있다. 작은 퍼즐 조각 하나에 불과하더라도. 그럼에도 즐거운 독서가 된 까닭은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그건 비밀이랄 것도 없다. 나는 아름다움 때문에 그를 사랑했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 그가 가까이 온다면 다시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아름다움은 확신을 준다.’(p12) 바로 이 문장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연(시간 자체)과 문장 속에 ‘유리로 된 지연’은 완전히 다른 의미였다. 앤 카슨의 글은 상상하게 한다. 의도의 실종과 무목적성,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이 삶의 진리이자 이유가 된다는 것.


래서 생각은 아름다운 연애라 여겼던 어떤 시점으로 빨려 들어간다. 스무 살의 연애는 순수하고, 치열하며, 맹목적이었다. 얽힌 혀에 전율하기도 전에 이가 부딪는 감각에 얼떨떨한, 서로가 서로에게 성인임을 증명하는 열에 들뜬 의식이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사랑이라 믿은 그 감각에 지나치리만큼 열중했다. 그와 극적이며 짧았던 연애 후에 슬펐던 이유는 그를 볼 수 없다는 사실보다 눈을 감고 느꼈던 감각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것이 유리에 갇힌 채 지연된 슬픔 속에 나를 두었다. 그 감각만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도 유리처럼 투명하게 남아 끊임없이 관통하며 뒤늦게 도착한다.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앤 카슨의 지연은 시간과 관념이 아닌 무절제한 감각을 요구한다. 감각을 극도의 날것으로 내미는 장치이다. 작품 속 아내는 감정을 즉시 해명하지 않고 계속 붙든다. 언뜻 보면 이것이 관념적 사유의 지연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 틈에서 몸의 감각, 기억 그리고 상실의 감각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뒤샹의 ‘은으로 된 타구’는 순간적으로 튀어 올라야 할 공이 은이라는 무게를 얻고 무겁게 느리게 더 감각적으로 지연된다. 카슨의 지연은 이런 의미이다. 의미의 지연으로 인한 감각의 과잉 상태.


‘아내’에게 ‘슬픔은 너무도 습관적이라’ 그 반복과 일상화 속에서 감정의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한다. 반복과 관성 속에서 천천히 도착한다.


여기에 뒤샹의 작품까지 연결하면 ‘지연의 형상화’가 완성되는 것이다. 마르셀 뒤샹의 작품 <총각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이른바 <큰 유리>는 거대한 유리판 위에 결혼과 성적 욕망, 기계 장치와 인간관계를 중첩해 배치했다. 결코 완결되지 않는, 파편화된 장치는 지연된 만남, 끝내 닿지 못하는 접촉이다. 유리는 단순한 화면이 아니라, 관계를 붙잡아 두고 지연시키는 하나의 조건이 된다.


그 그녀 우리 그들 당신 당신 당신 나 그녀 그렇게 대명사들이 씻음이라는 이름의 춤을 시작한다 작은 정적 뒤에는 작은 동요가 따르고 큰 정적 뒤에는 큰 동요가 따른다는 연금술적 사실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춤 p.25


못돼 처먹었던 과거의 어느 날. 낯짝만 반반한 그 아이는 거짓말을 해야 했다. 모든 것에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한 사람에 충실하기에는 자극의 역치가 낮았다. ‘우리 사이엔 깊은 슬픔이 있고 그 슬픔은 너무도 습관적이라 나는 그걸 사랑과 구분할 수 없어.’(p27) 카슨은 감정과 언어, 의미의 명확한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리게 하여 기억을 상기시킨다.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 속에서 제목이 낯설지 않았던 것은 고정된 주어가 없는, 서로 뒤엉킨 감정과 의도만이 있는 관계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억 속에서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슬퍼하는 그는 끝없이 바뀌며 서로 교차된 관계 속에서 나를 잊었을까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내 옆자리는 누군가가 아니라 누구든 될 수 있는 자리, 고정되지 않은 관계의 역할들이 언어 안에서 춤을 추는 자리였다.


당신은 깨끗한 삶을 원하고 나는 더러운 삶을 산다는 흔한 얘기지. 글쎄.(p27)


모든 신화는 풍부해진 형태이자,
두 얼굴을 지닌 것으로,
그 주체로 하여금 겉과 속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이중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해 준다.
그런 이유로 고대에는
모든 시인이 거짓말쟁이라는 관념이 존재했다.
그리고 시의 진정한 거짓말들로부터
하나의 질문이 흘러나왔다.

무엇이 정말로 말과 사물을 연결하는가?

p.45



끝도 없는 거짓말에도 양심은 작동하지 않았다. 체념하듯 돌아서던 그가 남긴 것은 내 얄팍한 위로의 무게였다. 납작하게 꺼진 지갑과 무게를 잃은 반지 하나. 거짓의 최후는 작품 속 ‘두 얼굴’이 말해 주었다. 겉과 속, 외형과 본질, 말과 의미의 불일치. 난 어쩌면 내가 말하는 모든 순간과 말이 진심이었다. 다만 진실을 다른 방식으로 포착하여 말하고 행동했던 것일 뿐. 이것을 거짓말쟁이의 진심이라고 말한다. ‘모든 시인이 거짓말쟁이라는 관념’은 나의 경험과는 무관하지만, 이것은 시가 가진 고유한 힘일 수 있다. 허구적인 진술이지만 동시에 존재의 진실을 드러내는 창조적인 허구임을 말한다. 말과 사물 사이가 언제나 불일치하듯, 인간관계 역시 표정과 진심, 약속과 행동이 어긋난다. 그래서 말과 사물은 시대에 따라 의미를 달리하며 변해가지만, 인간관계는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전형적으로 흘러갔다.


