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

별처럼 반짝이는 메타포의 천국

by 요인영



내가 쓰는 글 속에서 나는 항상 독자의 주의력과 감수성을 ‘전체’에 집중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통합적인 서술자를 탄생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단순한 구성 요소의 결합을 넘어 고유한 의미를 만들어 내는 별자리의 존재를 암시하면서 조각 글의 형태를 실험해 보기도 했다. 내게 문학이란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직조하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상호 간의 영향과 연결이라는 통합적 관점으로 세상을 조망하는 에너지가 문학만큼 강력한 장르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능한 한 폭넓게 이해된다는 점에서 문학은 본질적으로 ‘네트워크’와 유사하다. 네트워크 덕분에 하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개체 사이에 광범위한 교감과 연결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정교하고 특별한 인간의 소통 수단이며, 수단은 명확하면서 동시에 총체적이다.

올가 토카르추크




천천히 한 글자씩 타이핑했다. 글자는 백의 공간에 구르듯이 나타난다. 생각은 때론 물리법칙을 벗어날 때가 있다. 빛은 생각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생각은 논리적, 물리적 인과나 순서를 무시한 채,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순간적으로 수많은 연상을 일으킨다. 스치듯 지나가는 연상을, 이 무의식적 점프를 어찌 물리법칙이라 할 수 있을까.


잡다하게 얽혀 도무지 글이 될 수 없는 것들은 별처럼 흩어진다. 잡을 수 있다면 그건 이미 별이 아니다.


간혹 그런 소설이 있다. 토카르추크의 문학은 초광속인 생각의 속도를 메우려 애쓴다. 그 격차를 이미지의 촉감으로, 문장의 리듬으로 메우는 장인이다. 그래서 읽을 때엔 오히려 발걸음을 늦춰야 한다. 한 글자씩 공들여 음미하며 읽어야 하는 소설. 내게 <태고의 시간들>이 그렇다. 소설가로서 올가 토카르추크가 한 일은 관념을 이미지화하여 관습과 분리하고, 본래에 가지고 있던 자연의 본성과 다시 이어준 것에 있다. 작가는 별처럼 반짝이는 메타포의 천국에서 살고 있다.


복잡한 것을, 다층적인 것을 한 번에 이해하는 쉬운 길은 없다. 문학은 해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어떤 소설은 더욱 그렇다. 정답과는 거리가 멀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멀어진다. 어떤 소설은 단순함보다는 뒤얽혀 차라리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길 바란다. 그 정교하면서 혼란한 실타래를 붙들고 앉아 시작과 끝을 들여다보길, 가위부터 찾는 성급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끝에서부터 거슬러올라 시작점에 닿아보길 원하는 것이다. '원형을 바탕으로 창조하고, 이야기를 풀어내고, 서술해 나가려 애쓰는 작가, 그러므로 이야기를 짓는다는 건, 영원한 작업'이라 말하는 그의 소설에 조금이라도 닿길 원한다면 날뛰는 마음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은 내게 묘기증을 앓게 했다. 빨갛게 밑줄 그은 책의 어떤 곳처럼, '커피 그라인더의 손잡이'가 현실의 곳곳에서 드러나보였다.





'미시아의 그라인더'는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들어낸 상징물이다. ‘독자의 주의력과 감수성을 전체’에 집중시키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른 내용은 다 잊어도 그라인더는 남는다.


인간은 스스로를 가장 치열하게 산다고 여기면서, 동물, 식물, 사물로 갈수록 그 치열함은 줄어든다고 믿는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사물이야말로 가장 오래, 가장 강인하게 존속한다. 사물의 무기력함처럼 보이는 지속성은 인간의 덧없는 열정보다 더 근원적인 힘을 드러낸다. 이 사물의 존속력은 곧 시간을 견디는 본질과 연결된다.


