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꿈이 있다면 이 형식을 빌려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과 정반대의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안정이 아니고 불안정, 질서가 아니고 혼란, 집단이 아니고 개인, 협조가 아니고 고행, 타협이 아니고 반항, 즉 반사회적 존재이다. 그 입장에 서봐야 보이지 않던 고통이 보이고, 갈등이 생기고, 불꽃이 튀는 것이다.
- 마루야마 겐지
때로는 밑줄 긋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책이 있다. 독자는 곧 연필을 거두고 읽기에 몰입한다. 문장이 망막에 깊게 새겨진다. 그의 문장은 비문飛蚊처럼 남는다.
무심코 펼쳐 들어 읽어도 한 편의 시 같은 <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는 일상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키는 일을 위로라 말한다.
이 책은 영원히 변치 않는 주문에 걸렸다. ‘같은 사람이, 다른 경험을 하고, 다시 읽어도’ 그때의 그 감각을 고스란히 되돌리는 놀라움을 준다. 세월이 흘러도 변질되지 않고, 언제 다시 접해도 처음의 감각을 되살려주는 문장의 힘이다.
감정을 과장하거나 수사로 꾸미지 않고, 거칠더라도 숨김없는 언어를 구사한다. 이런 투박함이야말로 시간을 넘어서는 힘을 낳는다. 꾸며낸 아름다움은 쉽게 낡지만 가려지지 않은 진실은 세월의 흔적을 지운다. 간결한 문장 속에는 본질에 닿는 힘이 숨어 있다. 끔찍해서 눈을 돌리고 싶은 순간에도 시선을 떼지 못하는 까닭은 그 모습이 내 발끝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본질과 그림자를 한 획으로 완성한 문장은 군더더기가 없기에 시간이 흘러도 형태를 유지한다.
삶과 죽음, 욕망과 폭력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비유나 추상적 개념은 오히려 불필요하다. 구체적이며 감각적이다. 이것이 '경험이 달라진' 후에 읽어도 여전히 생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존재의 탐구는 시대가 변해도 낡지 않는다. 반대로 이념과 개념의 언어는 순간의 유행에 기대어 소비되고,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진다.
파문은 아름다움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잔혹하다.
‘끔찍한’이라는 형용사가 제 구실을 하려면 그것이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나야 한다. 우리의 이웃, 일상의 도구, 매일 지나치는 장소 그리고 가족.
끔찍하게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서 자행된 비극적인 사건.
붓에 오물을 적셔 칠한 듯한 병풍 속의 눈먼 법사는 비파를 타고, 그 소리는 기이하다. 이것이 작가가 그리는 세상의 모습이다.
봄 병풍의 그림은 중천에 걸려 있는 흐릿한 달, 동풍에 흔들리는 강변의 갈대, 그리고 걸식하는 법사다. 휘늘어진 버드나무 둥치에 털썩 주저앉은 법사는 달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비파를 타고 있다. 두 눈이 멀어 광대한 강변 일대에 쏟아지는 푸르른 달빛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때가 꼬질꼬질한 그의 오체는 삼라만상을 그대로 포착하고, 무궁한 시간과 공간에 녹아들어 있다. 팽팽한 현의 떨림은 미적지근한 밤기운을 자극하여 봄을 증폭시키고, 병풍 옆의 초라한 이불속에 기어들어 있는 소년의 아직 두부처럼 여린 영혼에도 깊이 스며든다. 벗짚을 채운 요와 고이노보리를 부셔 만든 이불속 아이는 바로 30년 전 이제 막 열 살이 된 나다.
비약이 심한 것은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내가 느끼는 감각에 비약은 없다. 폭력이 일상에서 수시로 재현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견딜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런 재현이 일상으로 소비되는 세상에 살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평범하게 숨을 쉴 수 있는 것일지도. 폭력은 소설의 과장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 호흡하는 공기 속에서 작동한다. 단지 문학은 그것을 더 선명하게, 더 극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그래야 우리에게 읽혀 생명력을 잃지 않을 테니.
이 발언은 위험하다. 폭력이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재현될 때 우리는 모순적으로 안도한다.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척하는 세상보다, 그것을 드러내어 직시하게 하는 언어 속에서 오히려 견딜 힘을 얻는다. 문학은 폭력의 재현을 소비 가능한 감각으로 바꾸어 놓았다. <달에 울다>는 그런 의미에서 더 나쁠 수 있다. 소비의 감각을 예술의 언어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지금 이 문제를 인식하였을 뿐이다. 폭력이 지나치게 번식했다. 예전에는 주먹과 칼, 혹은 노골적인 억압이 폭력의 전형이었으나 이제는 작은 강요도 폭력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언사도 폭력이라 불린다. 나는 내 의지에 반해 삶이 흔들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기에 타인의 의지를 폭력이라 느낀 경험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폭력은 그보다 훨씬 가볍고, 훨씬 자주 호출된다.
성찰인지, 남용인지.