짧은 연애 이후 더 짧은 연애가 어깨를 부딪히듯 지나갔다. 그리고 시집을 선물하는 남자와 만났다. 난 그것을 문학적 겉치레로 여겼다. 소설만이 문학이라고 여겼던 그때에 시는 거추장스러운 레이스 같은 것이었다. 그의 진심은 시를 이해하지 못한 만큼이나 내게 단 한 줄도 닿지 못했다. 그럼에도 1년을 넘게 만났던 것은 그의 눈빛 때문이었다. 그는 시선을 빗기지 않았다. 물 한 모금도 나눠 마시는 나를, 사소한 결핍을 허세처럼 두른 나를, 골똘히 들여다봐주었다. 그 눈빛이 의미하는 바가 궁금해서 머뭇거렸다. ‘설명되지 않는 것의 힘은 무엇인가. 나는 그에게 500킬로미터는 되는 먼 길을 어떻게 왔는지 묻지 않았다. 묻는 건 규칙을 깨는 일이 될 테니까.(p57)


'하룻밤 사이에

내 삶의 모든 벽들에

절대로 설명을 해주지 않는 말이 새겨졌다.

설명되지 않는 것의 힘은 무엇인가.(p57) 그는 삶을 둘러싼 나의 외벽에 부드러운 방식으로 침범했다. ‘절대로 설명을 해주지 않는 말이 새겨졌다’는 것은 영구적 흔적, 의미를 닫아버린 언어, 해석할 수 없는 언어, 그의 눈빛은 과연 소통이었을까 의문하게 된다. 이런 해석 불가능성이 아직까지도 그에 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여기서도 작가의 지연은 옷자락을 끌고 나타난다.


그를 용기 없는 사람이라 무심히 단정 지었다. ‘형체의 살아 있는 관절에 맞추어 잘라라 사랑에 관한 연설을 해부할 때’(p67) 그러나 그는 다만 자신의 사랑을 설명하거나 정의하려는 언어적 시도를 거부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형체의 살아 있는 관절에 맞추어 잘라라’ 하는 것은 억지로 찢거나 임의로 자르는 게 아니라, 대상 자체가 가진 구조와 관절을 따라가는 것이다. 내가 가진 이해할 수 없는 추상성을 그는 본래의 결대로 지켜내려 했을 것이다. 그것이 그를 무참히 단정지은 나를 사랑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억지로 이해하거나 의미를 강제로 붙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틈과 관절을 더듬어가며 천천히 드러내는 것.


늘 그렇듯 형식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작가의 문장을 끝도 없이 따라 쓰고 싶었다. 작품이 내 안에 새겨질 때까지. 이 글을 통해 떠오르는 흔적들은 사적이고 구차하여 거리낌이 없지만, ‘유리창을 뚫어지게 보다가 그만 눈에 흉터가 생겨버린’(p99) 아내의 끝나지 않을 지연은 마침표를 찍어주고 싶었다.


당신은 그것을 무엇으로 보는가 방으로 혹은 스펀지로 혹은 실수로 칠판 반을 지워버리는 부주의한 소매로 혹은 우리 마음의 병에 찍힌 부르고뉴 상표로 보는가 기억이라 불리는 춤의 본질은 무엇일까 p.107


당신도 어쩌면 누군가의 삶에서 여전히 지연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기억은 단일한 형태로 정의될 수 없다. '방'처럼 닫히고 열리는 공간이기도 하고, '스펀지'처럼 스며드는 매체이기도 하며, 때로는 '실수로 칠판 반을 지워버린 부주의한 소매'처럼 소거의 흔적만 남기기도 한다. 혹은 '와인 병의 상표'처럼 지워지고 닳아버리지만, 향기를 동반한 채 감각의 무늬로 새겨지기도 한다.


카슨이 제안하는 이 비유들은 기억이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변형되는 춤임을 말해준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게 남겨진 나는 방일 수도, 스펀지일수도, 지워진 흔적이거나 낡은 상표일 수도 있다. 기억의 본질은 확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 불확정성과 설명되지 않음이 지연의 방식으로 작동하며, 누군가의 삶 속에서 나를 여전히 붙잡아두는 것이다.





덧붙이는 말.

지루할 정도로 긴 글을 쓰고 싶었어요. 앤 카슨의 형식이 모호한 글과 기억이 불분명한 과거를 계속 엮고 싶었어요. 월요일이 화요일이 되고 그래서 수요일이 되었습니다. 더 엮다가 내일이 될 것 같아서 여기서 멈추었습니다. 시인은 '하늘에서 내려온 밧줄이 나를 비존재로부터 끌어올려주기를, 프루스트는 지나간 날들을 슬퍼하곤 했는데, 당신도 그런가? 그것에 윤을 내라.'라고 말해요. 이것은 문장 그대로의 의미라 자체로 명상문 같았습니다. 제게 작가의 글은 통을 돌리거나 흔들면 조각들의 조합이 계속 변하는, 거울의 반사로 인해 매번 다른 기하학적 무늬가 생기는 만화경 같았습니다. 한쪽 끝의 구멍을 통해 들여다보면 안의 세계가 무한히 변화하는 아름다운 패턴이 보입니다. 끝없이 변화하는 아름다움을 보기에 이보다 더 좋은 도구는 없을 것입니다. 볼 수 있는 시야는 작지만 어쩔 수 없이 하염없이 보고 또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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