그라인더는 단순히 커피콩을 가는 기계가 아니라, '갈아낸다'라는 행위의 물질적 구현이다. 이 추상적 관념이 도자기, 나무, 놋쇠를 통해 형상화되며, 그 자체로 창조의 은유가 된다. 인간은 무에서 창조하지 못하지만, 사물은 관념과 물질을 접합시켜 새로운 질서를 낳는다. 그라인더는 '감정, 기억, 풍경을 흡수한다. 일시적인 인간의 경험을 자기 내부에 붙잡아두는 장치'다. '손잡이를 돌리는 미시아의 행위는 놀이이면서 동시에 우주적 질서를 움직이는 행위'로 확대된다. 여기서 '그라인더는 간다. 고로 존재한다'는 문장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비튼 것이다. 인간의 '사유'대신, 사물의 '작동'이 존재의 증거로 제시된다. 이건 인간 중심주의를 거꾸로 뒤집는 선언으로 읽힌다.


인상적인 것은 그라인더가 '현실의 축'으로 비유되는 대목이다. 이는 사물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고 지탱하는 본질적 요소라는 인식이다. 인간보다 사물이 더 근원적이고, 인간은 그 주변을 맴도는 존재일 뿐이다. 여기서 나오는 '태고'라는 개념은 우주의 원초적 기둥, 근원적 시간의 축과도 겹친다. 미시아의 그라인더는 단순한 물체가 아니라 태곳적 질서를 응축한 상징적 사물이다.



익사자는 ‘물까마귀’라 불리던 소작농의 영혼이다. 물까마귀는 어느 해 8월, 보드카로 피가 지나치게 묽어진 날, 저수지에 빠져 죽었다. 볼라에서 짐수레를 타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달그림자에 놀란 말이 갑자기 수레를 넘어뜨렸다. 농부는 얕은 물속으로 곤두박질쳤고, 말들은 당황해서 달아났다. 저수지 제방 근처의 물은 8월의 무더위에 데워져서 따뜻했고, 그 속에 누워 있으니 기분이 꽤 좋았다. 물까마귀는 자신이 죽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술 취한 물까마귀의 폐 속으로 따뜻한 물이 흘러 들어가자, 그는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 뒤로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술 취한 육신에 갇혀 우왕좌왕하던 그의 영혼, 무죄 선고를 받지 못해 신에게로 가는 길이 적힌 지도를 얻지 못한 그의 영혼은 마치 개처럼 버려져서 골풀 속에서 차갑게 식었다. p.100


익사자는 인간적 죽음의 실패에서 비롯된 상징이다. 물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물까마귀' 농부의 영혼은 지도 없이 방황한다. 그는 육신에도 영혼의 세계에도 속하지 못한다. 존재의 경계에서 유폐된 채, 안개와 그림자 속을 떠돈다. 이때 익사자는 죽음마저도 종결이 아닌 유예, 중첩된 시간의 미궁으로 변모시킨다. 죽음조차 닫히지 않는 세계, 그것이 익사자의 차원이다.


'안 죽음(유령)'은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정확히 괴물 같은 '산 죽음'이다.


철학서에서 본 이 문장은 한동안 나를 사로잡음과 동시에 너무나 낯설었다. 그러나 소설 속 익사자를 마주하며, 그 문장이 눈앞에 이미지로 펼쳐졌다. 죽음을 통과했으나 죽음 속에 안착하지 못한 존재.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 익사자는 그 문장이 말하는 '산 죽음'의 구체적 형상이었다.