폭력이 난립한다. 다양한 표정을 인식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언어가 자기 방어를 넘어 타인을 무시하는 도구로 쓰일 때 우리는 또 다른 개념을 낳는다. <달에 울다>가 보여준 비극의 재현은 나를 견디게 했지만, 내가 혹은 네가 남발하는 ‘폭력’이라는 말은 정반대로 서로를 위축시켜 더 소원하게 만들 수 있다. 내가 불러내는 폭력이 세계를 드러내는 언어인지, 각자를 고립시키는 벽이 될지 고민해 봐야 한다.
법사는 지금 강에서 헤엄치고 있다. 허리께에는 타박상이 있고 푸른 멍이 넓게 퍼져 있다. 그는 바위에 부딪치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손발을 움직이면서, 무슨 말인지 중얼거리고 있다. 야에코를 나쁘게 말하고 있는 게 뻔하다. 한 남자로 만족할 여자가 아니야. 지 애비 피를 이어받았으니까, 언젠가 틀림없이 못된 짓을 할 여자야. 남자를 파멸시킬 여자야, 당장 연락을 끊어라.
달에 울다를 색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빨강. 체리처럼 밝고 달콤한 붉은색, 오래된 짙고 선명한, 강렬하게 빛나는, 주황이 빛에 의해 드러났다 사라지는, 사과를 묘사하는 빨강을 무드보드에 담고자 하였으나 그 색이 모든 것을, 글마저도 잡아먹을 정도로 자신을 새겨 넣었다. 그 강렬한 색은 사람을 홀렸다. <달에 울다>와 무척 닮았다.
야에코 농장의 사과는 혈색을 띤다. 야에코를 베어 물면 사과향이 났고, 소설 속 ‘나’는 한 번 맛본 그 향을 잊을 수 없었다. 금지는 욕망을 억압하지만 동시에 그 욕망을 더 강렬하게 만든다. 야에코는 금지를 통해 더 선명한 상징이 되었고, 그 상징성은 '나'를 지배했다.
사과의 금지성. 인간은 혼자만 취하고 싶은 것에 금단과 성역을 만든다. 문학이 감싸 안은 이 금기는 때로는 은유가, 때로는 환유가 되어 내면의 갈등을 드러내고, 억제된 욕망을 폭발시킨다. 그래서 조심스레 말을 바꾼다. 금지라는 말 대신, ‘경계’와 ‘은밀함’을 내민다.
야에코가 떠나고 그녀의 사과밭을 통째로 차지한 ‘나’는 삶 자체를 금지당한다. '나'는 병풍 속의 눈먼 법사이자, 마을을 병들게 하는 오염된 물이며, 빛나는 생선껍질 옷을 입은 아버지이고, 절규하는 촌장의 모습으로 겹겹이 나타난다. '나'의 형벌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어서, 오직 백구만이 '나'의 곁을 지키는 벗이며 감시자였다.
길고도 짧은 '나'의 삶 마지막에 껍데기만 남아 돌아온 야에코와 전쟁 후 아버지가 유일하게 가져온 전리품인 생선껍질 옷은 무엇이 다른가. 야에코는 그의 삶의 유일한 전리품이자 금지가 드러낸 강렬한 상징성이다. 껍데기만 남아 돌아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나'의 인간성과 완전성의 상실을, 다른 하나는 전쟁과 폭력의 산물로서 잔해와 전리품이라는 의미이다. 마루야마 겐지의 폭력은 넓은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나는 '매우 사적인 의미의 폭력'에 생각이 머물러 있다. 오늘은 그렇다.
덧붙이는 말.
이 책을 읽을 당시 부산의 달맞이 길 아래 동네에 살고 있었다. 커피와 책을 가방에 담아 달랑거리며, 10분 거리의 고갯길을 오르면 대구탕이 맛있어 종종 찾는 식당을 지나 걷는다. 무심코 시선을 돌려도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하늘을, 바다를, 설치미술처럼 보이기도 하는 벚나무를 눈에 새기며 걷다 보면 어느덧 고갯길을 넘어가고 있다. 그날그날 마음에 드는 곳 어디든 주저앉아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한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달래줄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 충만함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이대로 사라져도 좋을 만족감이었다.
독서와 글쓰기를 무작정 성장과 치유의 과정이라 부를 수는 없다. 아무런 사유 없이 하루를 써 내려가는 것은 그저 쓰는 행위에 불과할 수 있다.
마루야마 겐지의 과격한 표현을 빌자면, "움직이지 않는 자는 죽은 자와 다르지 않다." 말한다. 그의 태도는 끊임없이 새로운 체험을 추구하는 속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그의 취미는 사치나 여가가 아니라 세계와 조우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정원에서, 낚시터에서, 먼 이국의 도로에서, 그리고 눈 덮인 마당에서 늘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의 대답은 언제나 분명했다. 취미는 곧 삶이며, 삶은 끝내 '자신만의 방식으로 즐기는 일'이라는 것이다. '소설은 너무 이완되어 있고, 시는 너무 긴장되어 있다.'는 그의 사유는 새로운 장르인 '시소설' <달에 울다>를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저마다 꿈꾸는 시와 소설이 있겠지만, 결국은 오래 남고 싶지 않을까. 그럼 이 형식을 빌려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