땅속 깊은 곳, 보데니차 숲의 한가운데에 흰색의 커다란 균사체가 박동하고 있다. 바로 버섯균의 심장이다. 여기서 버섯균이 생성되어 세상의 모든 곳으로 퍼져나간다. 이곳의 숲은 어둡고 습하다. 무성하게 자란 검은 덩굴딸기가 나무 그르터기를 휘감고 있고, 모든 것은 이끼로 뒤덮여 있다. 사람들은 보데니차의 땅속에 버섯의 심장이 박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이곳을 피해 다녔다. p.225


버섯균의 박동은 인간의 심장처럼 분명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시간이 아니다. 여든 해에 단 한 번의 리듬. 인간의 세대와 생애를 뛰어넘는 이 호흡은, 우리가 시간이라 부르는 척도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돌려세운다. 인간은 하루, 계절, 일생을 중심으로 세상을 계산하지만, 버섯균은 그 바깥에서, 차갑고 축축한 지하에서 고유한 시간을 살아간다.


토카르추크는 소설의 소재로 버섯균을 선택했다. 버섯균은 전통적인 분류 체계 어디에도 매끄럽게 들어맞지 않는다. 식물처럼 땅에 고정되어 있으면서도, 동물처럼 외부로부터 양분을 흡수하고, 동시에 이 둘과는 전혀 다른 고유한 진화 경로와 생활사를 지닌다. 그래서 생물학자들은 결국 버섯균을 균계라는 독립된 왕국으로 분리해 두었다. 버섯균은 스스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 그 자체로 경계 위에 선 타자다.


바로 이 점에서 '버섯균'은 '그라인더'처럼 단순한 소재를 넘어선다. 인간이 세운 범주와 분류의 경계를 교란시키고, 인간적 사고의 질서를 뒤집는다. 버섯균은 분류에서 벗어나듯, 인간적 시간 개념에서도 이탈한다. 토카르추크가 그려내는 버섯균은 결국 시간의 전복자다. 인간은 물리법칙을 절대적이라 여기지만, 버섯균의 박동은 그 질서를 무화시킨다.




덧붙이는 말.

태고의 시간들의 폴란드어 원제 Prawiek I Inne Czasy(프라비에크 이 인네 차스이). '프라비에크'는 아득한 옛날을 뜻하며, 소설 속에서는 신화와 시간의 시작을 상징하는 장소나 시기를 의미합니다. '인네 차스이'는 다른 시간들이라는 뜻으로 시대와 시간들이 겹치고 변모하는 다양한 시간대를 나타냅니다.


작가의 글은 편린입니다. 흩어져 있지만 서로 반짝이며 하나의 세계를 암시합니다. 일관성이 느껴지는 것은 그가 만든 태고라는 공간의 완전함 때문입니다. 글의 편린들은 전체를 비추는 빛의 파편처럼 태고를 끝내 하나의 형상으로 드러냅니다.


사물의 형상을 한 어떤 것,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것, 식물과 동물도 아닌 다른 것만을 꺼내왔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복잡하고 길게 얽힌 인물의 서사를 다룹니다. 완전한 공간에 불완전한 인간이 각각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죠. 인물마다 소품마다 작가의 철학과 깊은 사유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작가는 사물을 형식적으로 볼 수 없고, 존재를 자체로 볼 수 없게 된 사람입니다. 있는 것은 주변의 차원을 열고, 없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선택했음에도 단어와 문장에 지배되는 작가가 있다면 올가 토카르추크는 불러서 곁을 내어준다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언어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고, 넘치게 갖고 있는 것에 잠식되어 눈멀지 않는 사람. 그런 작가가 다루는 신은 이런 존재이기도 하죠.




신에게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때로 신은 자신이 세상 속에 가두어 놓고, 시간의 굴레에 얽매어놓은 인간들처럼 죽어버리고 싶었다. 이따금 인간의 영혼은 만물을 꿰뚫어 보는 신의 시야에서 감쪽같이 벗어나서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그럴 때면 신의 갈망은 더욱 강렬해졌다. 자신 말고도 절대 불변의 질서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질서로 인해 변화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의 모형으로 결합된다는 사실을 신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조차 아우르는 그 질서 안에서 시간에 의해 흩어져버리는 순간적인 모든 것들이 마침내 시간의 너머에서 일제히 그리고 영원히 존재하기 시작한다. p.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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